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대한불교진흥원 강좌… 주제: 철학자가 본 십이연기

삶은 곧 고통이다. 그렇기에 불교 핵심 교리인 사성제의 첫 번째도 고제(苦諦)다. 이런 고통의 원인과 결과를 바로 보게 하는 것이 번뇌로부터 괴로움에 이르는 12가지 인과관계를 설명한 십이연기(十二緣起). 이로써 해탈을 얻어 윤회의 고리를 끊는 것이 불교다. 그렇다면 우린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할까?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는 7월 18일 대한불교진흥원 화요열린강좌서 십이연기를 주제로 강의했다. 이 교수는 “분별·집착으로 인해 삶을 고통으로 여기고, 이는 곧 윤회마저 고통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며 “이 같은 관념을 지워낼 때 윤회도 해탈로 이해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정리=이지선 수습기자

이진경 교수는…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학사·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수유너머N(nomadist.org)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본명 박태호로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기초교육학부에서 강의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철학의 외부〉 〈자본을 넘어선 자본〉 〈삶을 위한 철학 수업〉등이 있다.

조건에 따라 변화하는 본성
십이연기 통해 바로 알아야
분별·집착으로 생기는 고통
관념 없애야 허무 사라진다

불교의 가르침을 ‘연기(緣起)’라고 얘기하는데 여러분은 “연기법이 뭔가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어떻게 답하시나요? 저는 이 부분이 참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연관을 얘기하는 건지 상관을 얘기하는 건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부분이었기에 부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부분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에 역사 속에서 부처님 가르침이 펼쳐지는 걸 보면서 저는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연기적 조건’이라 하는 것은 어떤 것들이 기대어져 있는 조건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연기법’이라는 것은 ‘모든 것들은 기대어 있는 연기적 조건에 따라서 본성을 달리하는 것’이라 이해했습니다.

이건 사물을 보는 중요하고도 다양한 사고방식으로 연결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깨에 무언가 얹는 시늉을 하며) 제가 어깨에 무엇을 올린 것 같나요? 이것은 바이올린입니다. 바이올린의 본질은 연주하기 위한 악기죠. 그런데 제가 지금 활을 들고 연주한다면 1분도 안되어 여러분들은 나가버릴지도 모릅니다. 제가 아무리 멋지게 연주하려고 애써도 고문기계가 되는 것이죠. 그런데 바이올리니스트 어깨에 이 바이올린이 딱 올라간다면 아주 훌륭한 악기가 됩니다. 그렇다면 고문기계하고 악기, 어느 것이 바이올린의 본성일까요? 대부분이 악기라고 대답하실 겁니다. 그러면 제가 연주할 때는 이 물건의 본성하고 아무 상관없는 건가요? 그렇진 않을 겁니다. 똑같은 바이올린이 누구 손에 들어가느냐에 따라 아주 다르게 변하는 거죠. 물리적 성질이 변하지 않아도 바이올린에 기대어져 있는 ‘조건’에 따라서 바이올린의 본성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십이연기의 과정
이런 연기법과 결부해서 십이연기가 있는데 잘 아시겠지만 무명(無明)·행(行)·식(識)·명색(名色)·육처(六處)·촉(觸)·수(受)·애(愛)·취(取)·유(有)·생(生)·노사(老死)가 있습니다. 생과 노사를 연기법에 의해 인과관계를 설명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부처님이 깨달으신 후 중생의 삶이 고통에 가득 차 있는 걸 보시고 이를 해결할 답안으로 내신 것이 십이연기라고 봅니다.

저는 처음 불교를 접했을 때 십이연기 연결고리가 잘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통상적인 설명, 책 이런 걸 떠나서 제가 한번 왜 이렇게 부처님이 말씀하셨을까 따져보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무명은 실상을 안다는 개념과 거리가 있음은 틀림없는데 무명과 무지가 다르다는 생각은 반드시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지라는 건 도대체 뭘까, 왜 무명은 무지가 아닌데 알지 못함을 뜻하는 말이 됐을까 고민했습니다.

저는 무명이라고 하는 것은 안다, 모른다는 개념이 없는 상태의 세계를 뜻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즉 그것은 부처님이 말씀하셨듯이 세상은 무상하게 변한다는 거죠. 제일 흔한 오해가 이 무상을 인생무상과 같이 허탈함으로 해석하는데 그게 무상의 원래 뜻은 아닙니다.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뜻인데 여러분은 지금도 무상을 보고 계신 거예요. 여러분의 신체를 안으로 들여다보면 지금도, 밤에 자고 있을 때도 세포들이 계속 주위 세포들과 통신하고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이 무상한 움직임이죠. 세포도 자세히 그 안을 들여다보면 핵, 미토콘드리아 등이 또 활발히 움직이고 있어요. 이런 걸 생각해보면 우리가 무상하다는 말을 얼마나 쉽게 써왔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 다음이 행(行)이죠. 뇌를 보통 생각기관이라고 생각하시겠지만 운동기관입니다. 운동을 위해 존재하죠. 멍게는 뇌가 없습니다. 안 움직이고 착생생활을 하니까 뇌가 필요 없는 것이죠. 근데 멍게는 자웅동체여서 새끼를 혼자 만들어내는데 이 새끼가 올챙이처럼 생겼고 뇌가 있어요. 움직여서 자신이 착생할 곳을 물색해서 딱 머리부터 박고 착생해요. 그 다음에 꼬리를 먹어치우고 뇌를 먹어치워요. 이제 더 이상 움직일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올챙잇적에는 뇌가 있었는데 성체는 뇌가 없습니다. 이렇듯 움직임을 위해서는 뇌라는 운동기관이 필요하고, 이 움직임을 순간적으로 정지시켜서 포착하는 게 그 다음인 식입니다.

식(識), ‘안다’는 것은 무언가를 정지시키는 것이기에 무상한 것에 대해서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변하는 중 한 순간 멈춘 상태를 고정시켜서 포착하는 거예요. 그래서 식이라는 것은 무상한 것들을 멈춤으로써 발생하는 겁니다. 식은 실상이 아니고 실상에서부터 떨어져 있는 것이기에 오히려 무지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이건 생활에 꼭 필요한 유용한 무지입니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서 토끼 두 마리가 호랑이를 만나서 도망가다가 한 놈이 잡아 먹혔어요. 다음 날 무늬가 다른 호랑이가 나타났는데 살아남은 토끼가 어제와 다른 호랑이라고 인식해서 도망 안가면 어떻게 될까요? 잡아먹히겠죠. 비슷한 것도 같은 것이라 인식해서 도망가고, 이런 식을 통해 살아남은 동물들의 뇌가 진화할 수 있었던 겁니다. 다른 호랑이인데 같은 호랑이라고 판단한 거니까 결국 무지지만 유용하고 필연적인 것이죠. 세상은 카오스인데 그 카오스를 견디면서 우린 살 수 없으니까 딱딱 식을 포착해서 우리가 다룰 수 있는 것으로 바꾸는 것이죠. 필요한 것이니까요. 이걸 바꾸는 게 행이에요. 행은 행동을 뜻하기도 하고 행동하려고 할 때 의지를 뜻하기도 합니다. 식은 살겠다는 의지, 행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명색은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두 개가 합쳐진 말입니다. 식이 생기면 식들에 대해서 분류하게 됩니다. 먹을 것, 피해야 할 것 등 이렇게 분류하고 판단하는 거죠. 분류한다고 했을 때 가장 기본은 안팎을 분류하는 거예요. 동물적으로 면역계가 이런 판단을 가장 기본적으로 하게 되는 거죠. 피부가 1차 면역계에 해당되고 입 안의 침, 몸 안 구멍의 체액 등도 다 면역계입니다. 내 몸에 있는 단백질, 효소 등을 기억했다가 다른 형태가 나타나면 공격하는 거죠. 내 몸의 안과 밖을 가르는 미시적인 인식의 체계라고 볼 수 있는 거죠. 자극의 재료가 되는 것들은 물질적인 것에 가깝고 이것들을 지각하는 작용은 정신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명색과 육처사이에 자아라는 것이 숨어있다고 생각합니다. 식을 형성하는 기관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6가지 감각기관만 있는 것이 아니에요. 심지어 세포핵 안에 있는 DNA들도 식을 형성해요. DNA는 아데닌(A), 시토신(C), 구아닌(G), 티민(T) 등 네 가지 염기가 3개씩 어떻게 묶이느냐에 따라 형성되는 게 달라지는데 자기 짝을 알아본단 말이에요. 이것도 식 아닐까요? 무명, 행, 식 할 때 식은 감각기관 이전의 식이에요. 부처님이 이런 걸 아시고 말씀하셨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놀랍게도 이때 식은 감각기관 이전에 존재하는 식을 말하는 거예요. 그리고 육근의 감각작용을 하는 것들을 촉, 수 이렇게 명명하신건데 이건 현대과학과 아주 잘 맞아 떨어지는 부분입니다.
 

분별로 생겨난 苦
그러고 나서 애·취가 나오는 거죠. 애·취는 감정이 작용하면서 대상과의 관계를 굉장히 증폭시키고 강화시킵니다. 다양한 집착이 있음(有)을 만들게 되는 거죠. 사실 무상한 것은 가질 수가 없지 않습니까? 가져봤자 사라질 것인데 가지게 되면 이것은 사라지지 않을 거라는 망상, 즉 유를 만들어 내는 겁니다.

유에서 생이 나오는데 세상이 끊임없이 생멸하고 변화하는 것이라고 했을 때 존재하는 것은 결국 생성밖에 없는 거죠. 있던 것들이 없어지고 없던 것들이 생기는 겁니다. 즉 탄생과 죽음이 공존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죽음도 생성의 일부고, 탄생도 생성의 일부고 이렇게 공존하는 것입니다. 유라는 것은 어느 한순간에 고착시켜버렸을 때 계속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또 하나의 무지입니다. 우리는 보통 생멸하는 것은 전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있는 것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 멸한다고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이게 유와 생을 뒤집어버리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생이 있고 생겨난 것을 고정시켜버릴 때 ‘유’라는 허구적인 관념이 발생하는 건데 유를 실체화하면서 생이라는 것들을 다음으로 배열해버리고 그 다음에 노사와 연결하는 것이죠.

제가 지금 말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제 세포의 일부는 계속 죽어가고 태어나고 있습니다. 때가 되면 세포 안에 미토콘드리아가 자살스위치를 딱 켜요. 그러면 그 세포는 이제 죽는 거죠. 만약에 일부 세포들이 ‘난 죽고 싶지 않아’ 이러면서 집착하여 남아있다면 그게 바로 암세포가 됩니다. 암세포는 병균이 아니라 내 몸의 세포가 자살스위치를 안 켜서 생겨나는 거예요. 세포 하나하나의 애착, 집착이 결국은 신체 전체를 죽음으로 이끄는 거죠. 사실은 죽음 없이는 생이라는 게 있을 수가 없기에 죽음조차도 생의 일부로 다룰 수 있을 때에 죽음도 생도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유무를 분명하게 구별하게 되면 탄생과 죽음 사이에 있는 것이 유라고 정의하게 되고 탄생의 반대는 죽음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더불어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끼며 늙는다는 것은 고통이고 인생은 ‘결국 다 죽을 건데’라는 생각에 의해 태어나는 것부터가 고통이 되어버리는 관념들이 출현하게 되는 거죠. 윤회는 영원히 죽지 않고 사는 건데 왜 사람들이 고통이라고 느끼고 끊고 싶어 할까요? 생을 고통이라고 느끼는 사람에게는 고통의 영원을 뜻하는 것이기에 그런 거겠죠? 사실은 이런 관념 때문에 고통이 발생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관념을 싹 지워버리면 결국 ‘윤회가 곧 해탈’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질 수 있는 거죠. 따로 깨달을 것도 없게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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