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뚱이 속에 있는 생명들을 조복받아야 하느니라

항상 함께하고 계심을 느낄 수 있어

질문 이번에 선원에서 거사님들 500여 분이 동참하여 공심의 불기둥으로 나와 세상을 밝히는 법형제 수련회를 한마음으로 원만히 회향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수련회 전부터 장마철이어서 며칠째 비가 내렸고, 수련회 기간 동안 많은 비가 예상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수련회 장소로 출발 전 고불식을 할 때, 촛불재도 있고 체육대회도 있으니 비가 오지 않게 당신만이 할 수 있다고 관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제 마음 안에는 확신이 없었던 게 사실입니다. 정말 저희들의 마음이 온전히 부처님께 전달이 될 수 있을까 하는 믿지 못하는 마음 말입니다. 그렇지만 저희들 마음속에 큰스님도 부처님도 항상 함께하고 계심을 느낄 수 있는 수련회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어떤 일이든 진짜로 믿고 진실하게 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답변 여러분이 강당에 들어갔으면 강당에 부처님이 계신 겁니다. 또 법당에 들어갔으면 법당에 계신 겁니다. 변소간에 들어가면 변소간에 계신 겁니다. 그래서 법당에 들어가면 모가 나지 않게, 그 법당의 부처님이 내 몸과 둘이 아니요, 부처님 법이 둘이 아니요, 부처님 생명이 둘이 아니게 둥글려서 일배를 올리더라도 정성스럽게, 일배를 올리든지 칠배를 올리든지 팔배를 올리든지 백팔배를 올리든지 그거는 자기가 여유 있는 대로죠. 누가 덜해라, 더해라 이런 게 없으니까요.

그래서 부처님 법이 우리들의 법이기에 반드시 생활 속에서 부처님이 계시다는 걸 알아야 하고 부처님의 활용이 그대로 우리의 활용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진실하게 실천해 나갈 수 있어야 여러분도 부처님이라고 말할 수 있죠.

그러나 여러분은 부처일 뿐만 아니라 자기 속껍데기를 벗기지 못했기 때문에 중생이라는 이름도 또한 가졌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둘로 보지 않으십니다. 우리 몸뚱이 속에 생명체들이 있고 그 생명체들이 있기 때문에 이 몸 하나가 그 생명체들의 집합체로서 둘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내 몸뚱이 속에 있는 생명들을 조복받아야 하느니라.” 한 것입니다. 이 몸뚱이 하나가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못났든 잘났든 그 몸뚱이가 이 세상에 나왔기 때문에 상대가 있고 또 불교가 있고 부처님이 계십니다. 내가 없다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대 성인들이 “네 나무는 네 뿌리를 믿어야 되느니라.” 했습니다.

그래서 나로부터 부처님이 계신 거니까 나부터 발견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죠. 나의 근본 말입니다. 저 나무들을 보세요. 뿌리 없이 사는 거 못 보셨죠? 자기에게 자기 뿌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 뿌리와 싹이 둘이 아니라고 생각을 할 테니까 말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여러분의 한 몸, 한 개체가 바로 개별적인 나가 아니라 포괄적인 나라고 생각할 겁니다. 즉 말하자면 공생, 공심, 공체, 공용, 공식으로 사는 생명체들이니까요. 그런데 여러분은 자기가 자기를 이끌어 가는 주처를 모르고 살아요. 주인공을 모르고 말입니다. 그 주인공이란 것도 이름입니다. 불성이라는 것도 이름이고요. 자부처라는 것도 이름입니다. 그렇지만 그 이름이 아니면 부를 수가 없고 상대가 모르니까 그것도 방편 중의 진짜 방편이죠.

그러니 우리가 생활 속에서 부처님의 자비하신 그 뜻을 아셔야 합니다. 삼천 년 전에만 부처님이 계신 게 아니라 풀 한 포기만 있어도, 물 한 방울만 있어도 부처님은 거기 계신 겁니다. 부처님 법이 쇠퇴해지는 게 아니라 우리네 마음들이 쇠퇴해지는 거지 부처님 법이 쇠퇴해지는 게 아닙니다. 이 세상이 다 없어진대도 부처님 법은 그대로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생명이니까. 그 생명의 근본이 바로 불성이고 불바퀴니까요. 그러니까 부처님은 삼천 년 전에 계신 오늘이나 또 삼천 년 후 오늘이나 항상 계신 겁니다. 그래 여러분이 이렇게 계시니까 부처님도 계신 거지, 여러분이 안 계시다면 부처님 법이 어디 있으며 부처님을 믿는 것도 생활도 뭐, 모두가 없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 여러분부터 아시면 그 부처님의 뜻을 잘 아실 겁니다.

그래서 그렇게 된 분들은 가시는 것도 오시는 것도 없습니다. 오신 것이 없기 때문에 가신 것도 없고, 그냥 과거가 현재고 미래가 현재니까 영원한 오늘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영원한 오늘에 그대로 지금 계십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마음 자체 깊은 속을 안다면, 부처님의 그 마음 깊은 속도 같이 둘 아니게 알아서 부처님이 계신 걸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여러분이 내 마음속에 있는 그 중생들을 다스릴 수 있는

진짜 공부를 해 나가실 수 있다면

미래의 정신세계도 다스릴 수 있게 됩니다.

 

기적이란 게 있는 겁니까?

질문 어리석은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기독교에서도 기도를 하고 또 불교에서도 관세음기도를 많이 하고 있는데, 기도라는 그 자체가 그걸 많이 해 가지고 자기 욕망을 채우고자 하는 것 아닌지요. 그럼 욕망이란 건 기적을 찾는 건데 그 기적이란 게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답변 기적은 없습니다. 기적이 없다는 이유를 잘 들으십시오. 여러분이 한생각을 잘하면 그대로…. 이거 보십시오. 어느 사람이 감방에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화가여서 그림도 아주 잘 그리고 아주 똑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애들을 넷이나 두고 두 다리를 자르게 됐습니다. 뼛속으로 썩어 들어가서 다음 날 아침 새벽에 잘라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엄마는 애기를 업고 그냥 울면서 울면서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네가 있다면 네가 그 두 다리를 자르지 않게 할 것이고 네가 없다면 두 다리를 자르게 할 것이다. 너는 즉시 아침에 가서 다시 한 번 진찰을 해 달라고 그래라. 그런다면 알 바가 있을 게다. 네가 있으니깐 그것도 있는 것이지 기적은 없다. 바로 네가 하는 것이지 기적이라는 언어가 붙지 않는 자리다, 이게.” 그랬더니 가서 정말 진찰을 해 달라고 울고불고 그래서 다시 해 보니까 발목 아래로 내려가 있더라는 거예요, 썩어 들어가는 것이. 그게 모두 기적이라고 하겠죠. 그러나 그 사람의 마음, 진실한 마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언어가 붙지 않는 자리라는 얘기지 그런 일이 없다는 게 아닙니다. 그런 일이 한두 건이 아닙니다.

그러니깐 30%는 의사의 손을 빌려야 하지만 70%는 여러분이 바로 충당해야 된다는 얘기죠. 그러니까 기적이라는 것을 말하자면 한두 건이 아니지만 여러분이 그렇게 하시는 거지, 할 수 있는 재료가 있다는 거지 아니, 기적은 무슨 기적입니까? 여러분이 그렇게…, 사람이, 또 만물의 영장이 또 자신, 신이 있고 여러분 자신이 바로 우주의 전체의 근본과 바로 직결이 돼 있는 여러분의 직결 장소가 있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그게 기적이라는 언어가 붙지 않는,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여러분이 소유하고 있다 이 소립니다. 그러니까 기적이라는 언어가 붙지 않는다 이 소립니다. 잘 이해를 하셔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군데다 놓고 빌지 말라 이 소립니다. 나를 잘되게 해 달라, 뭐 산신한테다 놔야 되고 부처님한테다 놔야 되고 칠성한테다 놔야 되고 신중당에다 놔야 되고,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아이고, 거기 한 군데를 안 놔서 우리 아들이 잘못되면 어쩌나?’ 이렇게 간약한 여러분의 약한 마음에 의해서 그 우환과 가환은 끊일 날이 없이 거기에 아마 대두될 겁니다.

여러분에게도 부처님이 계십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계신 그 자체 불(佛). 그러나 여러분이 인연으로 말미암아 인과가 되고 업보가 되고 그렇게 해서 그 수많은 중생들이 한데 모여 있기 때문에 “중생과 부처는 둘이 아니니라.” 이런 겁니다. 몸속에 들어 있는 중생들과 지금 해 나가는 그 마음이 바로 둘이 아니거든요. 그러니깐 여기에서 그 많은 마음이 일어나는 거를, 의식이 일어나는 거를 거기에 맡기고 지켜보세요. 모든 걸 거기 맡겨 놓고 지켜보세요.

그러면 거기서 실험을 할 수 있고 체험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하나 터득을 하고 가고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기적이라는 이름은 없지만 실질적으로 내가 그렇게 여여하게, 정말이지 광대무변하게 해 가지고 갈 수 있는 그 능력이 부여됩니다.

여러분이 만물의 영장이며 ‘자신(自神)’이며 우주와 직결돼 있는 바로 처소며 가설이 돼 있는 근본인데 어찌 그것이 기적이라고 하겠느냐 이겁니다, 모두 여러분이 갖추어 가지고 있는 것을. 그러니까 타의에서 구하지 마시라고 늘 간곡하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꽃은 가꾸고 잡초는 뽑아야 하는지

질문 며칠 전에 집에서 화단을 전지하다 보니까 잡초가 무성해진 것을 보고 죄다 뽑아 버린 적이 있습니다. 그때 불현듯 ‘화초나 잡초가 다 같은 불성인데 어느 것은 기르고 어느 것은 뽑아 죽이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대로라면 분명히 둘이 아닌 것임에도 불구하고 꽃은 가꾸고 잡초는 뽑아 버려야 하는지요.

답변 그거는 여러분이 모르셔서 그렇지 기르는 것도 없고 뽑아 버리는 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를 들면 차를 타고 내렸을 뿐이지, 즉 말하자면 타는 거는 화초를 기르는 것이요, 내리는 것은 잡초를 뽑아 버리는 게 됩니다. 내리는 것도 법 타는 것도 법이듯이 기르는 것도 법 뽑아 버리는 것도 법입니다. 그런데 그 뽑아 버린 것이 그냥 뽑아 버려지는 게 아니라 다시 차에 올라타듯이 다시 꽃이 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무심으로 그냥 그 잡초를 뽑아 버렸을 땐 벌써 내 마음과 더불어 아름다움이 거기에 하나가 되기 때문에 아름다운 꽃으로 화해서 그 잡초는 다시금 필 겁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모든 물이 수증기나 빗물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해서 잡초든지 꽃이든지 나무든지 다 먹여 살리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순간 보일 때 잡초지 또 한 번 돌아서 아름다움을 꽃피우고 또 나올 때는 꽃으로 나온단 말입니다.

그래서 잡초도 잡초대로 그냥 있지 않고, 우리 인간도 인간대로 그냥 있지 않고, 모습도 모습대로 그냥 있지 않고 모두가 화해서 변경이 되고 또 한 찰나 돌아가면서 바꿔지고, 이렇게 세상 만물이 다 그러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낮이 있고 밤이 있듯이, 안 보였다가 다시 돌아올 때, 예를 들어서 용광로에다가 모든 거를 집어넣어서 다시 생산이 돼서 나오면 그거 가지고서 또 생산처에 나와서 또 다른 걸로 변경이 돼서 다 나가고 또 그것이 헐어지면 용광로로 또 들어가서 다시 생산이 됨으로써 다른 물건으로 다른 모습을 가지고서 나오지 않습니까? 그거와 똑같습니다. 그러니 그거는 잡초를 뽑아 버린 게 아닙니다.

 

유위법, 무위법 둘 아니게 쓰려면

질문 저는 이 마음공부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초심자입니다. 법회 때 큰스님 법문 비디오를 보다 “유위법과 무위법을 둘 아니게 쓸 줄 알아야 한다.”라는 말씀을 듣게 되었는데 그게 무슨 말씀인지 알 수가 없어서 질문 올립니다. 유위법과 무위법이 어떤 뜻인지요. 그리고 그것을 둘 아니게 쓰려면 어떻게 공부해 나가야 하는지를 알아듣기 쉽게 가르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변 나는 언제나 모든 것을 둘로 보지 말라, 따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일러 오고 있습니다. 그것은 과학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깊이 알고 보면 마음의 과학이야말로 깊고 아름답고 선(善)한 참과학임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법은 무위(無爲)의 과학이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인 과학은 유위법(有爲法)을 다루어 이치를 밝힙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로 편리한 것을 제공합니다. 그런데 마음법은 보이지 않는 원리, 우리의 머리로는 생각할 수 없는 이치까지도 밝혀 줍니다. 그리고 마침내 사람들을 완전한 상태로 진화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부처님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유위행과 무위행이 두루 갖추어져서 우리의 삶은 어떤 일에든 자유롭고 드넓은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모르고서 그냥 일반적인 과학이 전부인 줄로만 알고 산다면 우리는 끝끝내 우리 자신을 발현할 수 없게 됩니다. 즉 우리 자신이 진정한 우리 자신이 되는, 우리들의 목표인 열반에 이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과학 시대에, 작게는 우리 자신을 자유인으로 이끌면서 가정을, 사회를, 나라를 위해 크나큰 이익을 줄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요. 그것이 곧 자기 자신, 즉 주인공을 찾는 공부입니다. 자기 자신이 진정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는 그 자리로부터 모든 문제는 풀리기 시작합니다. 거기에서만이 나의 문제도, 가정의 문제도, 사회의 문제도, 국가, 인류의 문제도 다 풀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늘 모두에게 마음 안에서 찾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밖에서 찾는다면 그 길은 갈수록 좁아집니다. 밖에서만 찾는다면 분별하고, 다투고, 불행해지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그렇기에 자기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안으로 깊이 들면 들수록 우리들의 마음은 진실해지고, 무거워지고, 자비가 흐르게 됩니다. 그러면 저절로 본인은 물론이거니와 주위 모든 사람들도 행복해지기 마련인 것입니다. 그 힘이 얼마나 광대하고 묘한지, 느껴 보지 못한 분들은 잘 알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즉 자기가 죽은 자리에서 나오는 힘인 것입니다. 자기가 죽었기 때문에 텅 비었고, 텅 비었으나 거기에서 미묘한 작용이 일어납니다. 그렇다고 육신의 죽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텅 빈 자리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나 너를 초월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헤아릴 수도, 표현할 수도 없는 크나큰 힘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관(觀)하라는 겁니다. 한군데서 들고 나는 것이니, 모든 것을 믿고 맡겨 놓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걸 모르고 바깥으로만 끄달리고 방황하기 때문에 이렇게도 비유하지요. “용광로에 다 낡아서 못쓰게 된 헌쇠를 넣는다면 다시 새로운 갖가지 도구로 재생되어 나오는 것처럼, 우리들도 또한 그와 같이 무한한 능력의 소유자이니 자기 자신을 믿어야 한다.” 하고 말입니다.

우리들은 순간순간 변화하고 있는 지금 세상에 앞장설 수 있는 인등이며 마음의 향기로운 향이며, 밥 한 그릇을 놓고도 모두를 먹이고도 한 그릇이 되남을 수 있는 그런 중용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무위세계 유위세계가 같이 계합해서 부처님 마음과 중생의 마음이 따로 없이 중용을 할 수 있는 것이 자기의 영원한 그 뿌리, 주인공이니 그렇게만 믿고 실천행으로 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선원에서 신행회를 자유 조직으로서 조직한 지가 여러 해가 됐습니다. 그러니 처음에 이 공부를 반석 위에 올려놓으시려면, 신행회에 가입하셔서 함께 공부하는 도반들과 같이 서로 토론을 해 가면서 회장님이나 법사스님한테 물어 가면서 공부를 열심히 해 나가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러면 여러 가지로 빠를 겁니다. 그리고 또 공부해 나가다가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회원들끼리 서로 도와 가면서 화목하게 보충해 나갈 수 있는 신행의 구심점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미래 세계의 주인이 되려면

질문 앞으로 저희들 앞에 펼쳐질 미래의 세계를 제 4차 산업혁명이라고 부른답니다. 지능정보기술이 기존 산업과 서비스에 융합되거나 여러 분야의 신기술과 결합되어 실세계 모든 제품, 서비스를 네트워크로 연결하고 사물을 지능화하게 된다는데, 이 마음공부를 하는 저희들이 어떻게 마음을 먹고 공부해 나가야 저희와 우리의 자녀들이 미래 사회에서 도태되지 않고 미래 세계의 주인으로 살아갈 수 있을는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답변 수많은 중생들이 더불어 사는 내 몸이 혹성이듯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도 바로 우리의 집이자 혹성입니다. 이 만법의 기틀과 기본을 모른다면, 우리는 마음을 낼 수가 없어서, 항상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생각도 해 보지 못해서, 집도 망가지고 또 저 혹성의 집도 망가질 수 있는 그런 계기가 있을 수도 있죠. 우리 몸이 망가지듯 말입니다. 내 몸뚱이 속의 중생들이 한마음으로 뭉쳐 주지 않는다면 내 몸인들 견뎌나겠습니까? 사는 날까지는 건강하게 살다가 옷을 벗고 싶을 때 벗어야죠. 그러나 옷은 벗지만 그 마음의 근본은 영원하죠.

우리가 미래에서 본다면 현재가 과거인 것입니다. 또는 우리가 과거라고 하는 것은 바로 미래이자 과거입니다. 그래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둘이 아니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현실 자체가 공(空)해서 고정됨이 없이 돌아가기 때문에 여러분은 바로 나라고 할 수 없는 그런 위치에서 공부들을 하셔야 되겠죠. 이것을 기본적으로 아셔야 합니다. 그리고 시급한 문제입니다.

어디를 막론해 놓고 지금은 인공위성으로 인해서 전파가 두루 하고 세계를 누비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은 그보다 더 빨리, 빛보다 더 빨리 전파를 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살고 있는 대로 이것이 우주 법계에 두루 입력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 몸뚱이가 이렇게 있지만 또 정신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가 그 정신세계에 중점을 두지 않는다면 도저히 정신세계의 나를 맛보지 못합니다. 나와 같이 있으면서도 같이 있지 않고, 같이 있지 않으면서도 같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도리가 심오하고 그 뜻이 너무나 엄청나다고 말하는데 여러분은 엄청나다는 걸 실감을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음을 저버리고 항상 이론으로만 “마음, 그거.” 하는데 그렇게 이해만 해서 마음을 증득하는 건 아닙니다. 이해만 해 가지고 “내가 알았다. 나는 그만하면 됐어. 네가 알면 얼마나 알아?” 이런 그 자기의 아만과 아집을 버리지 못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물속에 뛰어들어서 물 깊이를 알며 어떻게 땅속에 들어가서 햇빛이 들어오는 걸 알겠습니까? 그리고 허공에 불바퀴가 돌아가는 데에 어찌 걸리지 않고 앞뒤 없는 불바퀴를 넘나들겠습니까?

우리는 마음을 밝혀서 정신세계로 치달아야 하는 지금 이 시대가 너무 바쁜 시대라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그 도리를 알아서 우리가 사는 것이 그대로 실상임을 깨닫는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미래의 세계도 여기에서 생각하고, 보고 듣고 생각하는 그 도리가 전부 법계에 정보가 돼서 정신세계의 미래도 개척을 해 나가면서 현실에서도 개척을 주장할 수 있는 그런 도리가 됩니다. 우리의 이 몸뚱이만 내가 아닙니다. 이 몸뚱이 속에는 또 얼마나 많은 중생이 살고 있습니까. 그 중생 속에서 부처가 있음으로써 그 부처는, 원자라고 한다면 바로 그 원자 속에 또 입자가 헤아릴 수도 없이 많습니다.

여러분이 내 마음속에 있는 그 중생들을 다스릴 수 있는 진짜 공부를 해 나가실 수 있다면 미래의 정신세계도 다스릴 수 있게 됩니다. 높고 낮은 게 없이 모두가 벗이고 모두가 한마음 아닌 게 없기 때문에 다스릴 수 있다 이 소리입니다. 내가 우뚝하게 잘나서가 아니라 모든 마음과 마음이 말입니다. 이어지는 마음 말입니다.

우리나라를 한번 둘러보십시다. 우리가 지금 남의 나라처럼 기술이 요요합니까, 남의 나라처럼 마음이 그렇게 깨어서 삽니까? 정신세계로 진출해서 갑니까? 물질을 좇는 데만 여념이 없고 자기 분수를 모르고 자기 분수에 맞춰서 살 줄 모르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 정신세계는 언제 돌아다보겠습니까. 미래의 세계에서 본다면 우리 지금 현실세계가 과거가 되고, 과거의 세계에서 본다면 정신세계가 미래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미래의 세계와 정신세계가 둘이 아니요 또는 과거와 현실이 둘이 아닌 까닭에 우리가 마음으로써 항상 그렇게 다스려 가면서 모든 거를 놓는다면, 크면 큰 대로 다스리고 작으면 작은 대로 다스려서 놓는다면 화목이 오지 않을 수 없고 조화를 이루어서 끝 간 데 없이 세계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여건이 주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정신과학으로 이탈 없이 가려면 여러분의 자녀들이 배우는 교과서에도 정신세계, 무심 도리의 도를 알 수 있게 해야 하죠. 무심 도리를 배워야만 물질세계에 바로 내놓을 수 있는 영력(靈力)이 생겨서 과학적인 문제를 첨단으로, 정신세계로 올려놓을 수 있는 우리나라의 주인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가르쳐 드릴 때 여러분이 진짜로 믿어야 합니다. 주인이 나한테 있다는 것을, 생산처가 나한테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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