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암 스님

카메라를 든 스님의 모습이 마치 주장자를 든 선사의 모습과 닮아 보인다. 선암 스님은 찰나의 마음을 사진에 담기 위해 수십년간 정진해 왔다.

 

찰나라는 시간은 극히 짧은 시간이지만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시간이다. 그 짧은 시간에 많은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더욱이 출가자에게 찰나의 시간이란 더 말 할 것이 없이 절박하고 아까운 시간이다. 그 찰나의 시간 속에서 오랜 세월 치열하게 자신을 들여다본다면 그것은 분명 하나의 ‘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찰나의 시간을 쌓아온 이가 있다. 50여 년 동안 영산재와 승가의 모습, 연꽃 등 불가적 사진을 찍으며 수행과 전법의 길을 걸어온 선암 스님(〈사〉한국불교영산재보존회 회장)이다.

 

선암 스님 作 ‘출가’

길이 된 사진

2009년 9월 30일. 아랍에미레이트 아부다비에서 열린 제4차 유네스코 정부간위원회에서 우리의 영산재(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50호)가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우리의 대표적인 불교의식이자 전통문화인 영산재가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까지 많은 과정과 노력이 있었지만 그 속에는 영산재를 촘촘히 볼 수 있게 해 준 사진기록물이 있었다. 선암 스님의 사진이었다. 춤추는 바라에서 천수경이 들려오고, 나비춤엔 삼보천룡을 모시는 진언이 들려온다. 그리고 법문과 대중의 정성에 영가는 극락에서 다시 태어난다. 사진 한 장 한 장이 생생하게 영산재를 재현하고 있다.

스님은 1972년부터 영산재를 꾸준히 카메라에 담아왔다. 영산재를 다룬 사진집과 책이 5권에 이른다. 그 사진들이 꾸준히 영산재를 홍보해 왔고 유네스코의 위원들 역시 그 사진을 통해 영산재를 볼 수 있었다. 때문에 스님의 영산재 사진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다. 묵묵히, 치열하게 걸어온 ‘길’이다. 단순히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는 일이 아니라 찰나의 시간 속으로 뛰어드는 정진의 하나였다. 그렇게 만들어진 사진은 길이 되었고, 유네스코의 위원들은 그 길을 본 것이다. 사진이 아닌 ‘영산재’를 본 것이다.

“오랜 세월 영산재를 찍었어요. 세월이 된 사진들이 의미 있는 일에 보탬이 될 수 있어서 보람을 느낍니다.”

스님은 영산재를 널리 알리고자 영산재를 일본 국립극장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일본 국립극장에 한국 공연이 오른 것은 영산재가 최초다.

영산재 사진으로 전법

공군 시절 사진과 인연

전역 후 카메라 독학

40년 넘게 영산재 촬영

세계문화유산 등재 공헌

 

불가적 사진은 영상포교

영상포교 원력 세워 50년 수행

1992년 연꽃 사진 붐 일으켜

17회 개인전 17권의 사진집

〈월간 불교〉 교계 최초 사진기자

스님은 영산재 외에도 승가의 면면을 작가와 출가자의 경계를 허물며 카메라에 담아왔다. 노을 속을 걷는 도반, 걸망엔 노을이 물들고, 한 걸음 한 걸음 사바는 가까운 듯 멀다. 천진불 동자승이 스승의 손을 잡고 봄길을 걷는다. 동자의 낙엽 같은 손이 발우를 받고, 서로의 머리를 깎아주고, 이른 아침 대중은 산길을 따라 삼보일배를 하고, 또 다른 대중은 안개속에서 낙엽을 쓴다. 선방으로 날아든 햇살과 그 햇살에 빛나는 장군죽비, 그리고 치열하게 정진하는 수좌들. 천불천탑 앞에서 가부좌를 튼 이국의 납자들, 영산위에서 불보살을 그리고 있는 노장 등 2007년 출간한 스님의 일곱 번째 사진집 〈출가〉속엔 산문 구석구석의 대소사와 승가의 삶이 한 시절처럼 흘러간다. 그 중엔 대한민국 사진대전 우수상(1995)과 한국관광공사 사진공모전 대상(대통령상·2004)을 수상한 사진도 실려 있다.

선암 스님은 연꽃사진의 붐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1992년 서울 동방플라자에서 열렸던 〈연꽃 사진전〉은 당시 연꽃사진 열풍을 일으켰다. 많은 대중과 사진가들을 연밭으로 가게 했다.

뭉게구름 사이로 솟아오른 꽃송이, 푸른 연잎 사이로 피어난 꽃송이, 아침 이슬에 젖어 빛나는 꽃송이, 등불처럼 빛나는 순백과 분홍빛의 화장세계는 선암표 연꽃세계다. 전국곳곳의 연꽃사진을 담아오던 선암 스님은 봉원사 총무 시절 도량에 손수 연꽃을 심기 시작했다. 봉원사 연꽃밭은 도심 속 휴식공간으로 꾸며져 2003년 열린 제1회 서울연꽃축제를 바탕이 됐다. 연꽃축제는 계속 이어져 올해 8월 5일 제16회를 앞두고 있다.

 

2004년 한국관광공사 대통령상을 수상한 ‘출가’.

찰나에서 시작된 길…출가 그리고 사진

선암 스님의 작품 중에는 동자승이 많이 등장한다. 스님 역시 어린 시절에 머리를 깎았다. 사진 속의 동자승들은 아마도 또 다른 선암일 것이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스님의 부친이 한국전쟁 당시 국군으로 참전해 전사하면서 스님의 집안은 어려워졌다. 힘겨워진 모친은 당시 일곱 살이었던 스님과 함께 신촌 봉원사로 들어왔다. 스님의 절 생활은 그렇게 시작됐고, 그 동자는 지금 그 절의 주지로 살고 있다. 스님은 1964년 서울 봉원사에서 운파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수지하고 1973년 묵담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스님이 카메라를 처음 접한 것은 고등학교 시절이다. 친구가 집에서 가져온 친구 부친의 카메라였다. 그때 스님은 ‘사진’이란 씨앗을 잉태했다. 언젠가 카메라를 메고 만행을 나서는 꿈을 꾼다. 그야말로 ‘꿈’이었다. 그리고 꿈은 조금씩 다가오기 시작한다. 스님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군에 입대한다. 헌병대 행정병으로 근무하던 스님은 우연히 옆 사무실이었던 정훈감실에서 카메라를 처음 만지게 된다. 스님은 정훈감실 요청으로 신문기자들에게 제공할 사진을 한 두 장 씩 찍기 시작했고 그것이 스님을 사진의 길을 걷게 했다.

스님은 전역 후 바로 카메라를 구입한다. 당시 시대적 상황이나 스님의 형편으로 볼 때, 카메라 구입은 주변으로부터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스님은 자신의 길을 시작했다. 주변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며 점점 사진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1972년 〈월간 불교〉 사진기자로 일하게 된다. 교계 최초의 사진기자다. 당시 스님의 사진 실력은 입문단계였지만 스님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잡지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체계적으로 사진을 공부하지 못했던 스님으로선 사진기자의 길이 쉽지만은 않았다. 그 때부터 스님의 본격적인 독학이 시작된다. 서점을 뒤져서 책들을 사보기 시작했고 책에서 본 사진들을 흉내 내기 시작했다. 그 때 스님의 눈에 밟힌 사진들이 연꽃 사진들이었다. 일본 잡지에 실린 연꽃 사진들에 스님은 매료됐다. 스님의 연꽃 사진은 그렇게 시작됐다.

스님의 사진 공부는 나날이 달라졌다. 사진가라는 이름이 따라붙기 시작했다. 불교계 행사엔 여지없이 스님이 있었다. 그리고 1979년 중앙일보가 주최한 사진공모전에서 입선하면서 사단에 정식으로 이름을 올린다. 초파일 연등축제가 끝난 후 봉원사 대웅전 마당에 걸린 붉은 연등 아래로 노란색 옷을 입은 유치원생들이 걸어가고 있는 사진이다. 스님의 영상포교는 그렇게 시작된다. 그 후로도 스님은 1988년 일본 아사이신문이 주최한 제50회 국제사진공모전에서 입선하는 등 각종 공모전에서 많은 상을 수상한다.

선암 스님은…1964년 서울 봉원사에서 운파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수지하고 1973년 묵담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으며, 2001년 태고종 종덕 법계를 품수했다. 현재 신촌 봉원사 주지와 (사)한국불교영산재보존회 회장, 한국사진작가협회 자문위원을 맡고 있다. 〈영산재〉 등 사진집과 저서 17권을 출간했으며, 17번의 사진전을 열었다. 1995년 한국사진대전 우수상을 비롯해 2004년 관광사진공모전 대상인 대통령상 등 10여회 수상했다.

찰나의 마음, 사진 속에 담다

영상포교 50년, 수행 50년

“처음엔 단순히 사진이 좋아서 사진을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영상포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원력으로 삼는다면 큰 불사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스님이 사진가로서 이름이 알려지고 사진에 깊이를 더해가기 시작했을 때 스님은 출가자로서의 길과 사진가로서의 길 사이에서 고민했다. 단순히 카메라만 잡는다면 삭발염의의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승복을 입고 카메라를 잡는다면 남다른 명분과 의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영상포교, 곧 전법의 원력을 세우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해온 일이 결과적으로 불법홍포에 기여해왔지만 원력을 가지고 시작한다는 것에 한 차원 다른 의미가 있었다. 그것은 곧 회향의 불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도 그래왔지만 스님은 찰나의 시간 속에서 좀 더 치열하게 자신과 사바를 들여다보게 된다. 사진 한 장의 순간들은 그저 사진 한 장에 찍힌 한 순간이 아니라 출가자로서 걸어야 할 진일보의 순간이다.

 

승가의 길, 사진가의 길

승단 따가운 시선·편견에도

묵묵히 사진가의 길 걸어

한국전쟁 참전 16개국서 영산재

“쉼 없이 한국불교 찍고 싶어”

 

허투루 내딛을 수 없는 한 걸음 한 걸음인 것이다. 그렇게 쌓인 한 걸음 한 걸음은 결국 수행의 길이 된다.

“출가자가 수행은 하지 않고 정신을 엉뚱한 일에 팔고 있으니…”

스님은 한 동안 스승으로부터 승단으로부터 질책과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 했다. 일의 겉만 보면 그럴 만도 한 일이다. 하지만 스님은 카메라를 메고 산문의 안과 밖에서 치열하게 길을 찾았다.

“육신에 잿빛장삼을 걸치고 있다 보니 사진기에 들어오는 것이 대부분 절집입니다. 몸담고 있는 봉원사에서 늘 접하는 절간 구석구석과 대소사의 모습들, 그리고 대중들이 쉽게 볼 수 없는 장면들이 제 사진기에 들어왔습니다. 또 태고종단의 크고 작은 행사 역시 포교의 방편이라 여기며 기록으로 남기려 열심히 사진기를 들이댔습니다. 중이 수행은 않고 딴 짓만 한다는 소리를 뒤통수에 달고 다니며 사진에 몰두한 지도 벌써 50여 년입니다. 제법 많은 사진을 찍었습니다. 나름대로는 수행의 만행이라고 생각하여 시작했고 포교의 한 방편으로 여겨 왔습니다.”

길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50년의 세월은 그렇게 전법이 되고 수행이 되었다.

 

 

선암 스님은 영산재의 다양한 모습을 사진에 담아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공헌했다. 사진은 스님의 작품 ‘영산재’.

사진가 선암 말고 출가자 선암 그리고 인간 선암

2015년 10월, 태국에서 영산재가 열렸다. 한국전쟁 참전 당시 전사한 영령들을 위한 위령제다. 2014년 11월, 신촌 봉원사 주지로 취임한 선암 스님은 대방 단청 등 도량불사를 마친 후 그 동안 마음속에 품었던 또 하나의 원력을 실천에 옮긴다. 한국전쟁 참전 16개국을 찾아 고인이 된 참전용사들의 위령제를 여는 것이다. 그 시작이 태국이었다.

“제 부친도 한국전쟁 당시 전사하셨고, 그것이 제가 출가자의 길을 걷는 계기가 됐기 때문에 저에게 한국전쟁은 가장 큰 기억 중의 하나죠. 영산재를 오랜 세월 찍으면서 어느 순간부터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다른 나라의 전사자들을 생각하게 됐어요.”

스님이 50여 년 동안 걸어온 길이 단순히 사진을 찍는 일이었다면 있을 수 없는 원력이었을 것이다. 스님은 이듬해 캄보디아와 베트남, 그리고 뉴질랜드를 찾아 역시 영산재를 열고 영령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했다.

그에 앞서 스님은 국내에서도 위령제를 시작했다. 2015년 5월, 독도에서 호국영령, 전몰 군경을 추모하는 위령제를 열었다. 또한 고인이 된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영산대재를 함께 봉행했다. 광복 70년, 분단 70년을 맞아 한국불교 태고종 봉원사와 한국불교영산재보존회(회장·선암)가 개최했다. 스님은 이어 2016년에는 백령도에서 호국영령들을 위한 영산재와 올해 4월에는 제주도 제주 4.3평화공원 위령탑에서 4.3사건 희생자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위령제를 봉행했다. 이날 행사에서 선암 스님은 “4.3 제주항쟁은 7년간 한국전쟁 다음으로 양민학살이 많았던 사건으로 제주도민들의 상처로 남아있다. 이번 영산법회를 통해 영혼을 천도하는 의식을 행하는 것은 희생된 선량한 영혼들을 위로해 극락왕생으로 인도하고, 나아가 국가의 안녕과 평화와 상생의 대한민국을 염원하기 위해 시연하는 것이다.”고 했다.

스님은 올해 미국 참전용사를 위한 위령제를 계획 중이다. 스님이 영가들의 극락왕생을 위한 영산재를 여는 것은 출가자 선암의 마음이며 인간 선암의 마음일 것이다.

“사진을 보면 글을 한 줄 읽는 것보다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건강이 허락한다면 쉬지 않고 사진을 찍을 생각입니다. 우리 불교 포교의 많은 자료를 남기고 싶습니다.”

지난해 10월, 서울 인사동 인사아트 프라자 갤러리에선 선암 스님의 17번째 개인사진전(고희기념)이 열렸다. 영산재 사진들이 걸렸다. 소중한 한국불교의 기록이며 전헌(典憲)이다. 50년을 걸어 단단히 낸 선암의 길, 앞으로 그 길은 어디까지일까. 그의 어깨엔 여전히 카메라가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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