⑭ 진관사서 삼천사 가는 길

북한산 사모바위에 앉아서 서울을 내려다보는 수행도반의 모습. 이 능선에서는 은평구 일대는 물론 서해바다까지도 볼 수 있다.

욕심을 씻어내라는 세심교

진관사 수륙재 봉행 근원

능선엔 원효와 의상 설화가

삼천사가 진관동 사찰 옛이름

 

학인이 스승에게 물었다.

“저는 이제 갓 절에 들어온 참이니 스님께서는 뭔가 들어가는 길을 가리켜 주십시오.”

그 말에 스승인 현사 스님은 되물었다.

“시냇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

학인이 들린다고 하자, 현사 스님은 말했다.

“그곳이 네가 들어갈 곳이다.”

현사의 시냇물로 유명한 이 문답 속의 시냇물 소리는 감각이라는 필터를 거치지 않고 직접 들리는 소리, 투명하고 무취한 소리, 들으려 할수록 들으려는 의지가 끼어들어 들리지 않는 소리를 의미한다. 우리가 흔히 독경하는 〈반야심경〉에 의하면 ‘색이 아니라 무색의 경지에서 듣는 소리’로 감각이라는 허구를 버려야만 드넓은 정신세계를 획득할 수 있다는 뜻이다.

현사 스님이 제자에게 건넨 이야기는 절이 계곡에 있기에 가능한 이야기이다. 능선에 올라앉은 절을 보기란 매우 드물다. 절이 계곡에 있으면 절골이라 불리는데 그 절골을 따라 물이 흐르면 이 물을 명당수라고 불렀다.

일주문을 통해 진관사(津寬寺)에 들어서니 역시 개울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대개의 절이 그렇듯이 개울을 가로질러 다리가 있었다. 그 다리를 건너야 비로소 속세에서 벗어나고 피안의 세계에 이를 수 있다는 의미다. 그 다리를 건널 때 극락으로 가는 기분인지 진관사로 가는 다리 이름이 극락교이다.

진관사 입구에 있는 극락교.

진관사에는 다리가 하나 더 있다. 그 이름은 세심교(洗心橋). 다리를 건너는 동안 발 아래 흐르는 물에 마음의 때를 씻어내란 의미다. 세심교 한가운데 이르렀을 때였다.

마주 오는 복면의 사내에게 길을 터주려 몸을 비켜서야 했다. 허리에 칼을 찬, 영락없는 자객의 모습이다. 그는 누구인가?

진관사의 전신은 신혈사(神穴寺)이다. 지금의 진관사가 있는 자리에서 서북쪽 어디쯤으로 추측되는 절이다. 신혈사를 둘러싸고 치열한 권력다툼이 벌어지니 고려 목종 때 일이다. 목종의 어머니로 오랫동안 섭정해 온 천추태후(千秋太后)가 자객을 보내 유일한 왕통인 왕순을 암살하려 했다. 왕순은, 천추태후의 친동생인 헌정왕후가 숙부인 왕욱과 사통해 낳은 자식으로, 천추태후의 조카뻘이기도 했다.

천추태후는 한 시대를 풍미했으나 문제는 목종이 후사를 두지 못한 데서 생겼다. 목종이 죽는다면 조카뻘인 왕순에게 왕위를 물려줘야 할 판이었다.

천추태후는 이 상황에서 자신과 김치양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을 목종의 뒤에 세우려 했다. 그러자니 왕순을 죽일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어차피 자기 아들이나 조카나 욕계의 사생아 아닌가.

기록을 들추면 왕순의 어린 시절은 죽음의 그림자를 피해 달아난 시기로 보인다. 사미가 되어 여러 절을 전전한 것부터가 그렇다.

신혈사에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로부터 왕순을 보호해준 이는 진관이라는 스님이었다. 진관 스님이 불단 아래 파놓은 굴에 왕순을 숨겨 자객의 칼을 피할 수 있었다. 목숨을 담보하고 왕순을 구해준 진관 스님은 추측건대 천추태후와 대척되는 세력의 한 인물이었으리라.

강조의 정변으로 목종이 폐위되자 왕순은 고려의 8대 왕 현종으로 등극한다. 현종은 자신의 목숨을 구한 굴을 신혈, 신의 도움을 입은 굴이라 부르고, 절 이름도 신혈사로 부르도록 했다. 은인인 진관 스님을 위해서도 반듯한 새 절을 지어주었으니 그 이름이 진관사이다.

진관사로 쏟아지는 계곡물.

그 사이, 천추태후와 김치양을 옹호한 무수한 세력이 제거 당했다. 현종의 편에서는 해피앤딩이지만 천추태후의 편에서는 지극한 불행이 아닐 수 없었다. 불행을 낳은 원인은 당연히 욕계의 주인공인 욕심이었다.

진관사 세심교가 말하려는 것도 욕심을 씻어내라는 교훈이다. 그러나 진관사 세심교를 건너면 쉬이 욕심에서 벗어나리라 생각하는 중생이 얼마나 될까. 따지고 보면 산 자나 죽은 자 모두 욕계의 희생자이다. 일찍이 그걸 알기에 이성계나 이방원 같은 권력자들이 당신들로 인해 물이나 뭍에서 희생당한 원혼을 달래주려 진관사에서 수륙재(水陸齋)를 지냈는지도 모른다. 자연스럽게 진관사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수륙도량이 됐다.

아무리 가물어도 진관사 계곡물이 멈춘 적은 없다. 이걸 알기에 나는 여느 등산객처럼 응봉능선으로 향하는 산길에 오르지 않고 진관사 경내를 통과해 계곡을 깊숙이 따라 들어갔다. 물소리가 햇빛을 반사하는 나뭇잎들처럼 바글거린다. 물가의 나무들이 내주는 그늘을 따라 계곡길을 걸으니 입산의 느낌은 더욱 강해진다. 마음이 차분하고 아득해지는 것이 능선을 걸을 때와는 다른 혜택이다. 그렇게 그늘을 밟아 가다가 시냇물을 따라가던 길이 끊긴 데서야 응봉능선에 올랐다.

응봉능선은 은평구로 가지를 뻗은 북한산 산줄기이다. 이 능선에 오르면 은평구 일대는 물론 아주 맑은 날은 서해바다까지 트인다. 옆을 흘끗 보면 의상능선과 원효능선이 나란히 산줄기를 내리뻗었다. 그 모습에서 당나라로 가기로 합의하고 경주를 나서는 원효 스님과 의상 스님을 본다.

응봉능선은 사모바위가 있는 쉼터에 닿는다. 언젠가 함께 길을 걷던 도반이 사모바위를 인터체인지임을 표시하는 거대한 이정표라고 표현한 적이 있었다. 북한산 능선이 이곳에서 모이거나 갈라지고, 등산객들도 길을 따라 모이고 흩어지는 데다 생김새까지 네모지니 썩 어울리는 표현이다.

사모바위에서 삼천사(三千寺)로 향하는 하산길을 찾다가 다시 응봉능선을 탔다. 응봉능선을 경계로 진관사와 삼천사는 각자 다른 골짜기에 있다. 3000명의 스님이 수행할 정도로 사세가 컸다는 삼천사다. 그러나 그 숫자에 놀랄 필요는 없다. 불교에서 삼천이란 숫자는 많거나 크다는 뜻으로 통용될 뿐이다.

삼천사 마애불 앞서 기도하는 불자.

삼천사는 신라의 원효 스님이 창건한 절이라 하고, 원효 스님과 진관 스님이 함께 창건했다고도 전해오는 말이 있어 혼란스럽다. 진관 스님은 고려 현종의 은인 아니었나? 기이하게도 그 진관 스님이 한국전쟁이 끝나자 진관사를 재건한 인물로 삼천사 사적기에 다시 등장한다. 그렇다면 진관 스님은 시공을 초월한 인물이었나? 추측이지만 왕을 구한 은공으로 진관사를 하사받은 진관 스님이 가까운 삼천사를 중창했을지도 모른다. 부처나 아라한이 되지 못한 중생은 끊임없이 육도윤회하니, 한국전쟁 후 삼천사를 중건한 진관 스님이 전대의 진관 스님과 동명이인인 것을 우연이라고만 여길 순 없다.

삼천사의 옛 이름은 삼천사(三川寺)로, 본래 의상능선 자락인 증취봉에서 삼천리 계곡 사이의 광범위한 지역에 있었다가 화재와 산사태로 사라졌다. 그 자리엔 지금 무너진 석축과 깨진 비석만 남아있지만, 한때는 진관동 일대가 옛 삼천사의 사전(寺田)이었는지도 모른다. 지금의 삼천사는 보물인 마애석가여래입상이 있는 자리로 옮겨온 것으로, 그 역사가 불과 100여 년이다.

계곡물이 차고 넘치는 여름날, 진관사로 들어가서 삼천사로 나오는 이 절길을 오래된 이야기와 함께 걸어보라. 마음을 깨끗이 씻어 버리는 것도 더위를 물리치는 또 다른 방법이니.

 

걷는길 : 진관사 - 비봉 - 사모바위 - 삼천사

거리와 시간 : 7km 정도, 3시간 30분 예상(휴식 시간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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