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은 세상과의 소통 ⑭

‘어른’은 부양 대상 아닌
책임 다하는 계층 뜻해
“쉬라”는 말 듣지 않도록
이웃·사회 위해 친절을

몇 년 전, 72세 노인이 9순 노모를 모실 길이 막연해지자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 노인의 아들들은 모두 봉양을 외면하였고, 마땅한 방법을 찾을 길이 없어지자 이 같은 길을 택한 것이다. 한편 별다른 직업이 없는 60대 후반의 어느 아버지는 아들의 음주 운전을 나무라다 아들한테 구타를 당하고 분한 나머지 자살하는 일도 있었다. 집안의 어른으로서 무능한 아버지라는 멸시와 구타로 인해 그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로써 자신의 삶을 마감한 것이다. 이 두 나이 든 분들이 스스로 죽거나 부모를 살해하였으니 노년의 인생이 참으로 허망하기 짝이 없다.

우리는 나이 든 사람을 평가할 때 가끔 ‘나잇값도 못하는구나’라고 비난한다. 이 말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 제 값을 다 못한 것으로 평가할 때 쓴다. 누구나 살아온 인생의 마지막 모습은 전 인생의 총체적인 삶의 결과로 볼 수 있다.

오늘날 성과가 제일이라고 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욕망을 향해 끝없이 앞만 보고 달려간다. 분명 생명이든 일이든 끝이 있음을 알 텐데 나이 들어도 한계를 의식하지 못하고 달려가는 것은 인생에 대한 올바른 가치를 헤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의식이 깨어있지 못하여 삶의 가치를 놓치고 달려만 간다면 나이가 들고 물질적, 사회적으로 쌓아놓은 것들이 많다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죽을 때까지 성장한다
우리는 나이 든 성인을 ‘어른’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그들을 ‘부양의 대상이 아니라 사회를 책임지는 계층’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빅토르 프랜클(Victor Frankl)은 그의 나이 86세에 스스로 자신의 ‘노년’에 대해 이렇게 인터뷰했다.

“늙어 가는 것에 대해서 나는 발버둥칠 일이 없습니다. 나는 어쩌면 지금도 성장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 기억력이 떨어지고, 사물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는 속도도 떨어지지만 그러한 것들은 어느 것이나 그동안 몇 십 년에 걸쳐서 얻은 인생의 경험으로 보충할 수 있습니다.

죽음이나 인생의 무상함은 내게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아무 것도 잃은 것이 없으며, 부서진 것도 없다는 것이 나의 신념입니다. 우리가 해온 것, 우리가 이룩한 것, 우리가 만들어온 것, 우리가 경험한 것, 우리가 사랑한 사람, 우리가 받아온 고통조차도 이것을 제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프랭클의 인터뷰가 갖는 의미는 ‘인생은 죽을 때까지도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며, 살아온 과정에서 이룩한 어떠한 것도 훼손되지 않으니 나이 듦에 대해 조금도 머뭇거리거나 좌절하지 않고 의연해야 함을 말해준다. 요컨대 프랭클은 인간은 생물학적 사실, 심리학적 사실, 사회학적 사실에서 독립하여 이러한 사실에 대한 인격적 태도를 결정할 수 있는 존재임을 강조한 것이다.

100세를 넘긴 일본의 시인 시바타 도요(1911~ 2013)는 ‘노년은 재앙이 아니라 축복’이라는 사실을 온몸으로 증명해줬다. 92세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는 시바타 할머니의 시 1편을 소개한다.

나이 아흔을 넘기며 맞는 하루하루 너무 사랑스러워/ 뺨을 어루만지는 바람, 친구에게 걸려온 안부전화, 집까지 찾아와주는 사람들/ 제각각 모두 나에게 살아갈 힘을 선물하네 -살아갈 힘-

시에서 노래하듯 친구에게 걸려온 한 통의 전화가 ‘살아가는 힘’이 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이 시인은 100세를 넘기면서까지 긍정적 삶의 에너지가 넘쳐있음을 볼 수 있으며, 소녀처럼 아주 작은 일에도 감동을 받는 감수성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수명이 연장되어 이제는 80을 넘어 90을 사는 시대이다. 게다가 기대 수명은 100세를 넘는다. 아마도 젊은 시절, 생계를 책임지느라 바빠서 하지 못한 일을 마저 하고 가려는 마음이 자신의 기대수명을 연장한 것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장수(長壽)는 재앙이 아니라 기쁘고 놀라운 축복인 것이 확실하다.

그리스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주변에서 “늙었으니 이제는 편히 쉬시지요”라고 말하자 이렇게 반문했다고 한다. “만일 내가 경기장에서 달리기를 한다면 결승점에 가까이 가서 속도를 늦추는 것이 좋겠소, 아니면 온힘을 다해 질주하는 것이 좋겠소?” 얼마나 박력 있는 대답인가!

심리 사회학자 에릭슨은 인간의 심리사회발달을 8단계로 나누고, 마지막 단계의 과제로 ‘자아통합(ego integrity)’을 이루는 시기로 제시했다. 나이로 보면 65세 이후의 시기가 된다. 이 시기는 한 개인의 인생을 회고해 볼 때 ‘지혜’라는 특성이 생겨날 때다. 지혜는 의미부여와 자비를 포함한다. 지혜는 죽음 앞에서도 현실을 직면했을 때 지속적인 성장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을 말한다. 디오게네스의 말처럼 나이 든 사람들은 ‘결승점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리는’ 초연한 모습이어야 할 것이다.

‘큰 바위 얼굴’ 같은 어른으로
아무리 나이 듦에 대한 예찬을 하더라도 나이 드는 것은 실제요 현상이다. 필자에게는 나이 들면서 갖게 되는 걱정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몸에 대한 걱정이다. 몸의 지구력이 점점 떨어지는 것이 느껴진다. 서너 시간씩 걸어도 끄떡없던 몸이 한두 시간만 걸어도 힘에 벅차다. 김을 맬 때나 풀을 벨 때, 심지어는 가만히 앉아서 글 쓰는 일을 할 때도 오래 견디지 못한다. 오름을 가거나 산에 가는 모임에서는 차츰 빠지게 된다.

두 번째는 마음에 대한 걱정이다. 인생에서 50년 가까이 가르치며 살다 보니 가르치는 일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다. 그래서 때때로 강의를 하거나 상담을 하게 되는데, 한 말을 또 하거나 ‘무슨 말을 해야지’ 하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 말을 하려고 하면 잊어버려서 당황할 때가 있다. 상대방이 한 말에 대해 반응을 보여야 하는데 그 말이 기억나지 않는다.

세 번째는 관계에 대한 걱정이다. 몸과 마음이 이러하니 관계관리가 더 걱정이다. 강의를 요청받아도 걱정이요, 강의 요청이 없어도 걱정이다. 요청을 받으면 잘 해야 하는데 마음이 따라주지 않을까봐 걱정이요, 요청을 받지 않으면 내 자신의 존재가 이미 쓸모가 없어진 게 아닌가 하고 걱정이다. 다행히도 글 쓰는 일은 쓴 글을 보고 또 보니 전체적인 맥락만 놓치지 않으면 된다. 이러한 걱정은 나 자신의 몸과 마음, 관계에 대한 것이다. 이러한 자신의 모습은 ‘세월 이겨내는 장사’ 없듯이 자연현상이니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자연현상을 초월하는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바로 인격이다.

필자는 어린 시절 나다니엘 호오손의 단편소설 ‘큰 바위 얼굴’을 읽고 그런 모습으로 살고 싶다고 마음먹었다. 주인공 어니스트도 어린 시절 어머니의 영향으로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사람이 되고자 했다. 성장 과정에서 만나는 막대한 부자, 높은 사회적 지위보다 지속적 자기성찰이 그의 위대한 가치를 높여 주었음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성숙한 모습을 가진 성인이나 성현을 삶의 모델로 정해 놓고 성찰하며 살아간다면 신체나 인지적인 걱정 없이 일생을 함께 할 수 있다.

우리 주변의 ‘어른’은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한다. 어떤 어른은 조용하고 말을 아끼며, 어떤 어른은 거칠고 도발적이다. 또 어떤 어른은 너무나 평범해서 사람들 사이에서 두드러져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진정한 어른의 모습이 어떤 것이냐에 대한 이상적인 모델은 찾기 어렵다. 진정한 ‘어른’은 오랫동안 명상과 같은 자신을 알기 위한 수행을 통해 인간의식의 본성을 깨달은 사람이다. 그들은 주변 사람들과 깨달음의 원천을 기꺼이 나눈다.

‘어른’을 만나는 사람들은 진리를 전달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진실을 찾아가게 된다. 마치 ‘큰 바위 얼굴’이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의 참모습을 깨닫게 되듯이 말이다. 그러나 ‘어른’은 자신의 사랑, 진리, 현존을 그의 삶에서 구현하고 있느냐가 신뢰의 판단 기준이 된다. 진정한 ‘어른’의 원천은 사람들의 행복에 대한 진지한 관심과 자신과 더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돕는 능력이다.

큰 바위 얼굴과 같은 상징적 대상을 모델로 삼기도 하지만 나이가 증가하는 것에 반비례하는 글귀를 거울로 삼는 것도 성찰의 한 방법이다. 필자가 인도 리쉬케쉬의 한 아슈람에 들렀을 때 실내 벽에 쓰인 ‘eat a little, drink a little, talk a little, sleep a little’이라는 문구를 보고 ‘이 문구처럼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은 뒤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다. 수행처에 쓰인 문구이니 수행자가 지켜야 할 계율이지만 왠지 마치 내가 지켜야 할 계율처럼 다가왔던 것이다. 우리는 나이 들면서 절제하는 습관, 다스리는 습관을 몸에 익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수행을 통해 물질적 풍요로움이 아니라 비어있는 마음, 밝은 의식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이제 이웃과 사회와 국가를 위해 작은 친절을 베푸는 것은 나이 든 어른들의 몫이다. 나이 든 분들은 누구나 ‘늙었으니 쉬세요’라는 말을 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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