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형진 고려대 디스플레이반도체물리학과 교수

예술의전당 동양학아카데미 ‘현대과학과 연기론’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반야심경〉의 일부분인 이 구절은 감각기관 육근(六根)과 그로 인해 받아들이는 육식(六識)이 본래 무상한 것임을 설한다. 모든 것은 각자의 감각기관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기에 실체가 없다는 뜻이다. 이를 좀 더 쉽게 설명할 순 없을까? 양형진 고려대 디스플레이반도체물리학과 교수는 7월 7일 서울 예술의전당 동양학아카데미서 ‘현대과학과 연기론의 세계’라는 주제로 강의했다. 양 교수는 “바닷물이 짜게 느껴지는 이유는 염화나트륨 때문이 아니라 이를 받아들이는 인간의 감각기관 때문”이라며 “고등어에게는 바닷물이 짜지 않다. 즉 모든 존재는 물질의 본성이 아닌 감각기관으로 세계를 인식한다”고 설명했다. 정리=이지선 수습기자
양형진 교수는… 서울대 물리학과 학사·석사, 인디애나대학교 대학원 물리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저서로는 〈산하대지가 참빛이다(과학으로 보는 불교의 중심사상)〉 〈과학으로 세상 보기〉 등이 있다. 사진=박진형 수습기자

모든 존재의 세계 인식은
각자 감각기관 따라 달라
연기 의해 세계 나타날 뿐
“더 나은 존재로 나아가자”

일체의 모든 것이 ‘무상(無常)’이라는 철저한 자각에서 불교는 출발합니다. 무상에 대한 이해를 돕는 것이 ‘연기(론)’입니다. 또한 여기서 과학과 불교가 만나는 지점이 생깁니다. 자연과학이라는 것은 세계를 보는 눈입니다. 우리가 그냥 보면 세계를 잘못 보게 됩니다. 불교에서는 ‘속는다’고 하죠. 세계를 제대로 보게 하는 도구가 바로 ‘과학’입니다. 불교가 아무리 무상하다는 것에서 출발했다하더라도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 우리의 일반적인 심리입니다. 그러나 자연과학을 통해 세계를 잘 보면 일체 현상이 무상이고 무아인 게 드러납니다.

자연과학에서 물을 관찰할 때 물은 산소원자 1개와 수소원자 2개가 모여 이룹니다. 산소원자, 수소원자 각각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물의 성질은 없습니다. 수소와 산소가 인연을 맺으면서 창조적으로 발현된 것입니다. 서로 연관됐을 때 새롭게 생겨나는 속성입니다. 우리 세계는 자연 속에선 92개의 원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92개의 다양성이 존재해야 할 것 같지만 서로 어떻게 결합하느냐에 따라서 분자가 만들어지고, 분자의 결합에 따라 생명물질이 만들어지고 생명물질의 결합에 따라 수많은 생명체가 만들어집니다. 그 생명체 중 인간들이 연기하고 의지하면서 인간사회를 만들고 역사와 문명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 연관과 의존의 관계가 있기에 이 세계에는 92개 원자뿐이지만 이렇게 다양한 모습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 하나하나의 존재자들에게 자성(自性), 변하지 않는 성질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원자 하나부터 인류에 이르기까지 무(無)자성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 모든 것은 실체가 없는 공(空)입니다.

걷는다는 것. 어떻게 걷는 게 가능할까요? 다리가 있고 근육과 뼈가 있는 것만으로도 설명이 된다면 왜 얼음위에선 제대로 걷지 못할까요? 걸음은 물리적으로 내가 땅을 뒤로 미는 ‘작용’입니다. 그럼 땅은 반대로 나를 앞으로 밀어주는 ‘반작용’을 합니다. 그러니까 걷는다는 건 나의 작용만으로는 되는 게 아닙니다. 내가 땅을 미는 작용을 할 때 동시에 땅은 나를 미는 반작용을 하기에 우리가 걸을 수 있는 거죠. 얼음위에선 나도 얼음을 못 밀고, 얼음도 나를 안 밀어주기 때문에 걸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게 다 작용과 반작용, 이렇습니다. 내가 걸어간다는 이 간단한 사건에 전 지구가 참여하는 것이죠. 걷는 것뿐 아니라 세상 모든 사건에 우주의 모든 게 참여한다는 게 ‘연기법’입니다.

연기는 크게 3가지 의미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첫째는 ‘피연생과(彼緣生果)’입니다. 하나의 인이 과로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무수한 연이 개입돼야 한다. 연으로 인해 과가 나타나는 것이 인과에 대한 불교의 첫 번째 입장입니다. 두 번째는 상호연관과 상호의존성입니다. 걷기 위해서 뼈, 근육만이 필요한 게 아니라 땅과 내가 서로를 받쳐줘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무언가를 보더라도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세 번째 의미, ‘나에게 나타나는 세계’에 대해 말해보겠습니다.

인간이 느끼는 세계 
불교는 자연과학이 아닙니다. 불교는 ‘내가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가 제일 중요합니다. 그러면 세상이 나에게 어떻게, 왜 그렇게 보이는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겠죠.

우선 기차를 타고 가는 사람이 우유를 마시고 있는데 우유의 속도는 얼마인가를 계산해봅시다. 그런데 우유를 마시는 사람한테는 우유가 정지해 있지만 밖에 있는 사람이 볼 때 우유는 기차와 함께 시속 100km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유의 속도를 물었을 때 두 사람이 다른 대답을 하는 것이죠. 어떤 대상은 그 대상을 누가 보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반야심경〉에서는 깨끗한 것도 없고 더러운 것도 없다고 합니다. 우리한테는 잘 지은 쌀밥, 예쁘게 핀 꽃은 깨끗하고 분뇨는 더러운 것이라고 느껴집니다. 그런데 말똥구리와 파리가 볼 때는 분뇨가 얼마나 깨끗하고 아름다운 것이겠습니까? 분뇨의 본성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내가 더럽다고 인식할 수밖에 없게끔 내 신체가 그렇게 만들어진 것입니다.

특수한 상황을 비유했다고 비난하실 수 있는데 현실과 맞는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지구가 1년 주기로 태양을 한 바퀴 돌 때 속도는 초속 30㎞입니다. 이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15초면 충분히 가는 거리입니다. 어느 누구도 그렇게 빠른 탈것을 타본 적 없을 텐데 사실 우리는 매일 타고 있는 거죠. 그런데 (펜을 들어 보이며) 이 펜의 속도는 뭐죠? 정지죠. 지구 밖에서 보면 이 펜의 속도는 초속 30km일 텐데 우리가 이 펜의 속도가 정지라고 느끼는 이유는 우리가 아주 오래전부터 지구라는 탈것을 타고 같이 움직였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물체를 보는 사람에 의해 다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고등어에게 바닷물이 짤까요? 분명히 짜지 않을 겁니다. 인간에게 바닷물이 짠 이유는 우리의 인식 때문입니다. ‘바닷물 안에 염화나트륨이 있기 때문에’라는 대답은 완결된 답이 아닙니다. 내가 고등어와 다르게 염화나트륨을 짜다고 느끼는 감각기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닷물의 본성이 짜서 우리가 짜다고 느끼는 게 아닙니다.

시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가시광선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무지개를 7가지색이라 얘기합니다. 그런데 만약 가시광선이 아니라 적외선, 자외선까지 볼 수 있다면 무지개는 9가지 색입니다. 빨간색과 초록색만 볼 수 있다면 무지개는 2가지 색입니다. 그러니까 대상의 본성이 우리에게 전달되는 게 아니라 대상의 본성과 나 사이에 어떤 연관관계가 설정되느냐에 따라서 그 대상이 나에게 단지 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뿐입니다. 일종의 상호연관, 상호의존입니다.

모든 것은 텅 비었다
원자는 원자핵과 전자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수소원자는 프로톤 양성자(원자핵) 하나와 전자 하나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양성자 반지름이 1㎝라면 전자는 500m입니다. 1:50000 비율 차이인 것이죠. 그런데 전자의 질량은 원자 전체의 0.06%에 불과합니다. 이 말은 원자핵이 방울토마토 크기라고 가정하면, 99.94%가 방울토마토에 모여 있고 나머지 0.06%인 전자의 길이는 1㎞인 거죠. 이 말은 원자는 텅 빈 공간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질량은 양성자에 몰려있습니다. 모든 물질은 텅 비어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왜 내 손이 책상을 통과하지 못할까요? 그것은 속이 꽉 차 있어서가 아니라 원자끼리 결합함과 동시에 원자를 감싸고 있는 전자끼리 충돌이 일어나서 반발력이 생겨 통과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느끼기엔 물체가 나를 가로막는 것 같고 벽이 만져집니다. 벽이 우리를 통과하지 못하게 하는 자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 몸이 물질을 통과하지 못하는 자성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물체는 텅 빈 공간에 불과한데 전자기적 반발력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것입니다.

비 내리는 하늘은 회색이고 밤하늘은 까맣습니다. 근데 우리는 항상 ‘하늘이 푸르다’고 표현합니다. 우리 눈이 대상을 변치 않게 푸르게 보는 자성을 가지고 있는가? 아닙니다. 그럼 하늘 자체가 푸르다는 자성을 지니고 있는가? 그것도 아닙니다. 물리학적으로는 빛의 산란입니다. 푸른색 계열의 빛이 산란돼서 파랗게 보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와 하늘 사이의 무한한 인연이 축적된 결과입니다. 인연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태양계에서 유일하게 지구만 산소가 있는 공기조성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목성, 화성에도 공기가 존재하지만 산소는 없습니다. 지구의 공기조성비가 여타 행성과 다른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지구 생명체가 산소를 만들어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지구 생명체가 35억 년 전부터 긴 세월동안 만들어낸 것이 지구대기입니다. 그 지구대기에 빛이 반사돼 산란되어 오는 걸 보고 우린 하늘이 파랗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구의 전 역사가 하늘에 개입된 것이죠. 그 개입 없이는 지구의 하늘이 푸르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숨 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35억년의 생명진화의 역사가 개입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지구는 목성, 토성과 같은 공기조성비를 가졌을 것이고 하늘도 파랗지 않았겠죠. 하늘이 파랗게 보이는 것은 하늘이 파랗다는 자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무한한 인연이 집적되어 있는 결과입니다.

우리가 아는 세계는 우리가 보는 세계, 즉 우리에게 나타나는 세계입니다. 이것은 연기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죠. 그래서 일수사견(一水四見)이라고 합니다. 하나의 물을 보는데 인간은 마시는 것으로, 천인들은 아름다운 보석으로, 물고기는 집으로, 아귀는 고름으로 봅니다. 하나의 물을 보고 4가지의 다른 세상이 나타난다는 것이죠. 4가지뿐이 아니겠죠. 이 말은 주관이든 객관이든 무자성, 무아무실체임에도 불과하고 무한한 인연이 성립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연기에 의해서 세계는 나타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실체가 없다 하니 쓸쓸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좋은 점이 있습니다. 나는 지금 이 순간 새롭게 다른 존재로 태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는 깨달을 수 있는 존재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런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내 속에 깨달을 수 있는 기본 씨앗이 있어야겠죠. 무상이 쓸쓸한 것만은 아닙니다. 내가 더 나은 존재로 나아가기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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