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택 서귀포불교대학장

무오법정사 항쟁 발굴… 제주 호국불교 각인

불교문화재 지정과 보존 앞장
1992년부터 23년간 향토사료 연구
선덕사 등 문화유산 지정에 역할
지정문화재 148건 보수정비 추진
2012년 대한민국문화유산상 수상

원각회 쌍계암 본조불 목조 비로자나불상은 제주의 상징인 녹나무로 조성된 우리나라 최초의 불상이다. 인간문화재 목아 박찬수 선생에 의해 조성됐고, 개금이 아닌 전통 방식의 제주산 황칠로 18회 도복하여 금색을 낸 것이 특징이다. 이 비로자나불상은 제주 지역의 환경과 특성을 잘 보여주고 예술성도 뛰어나 문화재로서 가치가 높다. 사진은 불상 옆에 서 있는 윤봉택 서귀포불교대학장. 재가불자지만 일상속에서 계를 철저히 지키며 살고 싶은 발원을 담아 수행자의 모습으로 살고 있다.

“김연일 영가, 강창규 영가, 방동화 영가, 김삼만 영가….”

1918년 무오년(戊午年), 3.1운동보다 5개월 앞서 불교계가 주도한 제주도 최초 항일운동인 무오법정사 항일운동 주역들의 이름이 울려 퍼졌다. 99년 만에 불교계 후손들인 제주도무형문화재 제15호 제주불교의식 예능보유자 구암 스님 등에 의해 천도재가 봉행된 것이다. 오랜 세월이 흘러 법공양을 받은 항일운동 주역 스님들의 감회는 남달랐을 터.

무오법정사 항일항쟁 위령재는 1995년부터 봉행됐지만 당시는 ‘보천교·태을교의 난’이라 폄하됐다. 게다가 불교계 주도 운동이었다는 성격이 명확하게 밝혀지기 이전이라 중문청년회의소 주관 아래 유교식 위령재로 봉행돼 왔다. 이 같은 여건 때문에 제주불교계는 지난 5월 ‘2017 전통산사 문화재 활용사업’ 일환으로 문화재청 후원을 받아 불교식으로 위령재를 올린 것이다.

무오법정사 항일운동은 지난 1992년 재판기록이 발굴되면서 세상에 알려졌고, 불교계 승려들의 주도로 지역주민 700여 명이 참여한 대규모 항쟁이었다는 사실이 학자들에 의해 서서히 밝혀졌다. 그 중심에는 무오법정사 항일운동을 세상에 알린 윤봉택(61) 서귀포불교대학장이 있다.

2014년 공직을 마무리한 윤 학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모든 미련을 버리고 산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법정사 항일항쟁 발상지 인근인 쌍계암에 자리를 잡았다.

승려 주도 항일운동 세상에 알려
윤 학장은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1970년 경남 합천 해인사에서 출가, 강원서 배운 전문지식이 빛을 발하며 많은 불교 유적들이 그의 손에 의해 문화재로 지정될 수 있었다. 윤 학장은 10여 년 뒤 환속해 고향인 서귀포시 강정동에서 유기농 농사를 짓다가 1992년 7월 서귀포시 향토사료 전임연구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오로지 문화재만 바라보고 살아온 세월만 23년 3개월이다. 그는 2015년 12월 퇴임전까지 제주도 불교문화재의 중장기 보호 및 활용 계획을 수립하며, 불교문화재 지정과 보존·전승 활용에 큰 업적을 남겼다.

국가지정문화재 37건, 등록문화재 14건, 도지정문화재 97건 등 지정문화재 148건의 보존 활용을 위한 보수정비 사업을 추진함은 물론, 관내 비지정문화유산의 효율적인 보존을 위해 서귀포시향토문화유산보호조례를 제정, 체계적인 향토유산 보호 대책을 수립하기도 했다.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2012년 대한민국문화유산상(대통령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기도 했다. 이는 문화유산분야 최고의 상이다. 이밖에도 유명문화재 유산인 법화사지, 존자암지 복원 발굴을 비롯해 약천, 남국선원 등 전통사찰 지정과 선덕사, 봉림사 등의 향토문화유산 지정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이런 윤 학장이 공직생활 동안 가장 남다른 애정을 쏟은 것이 바로 무오법정사 항일항쟁의 발굴이었다.

“법정사 항일항쟁이 햇볕을 보게 된 계기는 1991년 제주향토사학자 故김봉옥 선생이 정부기록보존소에서 법정사 무오의거 재판기록을 찾아 저에게 전해주신 일입니다. 제가 그 자료를 정리해 공표한 게 바로 제주의 호국불교 이미지를 전국에 각인시키는 계기가 됐죠. 그동안 법정사 항일항쟁은 ‘보천교의 난’ 등으로 폄하됐는데, 다양한 학술토론회 등 갖은 노력 끝에 스님들이 주도한 대규모 항쟁이었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이 가장 큰 보람입니다.”

이후 법정사는 1996년부터 성역화사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위패 봉안소와 위령탑·전시실 등을 골자로 한 사업이 확정되고, 2002년 8월 진입로 공사를 마무리한 데 이어 2003년 11월 ‘제주도문화재 기념물 제61-1호’로 지정됐다.

윤 학장의 공직생활 가운데 가장 큰 쾌거는 10여 년 동안 각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리무중이었던 법정사 항일항쟁의 주역 강창규 스님 후손을 찾아내 서훈을 상신하게 된 일이다.

“강창규 스님 후손을 찾기 위해 그동안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로 알려진 스님의 자취를 쫓아 사계리 인근 지역의 강(姜) 씨를 일일이 만나고 다녔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상심하고 있다가 제주불교사연구회로부터 1951년 7월 20일 작성된 강창규 스님의 이력서와 제주시 오등동이 본적이라는 단서를 제공받아 추적한 끝에 전남 해남에 거주하고 있는 강창규 스님의 후손인 손녀 강인숙 씨를 찾게 됐고, 국가보훈처의 심사결과 상훈이 결정됐는데 그 뿌듯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토록 연구에 매진해온 법정사 항일항쟁 100주년을 앞두고 있어서일까. 윤 학장은 위령재 등 불교계가 추모사업에 적극 나설 것을 곱씹어 주문했다. 그는 “불교계가 봉행하는 위령재는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시발점이라고 생각한다”면서 “이를 통해 조국 독립에 헌신한 애국 승려들의 넋을 추모하고, 호국도량으로 전 국민에게 뿌리 내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사)서귀포불교문화원 창립 8주년 기념법회서 발제자로 나선 윤봉택 학장.

무오법정사 항일 항쟁 발굴 진력
강창규 스님 후손 찾아 서훈 상신
국가보훈처 심사결과 상훈 결정
위령재, 잘못된 역사 바로잡기 출발
“호국도량으로 뿌리 내리게 노력”

제주만의 불교문화 애정을
윤 학장은 1980년 8월 10여 년간 수행한 해인사 일주문을 나서며 다짐한 게 있다. 해인사 강원시절 성철 스님이 내려준 ‘똥막대기’ 간시궐(幹屎厥) 화두를 놓지 않겠다는 것이다. 또 음주를 하지 않고, 훗날 인연이 닿으면 공부를 계속해야겠다는 서원도 세웠다.

2014년 공직을 마무리한 윤 학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모든 미련을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 앉았다. 바로 법정사 항일항쟁 발상지 인근의 쌍계암이다. 현재 쌍계암에는 제주도지정유형문화재 31호 〈쌍계암묘법연화경〉이 봉안돼 있다. 윤 학장은 이곳에 제주서 자란 나무로 불상을 조성하겠다고 발원했다. 이후 제주도 상징목인 녹나무에 번쩍 눈이 뜨였고, 2014년 명인 조각장인 유영민 선생에게 녹나무 조각이 가능하다는 답을 받았다.

“녹나무는 잡신들이 범접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독특한 향과 나무의 성분 때문에 벌레가 침범하지 못합니다. 또한 제주도는 부처님의 제자 발타라존자께서 불법을 전한 불국토입니다. 하지만 제주도서 생산된 나무로 조성된 불상이 없고, 대부분 육지에서 모시고 오거나 최근에는 외국서 조성해오는 실정입니다.”

윤 학장은 국가지정무형문화재 제108호 목조각장 박찬수 인간문화재에 불상 조성을 맡겼다. 그러면서 해인사 팔만대장경각 법보전 비로자나좌불상을 모태로 하되 똑같지 않도록 변화를 준 불상을 부탁했다. 이후 조성된 불상에 금박을 처리하지 않고 서귀포 관내서 생산된 황칠나무 황칠액으로 금옷을 입혔다. 그렇게 제주의 지역적 환경과 특성을 잘 보여주고 예술성도 뛰어나 문화재로서 가치 높은 비로자나불상이 올해 3월 제주불자들 곁에 나투었다.

이 같이 지역특색을 반영한 불상을 조성한 윤 학장은 목판 판각에도 관심이 커 이와 관련된 체험프로그램도 실시하고 있다. 쌍계암과 법정사 광장서는 산사문화재 체험을 정기적으로 진행하는데, 해인사 팔만대장경 인경(印經) 방법으로 광명진언을 목판으로 제작하는 것이다.

이는 참가자들에게 큰 환희심을 안겨주고 있다. 이 아이디어는 지난 2007년 전남대학교 대학원 문화재학 협동과정 석사학위 논문인 ‘제주지방의 조선시대 출판문화에 관한 연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 논문에서 윤 학장은 고려시대 당시 제주서도 불경을 목판 판각했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해인사에 보관돼 있는 ‘재조대장경판’이 주조된 후 45년이 지난 1296년(충렬왕 22) 제주 묘련사서 ‘금강명경문구(金光明經文句)’가 판각됐음을 확인한 것이다.

“이는 탐라국이 몽고 침탈을 항거하기 위해 호국삼부경의 하나인 〈금광명경〉을 불자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묘련사가 단순한 사찰로 방치되다시피 해 불교계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습니다. 존자암이 탐라국 시대의 불교성지라면, 묘련사는 고려시대 원의 지배 하에서도 굴하지 않고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원을 물리치고자 했던 당시 탐라인들의 항몽의지가 담긴 성지입니다.”

이 때문에 윤 학장은 묘련사를 제주사회의 인쇄문화를 선도했던 과학기술의 보고라고 설명했다. 고려시대 묘련사서 ‘금광명경문구’가 판각된 이래 721년 만에 쌍계암서 다시 광명진언을 써내는 것은 제주의 인쇄문화를 복원하고자 하는 윤 학장의 열정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산사문화재 체험을 돕는 윤봉택 학장.

서귀포 불교대학 5대학장 취임
서귀포 불교대학원 개설 첫 사업
2년과정에 논문도 발표해야 졸업
올 37기 신입생 중 80%가 젊은층
절반 남성 불자… 거사불교 초석

재가불자 교육을 더 깊게
한때 출가를 경험한 불교학자이자 문화재 전문위원, 시인이기도 한 윤 학장은 지난해 3월 서귀포불교대학 제5대 학장으로 추대됐다. 사실 서귀포불교대학은 윤 학장 취임 이전 동문회의 성 추문 사건이 번져 도내 최고의 불교대학이라는 이미지에 먹칠을 했다. 나락으로 떨어진 이미지를 다시 살리고자 구원투수로 윤 학장을 추대한 셈이다. 윤 학장은 취임 후 현재 불교대학 모습이 불교답지 않은 행동서 비롯된 것으로 판단, ‘서귀포불교대학원’을 개설해 공부하는 불교대학의 초석을 깔았다. 2년 과정의 대학원은 기본적인 스님이 행할 수 있는 과정을 배우면서도 졸업 시 논문까지 발표하는 까다로운 학사일정을 소화해야 한다.

“서귀포불교대학의 운영 프로그램은 전국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훌륭합니다. 〈천수경〉과 〈반야심경〉을 달달 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뜻을 바르게 수지하기 위해서는 학생들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제반여건 조성이 필요합니다. 불교대학 수강생 연령층이 50~70대임을 감안하면 논문 쓰기란 쉽지 않겠죠. 하지만 논문집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고 지도법사 스님이 감수를 받아 발표한다면 당위성과 함께 교육의 질도 높아지리라 봅니다.”

윤 학장의 노력은 점차 성과를 보이고 있다. 올해 입학한 37기 신입생 중 80%가 40~50대로 젊은 불자들이 증가했고, 입학생 가운데는 절반이 남성불자여서 ‘여성종교’라는 구시대적 이미지를 벗고 있다. 윤 학장은 서귀포가 불교 문화적인 요소만이 아니라 지정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지역이라고 강조했다.

“불교사적으로 보면 서귀포는 제주도 최초 불교 전래지인 존자암이 있고, 무오법정사 항일운동 발상지입니다. 서귀포불교는 이처럼 과거 탄탄한 불교신앙의 관점에서 시작된 정토불교라 볼 수 있습니다. 이 같은 자양분을 바탕으로 서귀포불교대학이 건립됐고, 서귀포불교문화원이 왕성하게 활동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서귀포를 포함한 제주가 한국불교서 갖는 위상이 높다고 강조한 윤 학장은 올바른 역사를 정립하는 데 불자들이 뜻을 모으고,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2014년 불교문화재 소장 사찰 지원과 관련해 제주도정에서는 문화재 사찰로부터 의견이나 자문도 없이 불교문화재 관련 지침을 일률적으로 만들어 시행했습니다. 이에 대해 제주불교계서 2015년 1월 29일 관련 세미나를 개최해 지침의 부당성을 알렸습니다. 그 결과 지침 내용이 대폭 수정되는 성과를 얻었습니다.”

즉 문제가 발생했을 때 능동적으로 대처해 잘못된 점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얘기다. 윤 학장은 침묵하는 자비가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맞지 않는 것으로 봤다. 윤 학장의 외관은 마치 부처님 고행상을 닮았다. 눈두덩이는 움푹 패었고, 손과 팔은 뼈에 피부가 달라붙은 것처럼 앙상하다. 단식을 통해 몸을 비우면서 정신은 더욱 또렷해지고, 마음까지 맑혔기 때문이다. 이 또한 해인사 출가 인연으로 단식을 방편 삼아 ‘참 나’를 바로 보고자 하는 것이다.

“단식이 수행의 밑받침이 된다는 점을 몸소 보여주고 싶었어요. 일상업무는 물론 내 몸과 마음까지 평온하니 이게 바로 일거양득입니다. ‘배고픈 것을 어떻게 견딜까’라는 공포심에 시작조차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단식은 진정한 행복으로의 여행입니다.”

강원시절 큰스님이 ‘콩나물 대가리 하나라도 소중히 여기라’는 말씀이 와 닿는다는 윤 학장. 쌀 한 톨, 물 한 모금도 가벼이 여기지 않는 그는 술과 담배, 육식을 멀리하는 것은 물론 단식으로 계·정·혜를 닦는 참 불자의 표상이다.

윤봉택 학장이 서귀포불교대학원 입학식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윤봉택은?

1956년 제주도 서귀포시 강정동서 태어나, 1971년 15살 해인사 강원에 입교(해인사 방장 고암 스님 시봉)해 최연소로 졸업했다. 1980년 환속해 고향서 유기농 농사를 지으며 ‘보리수 학생회’를 지도하는 등 불교 활동을 지속했다. 1992년 서귀포시 향토사료 전임연구원으로 시작해 문화재 전임 연구원으로 오로지 문화재만 바라보며, 2015년 12월 퇴임전까지 제주도 불교문화재의 중장기 보호 및 활용 계획을 수립하며, 불교문화재 지정 및 보존과 전승 활용에 큰 업적을 남겼다. 지난 2012년 문화유산 보존 및 관리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대한민국 문화유산상을 수상했다.

또한 1991년 ‘문예사조’를 통해 등단해 ‘농부에게도 그리움이 있다’ 등의 시집을 펴냈고, 2010년 서귀포문인협회 회장, 2010년 서귀포시청반야불자회장에 이어 2015년부터는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서귀포지회장을 맡고 있다. 또한 2016년 서귀포불교대학? 대학원 학장 소임과 대한불교 원각회 쌍계암 토굴을 2009년 창립, 2017년 3월 본존불로 목조 비로자나불상을 조성, 봉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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