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가 후에도 어머니 생각나면 노래했다

섬집 아기와 어머니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바다가 불러 주는 자장 노래에/ 팔 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아기는 잠을 곤히 자고 있지만/ 갈매기 울음소리 맘이 설레어/ 다 못 찬 굴 바구니 머리에 이고/ 엄마는 모랫길을 달려옵니다.’

 

이 동요는 해외에 머물던 15년 동안 ‘고향땅’과 더불어 가장 많이 흥얼거리던 노래이다. ‘고향땅’은 초등학교에서 배웠지만 ‘섬집 아기’는 어머니를 따라다니며 어머니와 합창해 익힌 사연 깊은 노래이다.

어린 시절 우리 집은 가난하였다. 어머니는 가난을 이겨내려 숯 장사, 고구마 장사등 돈이 되는 일을 찾아 나서며 고되고 힘겹게 가난과 싸워오셨다. 집에서 부안 읍내까지는 10km가 넘는 길이었으나 버스 값을 아끼려고 이른 새벽에 일어나 읍내의 장터까지 걸어 다닌 어머니였다. 밭이나 논에서 일도 많이 하였는데 그때마다 따라나서는 나에게 어머님이 들려주신 노래, 열 번 스무 번 들어서 익힌 ‘섬집 아기’였다.

하여, ‘섬집 아기’는 나의 그림자가 되어 인도와 네팔로 따라다녔고 티베트에서 고산증으로 의식을 잃었다가 군인들의 도움으로 깨어났을 때에도 나는 염불처럼 어머님을 떠올리며 ‘섬집 아기’를 중얼거렸던 것이다.

인터넷의 블로그 등에 많이 올려 있는 ‘내 죽거든’이란 시(詩)도 고산증세로 의식이 희미해져갈 때 안간힘을 다해 수행자로 유서로 남긴 글이다. 그 당시에도 나는 ‘섬집 아기’를 떠올리며 어머니의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고 싶어 ‘내 죽거든 이웃들에게 친구들에게 알리지 말길. 관이니 상여니 만들지 말길, 그저 입은 옷 그대로 둘둘 말아서, 타오르는 불더미 속에 던져 버릴 것’을 글로 남겼으리라.

나의 고향은 3면이 바다인 변산반도이다. 그러다 보니 바다가 멀지 않았고 어머니를 따라 ‘돈지’라는 바닷가에서 게 잡는 일이 자주 있었다. 게를 삶아 먹으면 시장기를 달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드문 일이나 가끔씩 갯벌의 구멍에서 쭈꾸미나 낙지를 잡는 횡재하는 일도 벌어지게 된다. 그날도 나는 은밀하게 확신을 갖고 경험을 되살려 낙지잡이에 열중이었다. 바닷물이 썰물일 때 게 잡는 작업을 하다가 밀물로 바닷물이 차오를 때는 모든 작업을 중지하고 해변으로 빠져 나와야 한다.

그날, 나만의 은밀한 작업, 낙지 잡는 일에 열중하다 밀물의 바닷물에 갇히게 된다. 함께 간 동네 아줌마들이 어서 빠져 나오라고 소리치고 있었으나 순식간에 허리까지 차오른 바닷물이 두려움을 더해주며 땅 짚고 헤엄치는 수준의 나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그래도 애써 잡은 낙지 두 마리를 입에 물고 헤엄치려했으나 물이 깊어 서 있는 장승처럼 몸이 떨리며 굳어지고 있었다.

그때이다. 어머니는 게 잡은 망태도 바닷물에 던져버리고 온 힘을 다해 헤엄쳐 나를 끌고 안전지대로 빠져나오게 된 것이다. 바닷물을 토해내는 것은 나만의 일이 아닌, 어머니는 나의 등을 두드리며 연신 바닷물을 토하고 있었던 것이다. 낙지 두 마리도, 게 잡은 망태까지 잃어버린 빈 손이었지만 어머니와 나는 웃고 있었다.

당시 어머니는 가끔씩 예배당에 다녀오는 신참 기독교인이었으므로 감사의 기도도 잊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올 때 어머니와 부른 합창도 ‘섬집 아기’였다. 그 후 ‘섬집 아기’를 함께 부른 아이는 출가해 스님이 되고 군에 입대하게 된다. 첫 휴가 때 어머니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밥상 위의 쌀에서 깨진 쌀과 뉘를 가려내며 작은 소리로 ‘관세음보살’과 ‘아미타불’을 되뇌고 있었다. 소변 때문에 일어난 아들은 어머니의 ‘관세음보살’과 ‘아미타불’의 뜻을 묻게 된다. 어머니는 머뭇거리며 말씀하신다.

“하룻밤 자면 떠날 아들에게 싸래기와 뉘를 골라내 좋은 쌀로 밥을 지어 먹이고 싶어서이다. 뜻은 모른다만 아들에게 좋은 일만 있게 해달라고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고 있었다.”

아들은 가슴이 먹먹해 울고 싶었다. 어머니를 와락 껴안으며 그날 밤 졸라서 어머니와 함께 부른 노래가 ‘섬집 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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