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주히 세력 넓히는 者, 수행승 아냐
꾸밈없이 진솔히 살아야 진정한 비구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이다. 깨달음은 참사람의 완성을 의미한다. 자유와 평화 행복인이 되는 것이다. 하여, 깨달은 사람은 생각의 윤회에서 자유로운 것이다. 의혹됨이 없고 걸림이 없으며 속이지도 속지도 않는 사람다운 사람이다. 없으면 없는 대로 꾸미지 않고 있으면 있는 대로 드러내지 않는다. 낮과 밤이 한결같아 숨기거나 감추지 않으며 드러난 진리와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

하나를 보여도 열을 보이는 것이요 열을 보여도 하나를 감추지 않는다. 오고 감이 분명하나 집착하지 않고 있고 없음을 헤아리나 분별심에 머물지 않는다. 범부와 성인(聖人)이 둘이 아니나 차별이 없음이요 삶과 죽음이 어우러져 진솔함을 벗어나지 않는다. 말과 행동이 꾸밈이 없어 누구에게나 좋은 스승이요, 희(喜)·노(怒)·애(哀)·락(樂)을 굴릴 줄 알아 아무에게나 착한 벗이다. 상식이 통하는 이웃이요 원칙이 지켜지는 동네 친구이다.

눈물이 있어 마음 나누는 형제자매이고 웃음이 있어 가슴을 덮여주는 마음 편한 동무이다. 꾸미지 않는 자연이요, 머묾이 없는 바람이다. 따지며 계산하지 않고 흉보며 멀리하지 않는다. 변명으로 드러내지 않고 디딤돌로 돋보이려 키를 키우지 않는다. 감투와 명예를 멀리하고 조직과 편 가르는 일에도 졸업한지 오래이다.
모으고 챙기며 쌓아두려는 사람은 수행인이 아닌 업덩이 중생이요, 명분과 실리(實利)를 앞세워 조직 관리하는 사람은 수행인이 아닌 머저리의 무리이다. 소위, 자칭 깨달았다는 사람들이 돈과 명예, 감투를 구걸하듯 세력을 넓히는 부끄러운 짓을 자주 보게 되는데 이는 자신도 속이고 남도 속이는 얼굴 두터운 흑암(黑暗)의 무리일터.

깨닫기 이전과 깨달은 이후가 달라진 것이 있다면 꾸미는 법문 내용과 위세를 떨치며 신도 늘리는 계산된 언행으로 수입 키우고 명예 높이는 일일터.

자유는 커녕 돋보이려는 꾸밈과 허세를 생활화 하며 신도들로부터 거둬들인 돈으로 큰 사찰에 대중공양을 앞세우며 구걸하듯 동조세력을 넓히는 것이 깨달은 자의 자유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비구는 걸사(乞士)이다. 비구가 몸에 걸치는 가사는 원래 분소의(糞掃衣)에서 출발한다. 출가(出家) 이전의 생활과 견주어 출가 이후의 생활이 여러 가지 의미에서 넘쳐나는 물질적 풍요는 없는지 살피고 또 살필 일이다.
깨닫기 이전의 구도자의 청빈한 생활과 깨달은 이후의 흥청망청 넘치는 풍요는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살피고 또 살필 일이다.

괘도를 이탈한 행위 자체에도 회초리를 맞을 일이지만 겨우 실눈을 뜨고 확철대오한 개안종사(開眼宗師)인양 자신도 남도 속이는 나날의 죄업(罪業)이 죽음 문턱에 이르러 뼈를 녹이는 고통으로 다가올 터이다.
수행승은 진솔하고 순수해야한다. 깨달음을 향해 게으름 없이 꾸준히 노력하고 가난과 검소함이 생활화 되어야한다.
수행승은 진제불교(眞諦佛敎)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도록 자가 점검을 소홀이 해서는 안 될 터이다. 목탁불교, 치마불교, 재 문화 불교로 신앙을 거래하는 듯한 부끄러운 풍토에 안주(安住)해서는 안 될 터이다, 그렇다고 세제불교(世諦佛敎)가 격이 낮은 것은 아니지만 수행자라면 법(法)과 원칙에 어긋남이 없도록 꾸준한 탁마와 열림을 스승으로 삼아야한다.

거듭 밝히지만 수행승은 수행승다워야 수행승이다. 있으면 있는 대로 감사할 줄 알고 없으면 없는 대로 꾸밈이 없이 진솔하게 받아들이며 고마워하며 살 일이다.
출가(出家)할 때의 순수했던 초발심(初發心)으로 드러내거나 돋보이려 꾸미지 말고 한 서너 걸음 뒤로 물러나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헐떡임에서 제발 자유인으로 살 일이다.
분주하게 조직을 키워가거나 세력을 넓히는 일은 수행승의 자세는 아닐 터이다. 깨달음은 참사람이요 행복과 자유를 완성하는 것이다. 거짓 깨달음으로 업덩이 중생이 되지 말 일이다. 살피고 또 살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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