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소와 목동 이야기 上

‘미목(未牧: 길들기 전)’ 마음이 방자하고 객기의 충동에 휩쓸리는 상태로, 수행으로 전향하기 전의 모습이다. 보명선사의 <목우십도송>

약초 캐다가 어느새 길을 잃었지
천 봉우리 가을 잎 덮인 속에서.
산 스님이 물을 길어 돌아가더니
숲 끝에서 차 달이는 연기가 일어난다
- 율곡 이이, ‘산속(山中)’

이런! 너무 열심히 약초 캐다 보니, 길을 일어버렸네요. 해는 어느덧 저물어 어둠이 깔립니다. 차가운 바람과 어둑해진 주변, 문득 고개를 드니, 울창한 숲 속입니다. 아! 길을 잃었구나. 약초를 쫓다가 첩첩 산골짜기까지 들어와 버렸네요. 손에 한 가득 움켜쥔 약초. 걸망에도 잔뜩 입니다. 

하지만, 길을 잃은 마당에 이게 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어디로 나가야 하나, 순간 두려움과 막연함이 엄습합니다. 그러던 중 멀리서 연기가 한 줄기 피어오르는 것이 보입니다. 저쪽 방향에 절이 있구나! 휴, 살았네요. 이제 하산하는 길을 찾을 수 있으니.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 놓은 목표를 향해 매진합니다. 그러다 보면 그 과정에서 더 많은 욕망들이 들러붙곤 합니다. 그리고 욕망은 맹목적으로 굴러가기 시작합니다. 어느덧 우리는 꼼짝없이 욕망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마음은 쫓기고 더 이상 자유롭지 못합니다. 여유로운 삶을 택하지도 못합니다. 

율곡 이이의 ‘산중’이라는 시처럼, 약초를 쫓고 또 쫓다 보니 산 속에 오리무중으로 갇혀버렸네요. 하지만, 그러다가 문득 고개를 드는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왜 이러고 있나’ 바라보게 됩니다. ‘자각(自覺)’하는 마음이 발동한 순간입니다. 수행의 과정을 게송으로 읊은 〈십우도송〉은 이러한 ‘발심(發心)’의 순간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사찰 전각 벽화 소재 ‘십우도’
무명으로 날뛰는 마음 ‘소’를
동자는 어떤 지혜로 길들일까
소 찾는 일정 이렇게 시작된다

‘자각하는 마음’의 발동, 初發心
현재 우리나라 사찰 전각의 벽화는 대개 두 주제로 나뉩니다. 하나는 석가모니 일대기를 여덟 폭의 장면으로 그린 ‘팔상도’이고, 다른 하나는 수행의 단계를 우화적으로 그려놓은 ‘십우도(또는 심우도)’입니다. 깨달음으로 가는 과정을, ‘소를 길들이는 목동’에 비유하여, 풀이하여 그려놓았기에 ‘목우도(牧牛圖)’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평생 동안 무명과 욕망에 길들여져, 본 바탕인 반야지혜를 완전히 망각하고 있는 상태를 ‘검은 소’에 비유합니다. 깨달음과 분리되어 버린 자아를 ‘집나간 소’에 비유하였기에 ‘소를 찾는다’라는 의미로 ‘심우도(尋牛圖)’라고 하기도 합니다. 궁극의 깨달음과 계합하는 과정을 첫 단계에서부터 마지막 단계까지 총 10단계로 도해하고 있기에 보통 ‘십우도(十牛圖)’라고 합니다.

십우도의 대표적 근거가 되는 곽암 선사와 보명 선사의 게송을 중심으로 그 내용과 그림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보명선사의 ‘목우 10송’을 보면, 첫 번째 제목은 ‘미목(未牧)’으로 ‘아직 길들여지지 않았다’라는 뜻입니다.

사납게 생긴 머리의 뿔로 방자하게 으르렁거리며/ 시내와 산골로 치닫고 달리니 길에서 점점 멀어만 가네/ 한 조각 검은 구름은 골짝 어귀에 비켜 떠있는데/ 치닫는 걸음마다 아름다운 싹을 침범할 줄 누군들 알리요.

치성한 번뇌 망상은 사방으로 튑니다. 불뚝 화를 냈다가도 우울해지기도 하고 그러다가 술에 취해 고주망태가 되기도 합니다. 여기 저기 아무 곳으로나 치닫는 발걸음에 무고한 새싹들이 짓밟힙니다. 자각되지 못한 무지와 욕망은, 이렇게 미처 날뛰는 소처럼, 참으로 위험합니다.

고질적으로 현행되는 오온(五蘊)의 작용에, 하릴없이 휘둘려, 숨소리는 거칠어지고 가슴을 벌렁거립니다. 결국 가속도가 붙은 업력은 자신도 해치고 남도 해칩니다. 하지만, 이러한 무명의 작용을 전혀 자각하지 못한 채 이것을 자아와 철석같이 동일시합니다. 곽암 선사의 게송은 〈심우(尋牛)〉(소를 찾다)라는 제목으로 시작합니다.

“망망한 수풀을 헤치고 소의 자취를 찾노니/강물은 넓고 산은 험하며 길은 더욱 깊기만 하다/ 탈진하고 기력이 떨어져 찾을 길 없는데/다만 숲속 나뭇가지엔 매미 우는 소리만 들리네.”

깨달음을 구하려 하고는 있으나, 아직은 왜곡된 현상에 속아 번뇌 망상이 들끓는 단계입니다. 깨달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수행 길에 들어섰으나, 도통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헤매는 모습입니다. 의식적 노력을 기울이지만 노력을 어떻게 기울여야 하는지,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허투루 에너지만 탕진하고 막막한 상태이네요.

‘회수(回首: 머리를 돌이키다)’ 일구월심 공을 쌓아 어느 정도 힘을 얻었으나, 아직 방심할 수는 없는 경지.

검은 소, ‘무명’이 만드는 ‘레알 세상’
십우도에 등장하는 검은 소는 ‘무명(無明)’을 상징합니다. 즉, 지혜(智慧)가 없는 상태의 중생심을 가르킵니다. 보조국사 지눌 스님이 저술한 〈수심결〉의 첫머리에는 이 같은 중생의 상태를, “탐·진·치의 뜨거운 불덩이” 속에 있는 것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탐욕과 성냄과 무명의 뜨거운 번뇌여/ 마치 활활 타는 집과 같거늘/ 그 속에 오래 머물러 참으며/ 기나긴 고통을 달게 받을 것인가”라며, 윤회의 고통 속에 마냥 시달릴 것인지 아니면 해탈의 길로 나아갈 것인지 종용합니다. “윤회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부처가 되는 길 밖에는 없네 … 이 육신은 변하는 거짓이라/ 태어남이 있으므로 죽음이 있거늘/ 참마음은 허공 같아서/ 끊기지도 변하지도 않는다”라며, 허망한 몸을 근거로 탐진치에 휘둘리지 말고 허허로운 참마음을 찾으라고 하시네요.

그렇다면, 소를 길들이는 동자는 무엇을 상징할까요? 무명의 천적인 지혜입니다. 스스로를 아는 마음, 자각의 마음입니다. 하지만, 이제 막 자각하여 첫 걸음마를 떼는 단계인지라 힘이 미비합니다. 아직은 무명이라는 존재의 본질을 그 밑바닥까지 보아낼 힘이 없습니다. 아니, 보고 싶지 않은 지도 모릅니다.

중생들은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그 근저의 자의식을 은근히 즐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첫 설법을 하시기 전, 망설인 이유가 바로 이것이라고 합니다. 세세생생 유전된 업식의 힘은 만만치가 않습니다. 그 뿌리가 아주 깊을 수도 있겠지요. 그렇기에 ‘강물은 넓고 산은 험하며 길은 더욱 깊기만 하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렇게 깨달음을 향한 길은 아득하기만 할까요. 곽암 선사의 십우게송 서문에는 “종래 잃지 않았는데 무엇을 찾는가?”라고 말합니다. “깨달음을 등짐으로 말미암아 멀어져서 속세로 향하더니 드디어 집을 잃고 마는 구나. 집에서 점점 멀어져 갈림길이 갑자기 달라져, 얻고 잃음이 치성하여 시비가 험하구나”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종래 잃지 않았는데 무엇을 찾는가”라는 첫 문구에서, 본인이 여기가 집인 줄 몰라서 그렇지 어디를 가든 거기가 ‘집’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대승불교의 여래장(如來藏) 사상입니다.

어떤 상태에 있건 간에, 불성(佛性)은 존재의 안팎으로 편재하고 있습니다. ‘시각(始覺)이 곧 본각(本覺)이다’라는 문구가 떠오릅니다. 그러니까 십우도의 첫 장면에 동자가 등장하는 것은 바야흐로 ‘시각’을 상징합니다. 그러니까 십우도는 시각에서 본각으로 가는, 무명의 자아가 깨달음의 바탕으로 계합해 가는 과정을 그림과 함께 설명해 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십우도의 다음 장면들을 보면, 검은 소와 필사적인 사투를 벌이는 장면들이 이어집니다. 처음에는 길을 잃고 헤매다가, 엎치락뒤치락 고삐를 부여잡고, 다음에는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동자의 모습이 보입니다. 과연, 동자는 검은 소를 굴복 받을 수 있을까요.

#토막 불교상식
‘십우도’란 무엇인가?

수행자의 수행 과정의 단계를, 비유적 이야기를 통해, 그림과 게송으로 풀어서 설명한 것이다. 동자가 잃어버린 소를 찾아 우여곡절 끝에 길들여서, 집으로 돌아와 궁극의 깨달음에 드는 과정을, 그림(圖)과 송(頌)으로 도해하였다.

이러한 형식의 저작은, 특히 북송 중기부터 남송 초기에 걸쳐 집중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가장 시대가 오래된 것으로는 중국 북송대 청거호승(淸居皓昇) 선사의 ‘목우도송 12장’이 있다. 다음으로 보명(普明) 선사의 ‘목우 10장’, 유백(惟白) 선사의 ‘목우 8장’ 등 유명 선사들이 이 형식을 빌려 참선의 수행단계를 알기 쉽게 제시하였다.

중국에서는, 선풍이 점점 쇠퇴해가는 원(元)·명(明)대에 이르기까지도, 보명선사의 목우도(牧牛圖)가 일반적으로 유행했고, 반면 일본에서는 무로마치시대(1392~1573) 이래부터 곽암(廓庵) 선사의 십우도(十牛圖)가 널리 알려졌다. 우리나라 사찰 벽화에 주로 그려지는 것은 남송의 곽암 선사 십우도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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