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립문자(不立文字)를 표방하는 선가에서도 주옥같은 글을 남긴 선사들이 많았다. 

그것은 선사들 중에도 학식이 높고 학문적 자질이 뛰어난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중국의 선불교가 인도에서 온 달마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나 선이 토착화 되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달마도래 후 100년쯤이 지나고 양자강 이남에서 중국화 된 선법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중국선의 자생적 발생에는 〈화엄경〉의 성기(性起)사상, 〈열반경〉의 불성, 여래장(如來藏)사상 그리고 노장사상(老莊思想)이 결합되어 발생하였다. 이리하여 점점 세력을 확장하여 중국의 선불교는 새로운 불교로 일어나면서 동아시아 전역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러나 당(唐)나라 때 일세를 풍미하던 선불교가 당나라가 망하고 송(宋)나라가 들어서면서 쇠퇴의 조짐을 보이게 된다. 다시 유교가 각광을 받으면서 유학을 공부하여 입신출세의 길을 가려는 것이 대부분의 상류층 지식인이 원하던 것이었다.

이러한 시기에 유학(儒學) 공부에 몰두하다 출가하여 세출간의 영웅이 된 선사가 있었다. 바로 설두중현(雪竇重顯, 980~1052) 선사다. 설두는 어릴 적부터 유학을 공부하여 뛰어난 자질을 보였다. 그는 특히 시(詩)에 재능을 발휘하여 주위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세속의 부귀영화가 무상한 것을 깨닫고 23살에 출가를 결행했다. 익주(益州) 보안원(普安院)으로 들어가 스님이 되어 경과 율을 익힌 후에 지문광조(智門光祚)를 찾아가 5년간을 지도를 받으며 열심히 수행정진하였다. 그가 도를 깨달은 계기는 불자(拂子)에 얼굴을 맞고서다.

어느 날 스승 광조에게 물었다.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을 때의 허물은 어떤 것입니까?” 광조가 손에 들고 있던 불자로 얼굴을 후려쳤다. 그는 같은 질문을 다시 했다. 그러자 또 다시 불자로 후려쳤다. 이 순간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는 운문종을 개창한 운문문언(雲門文偃), 향림징원(香林澄遠), 지문광조(智門光祚)의 대를 이어 운문종의 4대(四代) 조사가 되었다.

나중에 그는 스승의 청에 의해 절강성(浙江省) 명주(明州)에 있는 설두산(雪竇山)으로 들어가 자성사(資聖寺)에 머물면서 30여 년을 독특한 선풍을 드날렸다. 70여 명의 제자들을 배출하여 기울던 운문종의 종풍을 다시 일으켜 세운 운문종의 중흥조라 불리었다.

유학자 출신인 그는 글을 잘 하여 여러 가지 저술을 남겼다. 〈설두개당록(雪竇開堂錄)〉, 〈동정어록(洞庭語錄)〉, 〈송고백칙(頌古百則)〉, 〈조영집(祖英集)〉, 〈폭천집(瀑泉集)〉 등이 있는데, 이 가운데서 단연 백미(白眉)로 꼽히는 것은 〈송고백칙〉이다. 부처님 당시로부터 그가 살았던 11세기까지의 선사들의 오도 기연(機緣)과 공안에 송을 붙인 것이다. 선사(禪師)로서 공안에 대하여 본분에 근거하여 판단하는 일종의 해설이다. 이 송고는 분양선소(汾陽善昭)에 의해 시작되어 설두, 묵조선(默照禪)의 거장이었던 굉지정각(宏智正覺), 무문혜개(無門慧開) 등이 송고집을 남겼다. 설두의 〈송고백칙〉은 후에 〈벽암록〉을 탄생케 한 모태가 되었다.

〈조영집〉은 설두의 시집이라 할 수 있는 책이다. 220 편의 시문이 수록되어 있다. 그 중에는 역대 중국의 황제들을 폄하하는 내용들이 들어 있어 대장경을 편찬할 때 목록에 포함되지 못하고 제외 되었다 한다. 그러나 그의 시가 일반 서민들에게까지 알려지기도 했다. 설두의 업적을 후대에 와서 평가하는 말에, 사람들이 선의 세계에 친근감을 갖도록 하고 관심을 기울게 하여 선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한 바가 있다고 한다. 말하자면 선사들만 이해하는, 어렵게만 느껴지는 선을 일반 사람들이 친근함을 느끼도록 해 준 것을 그의 공로로 친다는 것이다. 사실 선은 깨닫기는 어려워도 접근하기는 쉬운 것이다. 난해한 사변적이고 현학적인 교리를 탈피하여 학식을 앞세우지 않는 실천 수행법이기 때문에 누구나 쉽게 시작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교학불교보다는 선불교가 일반대중에게 더 널리 퍼질 수가 있었다. 선에서 강조한 돈오사상이 나오게 된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다.

설두가 남긴 유명한 게송이 있다.

牛頭沒馬頭回

소머리로 사라졌다 말머리로 돌아오니

曹溪鏡裏絶塵埃

조계의 거울 속엔 티끌 먼지 없도다.

打鼓看來君不見

잘 보라고 북을 쳐도 그대는 못 보구나.

百花春至爲誰開

봄이 오면 피는 꽃들 누굴 위해 피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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