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선비, 불교를 만나다

박동춘 지음|이른아침 펴냄|1만 8천원

유학자와 승려들 끊임없이 교유

밤새워 차 마시며 시와 학문 토론

스님들 국가위기 때 구원투수 역할

儒佛의 긴장과 화해로 조선 지탱

 

주지하다시피 조선은 숭유억불의 나라였다. 하지만 조선 불교는 나름의 방식으로 확장되고 깊어져 당시 사회를 떠받치거나 혹은 주도 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유교와 불교를 책임진 두 핵심 집단, 곧 유학자와 승려들 사이의 끊임없는 교류 때문이었다. 숭유억불이라는 캐치프레이즈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수많은 선비들은 갓을 쓴 채 사찰에 드나들고, 승려들과 어울려 차를 마시고, 밤새워 시와 학문 토론을 멈추지 않았다. 탈속과 해탈을 꿈꾼 유학자들이 그만큼 많았다는 증거다. 반대로 불가의 승려들은 국가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구원투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유불의 긴장과 화해가 조선 왕조 500년을 지탱하는 하나의 기둥인 셈이었다. 무엇이 이질적인 이념을 좇던 이 두 집단을 하나로 묶은 것일까? 이 책에서 저자는 선비의 몸으로 부처님을 만나고자 한 사람들의 삶을 통해 그 답을 찾아 나선다.

 

조선시대 유교와 불교는 어떤 관계?

조선이 건국된 후, 유불의 교유는 정치적인 이유서, 표면적으론 대척을 하는 듯 하지만, 실제 학문의 지혜를 갈고 닦던 사람들의 인간미 넘치는 교류가 끊어져 버린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념적 갈등으로 겉으로 드러난 마찰이 컸던 시대일 뿐이다. 당시 새 시대를 열던 조선 유학자들은 국태민안(國泰民安)을 정치적 이상으로 삼았다. 성리학은 이들의 이상적 목표를 담아낼 원천과도 같았다. 따라서 유불의 갈등은 불가피한 시대적 운명이었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도 유불의 교유는 계속됐고, 유교는 불교를 통해 새로운 정신과 기운을 끊임없이 공급받았다. 해탈과 달관을 위주로 하는 불교가 지극히 현실주의적인 유교와 유생들의 삶에 새로운 에너지를 공급하는 하나의 원천인 셈이다.

 

억불시대 스님들, 깨달음 경지 시어로

숭유억불의 시대적 상황에서 불교는 점차 정치, 사회적으로 힘을 잃어갔다. 하지만 불가의 구성원, 즉 수행승들의 수행 의지마저 벼랑으로 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산간으로 밀려난 수행승들은 속세와의 인연서 놓여나 오히려 조선 불교만의 참선과 수행 전통을 완성했고, 수행의 여가에는 시를 짓고 차를 즐기며 유학자 못지않은 학문과 철학의 깊이를 확보했다. 스님들이 정치,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은 전대에 비해 미약해졌다 하더라도 수행에 대한 이들의 의지는 더욱 강성해질 수밖에 없었고, 백척간두서 수행력을 탁마한 승려들은 그 깨달음의 경지를 시어로 풀어내기도 하였다.

 

시와 차로 맺어진 유불의 인연

서로 다른 이념과 철학을 추종한 유가와 불가의 인연은 주로 시와 차를 통해 이루어졌다. 조선의 수행승들은 자신의 시축 말미에 제발(題跋)을 받고자, 당대의 이름 높은 선비를 찾아 나섰으니 이는 조선시대 유불 교유의 독특한 양상이다. 물론 조선 전기, 중기, 후기마다 다른 특징을 보인 것도 사실이지만 억불 시대에서도 이들의 교유는 지속됐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시 외에 유불의 교유를 가능케 하고 지속시킨 중요한 매개 중의 하나가 차였다. 다산과 초의, 초의와 추사의 인연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차라는 음료를 통해 인간적으로 가까워졌고, 또 인간적으로 가까워지자 정신적으로도 일종의 동지가 될 수 있었다. 비록 추구하는 이상은 서로 달랐지만 아끼고 존중하는 미덕이 싹텄고, 배려와 상호이해의 바탕이 마련됐다. 자칫 외눈박이로 전락할 수 있던 조선의 유교와 불교는 이런 교유와 상호 이해를 통해 발전과 화해를 모색할 수 있었다. 이 책은 이런 유교와 불교의 상호 교유를 선두서 추진한 유생과 스님들의 이야기다. 이들의 삶을 통해 조선시대 유교와 불교의 상호작용을 파악하는 한편으로 두 사상과 철학의 접점을 통해 진정한 삶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천착한다.

 

박동춘 소장은?

응송 박영희 스님에게 <다도전게(茶道傳偈)〉를 받음으로써 조선 후기 초의선사에 의해 정립된 우리 전통차의 적통인 ‘초의차’의 이론과 제다법을 이어 받았다. 저자는 ‘초의차’를 잇는 한편 초의선사뿐 아니라 한국 차 문화와 관련된 자료를 발굴하고 연구하는 일을 병행하면서 동국대 대학원 선학과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성과를 모아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다. 응송 박영희 스님으로부터 무공(無空)이란 법호를 받았고, 사단법인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에서 ‘초 의차’를 계승하는 ‘동춘차’를 만들며 한국 다도의 맥을 보존 전수하고 있다.

현재는 성균관대학, 한국전통문화대학 등에 출강한다. 제2회 화봉학술문화상을 수상했고, 제22회 행원학술 특별상을 받았다. 저서로는 <초의선사의 차 문화 연구>(일지사), <맑은차 저멸을 깨우네>(동아시아), <우리시대 동 다송>(북성재), <추사와 초의>(이른아침), <박동춘의 한국차 문화사>(동아시아) 등이 있다.

 

저자가 말하는 〈조선 선비들의 불교 이야기〉

 

5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억불숭유(抑佛崇儒)를 표방한 시대였다. 원활하고 튼튼한 통치 구축을 위한 조치로, 승려 출가를 제한하고 승려들을 환속 시켜 그 수를 줄였다. 또 다른 한편으론 사원 경제의 기초인 토지를 환수 하는 등, 불교계의 영향력을 물리적으로 약화시켰다. 하지만 조선시대는 불교가 더 이상 발전될 수 없는 시대적 토양 속에서도 이를 극복하려는 불교계의 노력이 특별히 돋보인 시기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척박한 토양에서도 수행의 높은 경지를 드러낸 승려들은 투철한 수행을 통해 명징한 수행력을 구현했다. 이뿐 아니라 환난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구국의 단심을 불태운 승병들이 출현한 것도 조선시대 스님들이 보인 결단력이다. 아무튼 조선은 유불의 이념적인 갈등에 따라 일시적인 화합이 도모되기도 하고 갈등이 심화된 시기이지만 선비와 승려들의 인간적인 교유는 간단없이 이어졌다. 이들은 종교와 이념을 뛰어넘어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 시를 지어 서로 화답했으며 스님들의 시축 말미에 서문을 써주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다. 선비와 깊이 교유한 승려들은 때로는 자신의 수행처에서 생산된 산채 나물이나 짚신, 먹, 종이, 차뿐 아니라 절에서 만든 음식을 보내 훈훈한 정을 교류하는 일도 다반사였다. 물론 이런 유불의 교유는 예나 지금이나 이어지는 일이거니와 굳이 유불 교유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 본다면 아마도 동진 때 인물, 혜원과 육수정, 도연명이 일군 유불의 교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후일 ‘호계삼소(虎溪三笑)’로 통칭된 이들의 아름다운 유불의 교유는 실로 속기나 꾸밈, 유불리(有不利)를 따지지 않던 대인들의 통유를 실천한 점에서 후인의 귀감이 됐다. 조선 전기 인물, 삼탄 이승소(1422~1484)와 일암전 장로의 교유서도 이런 유형은 드러난다.

바로 일암전 스님은 백년의 번뇌를 떨쳐 버리고 깊이 일미선에 들었던 수행자였다. 몸이 한가해 늙음도 찾아오지 않았을 수행자, 일암전 스님은 현관을 다 뚫어 버린 승려인 반면 자신은 아직도 미몽에 졸고 있는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는 탄식은 관직의 높고 낮음을 불문하고 속인이 품은 열등의식일 것이다. 대부분 조선 전기 유학자들은 불교 교리에도 밝았고 승려와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조선 중기에 이르러 이들의 교유에도 변화를 보인다. 승려들은 이름 있는 유학자들에게 자신의 시축에 발문을 받기 위해 먼 길도 마다하지 않았다. 때론 시축을 들고 현달한 선비를 찾았으니, 선비들은 불교를 배척하는 상소문을 올린 전력을 가진 자들이었다. 특히 문정왕후의 비호 아래 불교 재건을 도모한 불교계의 움직임은 유생들의 큰 반발을 일으켰다. 금계 황준량(1517~1563)도 불교를 바라보는 관점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관료 입장서 불교를 비판한 시각만은 분명했지만, 그와 교유한 승려들에게는 유연한 인간적인 모습을 보였으니 이는 조선 중기에 유불 교유의 흐름일 것이다.

백담 구봉령(1526~1586)같은 인물은 차를 즐기고 이해한 인물로, 한때 병을 치료하기 위해 평해 온천을 찾았을 때 만난 경진 스님과의 깊은 인연을 오래도록 이어간 유학자도 있었다. 결국 정치, 종교, 이념을 초월한 유불 교유는 조선 전기, 중기, 후기에도 관통되는 아름다움이다. 정치적으로 어려움에 처해지면 마음에 맞는 벗을 찾아가 차와 시를 나누고, 산사를 찾아 담소를 나누는 것은 인지상정이며, 서로 호연지기를 키우는데 도움이 된 것도 조선 시대 유불 교유의 단면이다.

이 글의 시작은 억불 시대에도 유불의 인간적 교유가 어떻게 이어졌을까하는 의문서 비롯되었다. 재작년 현대불교신문에 연재를 시작하며 원론적인 자료를 섭렵하는 과정서 초의와 추사의 오랜 교유의 흔적을 발견하고 가슴 뭉클한 감동을 느낀 것도 큰 보람이었다. 유불 교유사에 또렷한 자취를 남긴 이들의 문집에서 자료를 찾고 연재 글을 완성하는 동안, 따뜻한 인간애로 맺어진 우정은 실로 시공간을 초월했다는 점을 확인한 것도 큰 수확이다. 〈박동춘 (사)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