필자는 아직도 은혜를 못다 갚아 보내드리지 못한 어머님이 계신다. 어머니는 돌아가셨지만 나는 여태 어머니를 보내지 못하고 있다. 어머니에 대한 죗값이 너무 크고 살아계실 때 자식의 도리를 못다 한 것이 많기 때문이다. 언젠가 고향 선산에서 벌초를 하고 온 다음 날 아침, 어머니께서 아침 밥상을 앞에 놓고 하룻밤 묻어두었던 궁금증을 묻기 시작하셨다.

“그래, 어디 갔다 왔어?”

“서리골(고향)서 벌초하고 집안 어른들 뵙고 왔어요.”

“그래, 서리골은 모두 평안하고?”

“네. 일직 아재네, 연서 형님네, 국서네 모두 잘 있어요.”

“그래, 할매 할배 산소도 다녀오고?”

‘그 일 때문에 갔는데 그럼 다녀오지 안 다녀왔겠어요?’

“왜 대답을 안 하니?”

“아니, 그런 뻔한 일을 가지고 자꾸 물으니까 그렇지요.”

“그럼 궁금한데 묻지 안 물어?”

“됐어요. 인제 그만 하세요.”

“뭘 좀 물어보면 저런다니까?”

오래 전 기억이지만 그때 일을 떠올리면 지금도 낯이 뜨겁다. 당시만 해도 어머니에 대한 나의 태도는 대체로 공손하지 못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분인 어머니가 나에게는 그처럼 달갑지 않았다.

어머니에 대한 나의 이런 태도는 어린 시절로 올라가면 이해가 된다. 네 살 때 6.25 사변으로 헤어졌다가 아홉 살 때 다시 만난 어머니는 낯설고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그러나 그동안 나를 애지중지 키우셨던 할머니와는 정이 들었고 안 보면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보고 싶었다. 가끔 할머니와 어머니가 다투는 모습을 봐도 할머니는 당차고 분명한 모습이었으나 어머니는 나약하고 모자란 모습 같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할머니와 어머니는 고부지간이니 며느리인 어머니가 보여주신 모습은 당연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 나에게 비친 어머니의 모습은 나약하고 못나보였다. 그렇게 함께 살기를 50여 년, 어머니는 아들 하나 잘 키우려고 행상을 하고 농사를 지으며 억척스럽게 사셨다. 하지만 나는 어머니를 가까이 하는 것이 어색하고 싫었다. 그러다보니 어머니의 마음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며 건성으로 대하곤 했다. 이러한 행위를 한 뒤에는 늘 후회했고 가슴 아파했다. 어머니가 살아오신 피눈물 나는 삶의 여정을 생각하노라면, 나의 행위는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일이었다.

그래서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을 보상이라도 하듯 때때로 조선조의 문장가 박인로의 ‘조홍시가(早紅?歌)’를 읊으면서 어머니에게 지성껏 효도해야겠다고 수없이 다짐하기도 했다. 심지어 어머니 방에 돼지 저금통을 갖다놓고 매일 저금을 하면서 어머니에게 가까이 가려고 했다. 이뿐만 아니라 부모에게 불효하는 자식들을 비난했으며, 학생들에게는 효도가 인간 행위의 가장 근본임을 강조하곤 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어머니에게 편안하게 다가가지 못했으며, 늘 죄스러운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약해보이기만 한 어머니
자식 키우려 온갖 고생해도
심리적으로 멀게만 느껴져

못 갚은 은혜 恨으로 남아
그리움을 늘 가슴에 묻고
존중의 자세로 세상 대한다

그러다 이러한 마음과 행동의 불일치가 깨어지는 기회가 왔다. ‘아봐타’ 프로그램에서 어머니를 불러보는 기회가 있었는데, 처음에는 “어머니!”라는 말이 크게 나오지 않았다. 지도자가 좀 더 큰소리로 불러보라고 했고, 점점 더 크게 불렀다. 그렇게 소리가 점점 커지면서 떨리기 시작했고, 끝내는 울음소리로 바뀌면서 온통 눈물바다가 되었다. 내 가슴 저 밑바닥에는 어머니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이 있었다. 프로그램을 마치고 집에 와서 어머니를 뵈었을 때 그 자리에는 이전의 낯선 어머니가 아니라 그처럼 보고 싶고 그리워했던 어머니가 계셨다. 나는 어머니를 껴안고 죄를 뉘우치며 마음속으로 울었다. 그리고 얼마 못가 어머니는 앓아누우셨고, 나는 온 정성을 다하여 대소변을 비롯해 몸을 씻겨드렸으며 비쩍 마른 나뭇가지 같은 어머니의 몸을 만지면서 한없이 울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그러니 어찌 그립지 않으리오. 그래서 돌아가신 어머니만 떠올리면 박인로의 ‘조홍시가’가 함께 떠오른다.

盤中(반중) 早紅(조홍)감이 고아도 보이다/柚子(유자) 안이라도 품엄 즉도 다마/품어 가 반기리 업슬 글노 설워이다.

<소반에 담긴 일찍 익은 붉은 감이 곱게도 보이는구나/ 유자가 아니라도 품안에 몇 개 집어넣고 싶지만/ 품어 가져간다 해도 반가워할 어머니가 없어 그 때문에 슬프다>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의 육적이 여섯 살 때 원술이란 사람을 찾아갔다. 그 자리에서 귤을 대접받고 몇 개를 몰래 품었는데, 집을 나오면서 인사를 하다가 떨어져 들키게 되었다. 이에 원술이 그 까닭을 물으니 집에 있는 어머니께 드리려 했다 하므로 그 가족이 모두 육적의 효심에 감동했다. 육적이 귤을 품어갔듯이 박인로 자신도 친구에게 홍시를 대접받고 품어가고 싶으나 어머니가 계시지 않으니 그 서러움을 시조로 남긴 것이다. 이제 필자도 그러한 서러움을 간직하고 있다.

시대는 바뀌어도 변하지 않은 진리가 있다면 바로 부모에 대한 효도일 것이다. 부처님은 한량없는 부모에 대한 은혜에 보답해야 함을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으로 말씀하셨다. 부모의 은혜가 너무나 크고 깊으므로 그 은혜를 이렇게 비유한 것이다.

어찌 보답할 것인가. 어머니가 아이를 낳을 때는 서 말 여덟 되의 피를 흘리고, 낳아서는 여덟 섬 너 말의 젖을 먹인다. 그래서 부모의 은덕을 생각하면, 자식은 아버지를 왼쪽 어깨에 업고 어머니를 오른쪽 어깨에 업고서 수미산을 백천 번 돌더라도 그 은혜를 다 갚을 수 없다. 부모의 은혜를 보면, 하나는 아이를 잉태하여 지키고 보호하여 주신 은혜, 둘은 낳으실 때 고통을 받으신 은혜, 셋은 아이를 낳고서 그 고통을 잊으신 은혜, 넷은 입에 쓴 것은 삼키고 단 것을 뱉어서 먹이신 은혜, 다섯은 마른자리에 아이를 뉘고, 자신은 젖은 자리에 누운 은혜, 일곱은 더러움을 깨끗이 씻어주신 은혜, 여덟은 먼 길 떠난 자식을 염려해 주신 은혜, 아홉은 자식을 위해 나쁜 일도 마다하지 않은 은혜, 열은 생을 마칠 때까지 자식을 사랑하신 은혜.

<부모은중경>에서 보듯이 부처님은 ‘어머니가 자신의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 놓는다’고 말씀하셨다. 자식은 곧 자신의 생명이라고 본 것이다. 필자도 내 아이를 키우면서 아내가 아이들에게 하는 모습을 보면 부처님의 말씀과 똑같았다.

시대는 바뀌어 가정에서의 부모나 어른이 사회나 국가에서 노인으로 대접받는 복지국가로 변화하고 있다. 국가차원에서의 물질적인 복지는 점차 이루어지고 있으나 정신적, 윤리적인 측면에서 보면 오히려 퇴보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핵가족이 되면서 자녀들은 그들의 자식들을 위해 독립해서 살다보니 나이든 노부모들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고 있고, 나이만 들고 생산성이 없는 부모들은 자칫 자녀들에게 짐이 되고 있다. 그러나 사회가 밝고 건강하려면 뿌리부터 건강해야 한다. 부모에 대한 공경은 바로 사회 질서가 잡히고 안정적이 되어가는 지름길이다. 인도에서는 사람을 만날 때 두 손을 합장하며 ‘나마스테’라고 인사한다. 이것은 ‘내 안의 최고가 당신 안의 최고에 고개를 숙인다’는 의미가 담긴 깊은 존중의 표현이다. 이처럼 우리가 나이든 사람들을 만나 인사할 때 마음속으로 ‘나는 깊은 존중심을 가지고 당신에게 머리를 숙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제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나는 홀로 남았다. 가신 어머니를 위해 내가 할 일은 세상의 어머니를, 부모를 위해서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그러면 내 안에 계시는 어머니는 편안히 가시게 될 것이고, 내 인생은 더욱 풍부해질 것이다. 그러기 위해 나이 든 어른들을 만나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다가가야 하는 것이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늘 부모나 사회로부터 무언가를 원하고 바라며 살아왔으니 이제는 ‘무언가를 주는’ 마음이 무의식이 되고 습관이 되도록 익숙해져야겠다. 지금까지 못다 한 부모님의 은혜를, 늦었지만 세상을 위해 갚아나가야겠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