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공동체 법화림 덕현 스님

서울 길상사 일요법회… 주제: 존재의 근원

인간 존재의 근원에 대한 물음은 인류가 풀어야할 난제 중 하나다. 프랑스 대표화가 고갱(1848~1903) 역시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라는 작품을 통해 존재의 본질을 고민했다. 이후 우리는 흔히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물음을 던지지만 쉽게 답을 내리진 못한다. 그 답은 무엇일까? 수행공동체 법화림을 운영하는 덕현 스님은 5월 21일 서울 길상사 일요가족법회서 “‘나’라는 상을 버리고, 무엇이 나를 일으켰는지 돌아볼 때 무명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비심을 낼 수 있다”고 조언했다. 정리=박진형 수습기자

덕현 스님은… 1986년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1990년 법정 스님을 은사로 송광사서 출가했다. 그해 5월 송광사서 사미계를, 1994년 9월 범어사서 구족계를 수지했다. 길상사 6대 주지와 (사)맑고향기롭게 제2대 이사장을 역임했다. 현재 수행공동체 법화림을 운영하고 있다.

모든 존재가 살아가지만
각자 근원에 대해 몰라
‘나’라는 像 내려놓을 때
자연 섭리 느낄 수 있다

이 세상은 지금도 우리 주위에서 흘러갑니다. 그런데 각자 인생에서 내키지 않고 감당하기 어려웠던 일들이 아주 많았을 겁니다. 도대체 이 세상은 왜 이렇게 존재하고 흘러가고 있을까요? 그리고 우리는 왜 이 세상에 태어나서 감당하기 벅찬 시간들을 견디면서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을까요? 또 살면서 내가 원한 것이 뜻한 바대로 이뤄지고, 현실화된 것은 얼마나 될까요?

아마 대다수 사람들은 “반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많은 것들이 내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벌어졌고, 나를 실망시키고 좌절하게 하고, 어떤 때는 ‘이 삶을 그만 접고 싶다’ ‘다 버리고 떠나고 싶다’는 심경을 일으키기 충분했을 겁니다.

심리학자 크롬볼츠가 제창한 ‘계획된 우연이론’이란 것이 있더군요. 살아가는 것이 마치 우연적인 사건의 연속인 것처럼, 우리가 꿈꾸고 계획하고 설계한 것과는 다르게 벌어져 간다는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어떻게 하면 우리가 바라는 것을 이루고 우리다운 삶을 펼쳐낼 것인가가 이 이론의 주제입니다.

결론적으로 크롬볼츠는 우연적으로 벌어지는 일들을 잘 해석하고 뜻하지 않은 것들을 좋은 기회로 활용하는 것이 인생을 그나마 의미 있게, 또 뜻하는 바대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진지하고 적극적인 관심이나 호기심, 또 기다리는 마음, 참고 견디는 것, 뜻하지 않던 것들이 다가오고 벌어질 때 그것을 받아들이고 너그럽게 수용할 수 있는 융통성, 용기 있게 행동을 하는 위험감수능력 등이 살면서 벌어지는 우연적인 사건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끈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런 마음으로 삶을 살아갈 때 아무 질서도 없이, 방향도 없이 벌어져가고 있는 세상사를 내가 좋아하는 대로, 내가 바라는 대로 만들어가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 이론은 시사하는 바가 크고 불교적인 가르침과도 상통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
부처님은 많은 것들이 과거의 내가 행한 바에 의해서 마음이 일으키는 것이지만, 그것은 지금 내 주위의 상황이나 환경으로 펼쳐져 있는 것이고, 이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고 하셨습니다. 내 노력으로 선업을 쌓으면 지금 나한테 이런 저런 장애로 부딪혀 오는 것들을 차차 극복해 갈 수 있고 내가 바라는 편안함이나 행복을 조금씩 얻어갈 수 있다는 것이죠.

더 간명하게 이야기하면 이 모든 것은 내가 짓는 것도, 타자가 짓는 것도 아니고 그냥 우연만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이 모든 것들은 무엇이 하고 있는가. 우리 마음에서 인연 따라 벌어지는 일이기는 하되, 언제나 그 열쇠는 내가 쥐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마음으로 살아갈 때, 비로소 삶의 방향이 바르게 설정된 것이고 그때 내가 바르게 행동하고 실천하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죠.

우리는 모두 어딘가로 흘러가고 있죠. 그런데 어디로 가는지는 모릅니다. 이 ‘모른다’는 일이 사실은 우리가 어디로 흘러가야 하는지 혹은 우리의 존재가 무엇인지 밝히는 길잡이가 돼요. 부처님도 출가하셔서 깨닫고자 했던 일종의 화두가 ‘우리는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였죠.

최근 네팔에 다녀왔습니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데 중간에 어떤 젊은 여자가 타더라고요. 그 여자가 “당신은 강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아느냐”고 묻는 거예요. 제가 “당신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느냐”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굉장히 난감해 하더군요.

여러분은 어디서 오셨나요? 이렇게 묻는 순간 우리는 침묵에 빠집니다. 바로 이 마음이 우리가 온 자리에요. 그 빈 마음에서 우리가 온 것입니다. 이 마음은 물질이 아니고 눈에 보이지 않고, 잡히지도 않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공간에 속하는 것이 아니에요. 공간의 어디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자리라고 부르는 시공을 떠난 그 어디에요.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가 하고 묻기도 하지만 과연 이것이 무엇인가 하고 묻기도 합니다. 무엇이라고 하지만 보이거나 잡을 수 있거나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죠. 거기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굳이 설명을 하자면 공(空)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공이라는 것도 말일 뿐이지 어떻게 그것 자체가 되겠습니까. 사실은 우리가 살면서 정말 풀어야 할 숙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과연 본래 우리가 무엇이었는가. ‘나’가 되기 전에 무엇이었는가.’

저는 네팔에서 사흘 동안 포카라 시내에 묶여 있다가 다음날 바로 내려와야 했습니다. 사실 그곳에 간 이유는 2600여 년간 불교의 역사가 잘 이어져 오고 있는 한국의 불교를 네팔에 접목시키면 좋겠다 싶어서 ‘로치’에 승방을 짓기로 해서입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난제들을 이런 식으로 풀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카트만두로 가는 버스를 탔습니다. 이 버스는 오전 6시에 출발해 느리게 달리다가 카트만두 시내에 접어들기 직전 생활 폐기물 범벅인 도로변에 주차했습니다. 그런데 저쪽 가게에서 어떤 아이가 문설주에 다리를 올려놓고 아주 퇴폐적인 자세로 앉아서 저를 쳐다보는 거예요. 기분이 묘했는데, 어느 순간에 꼬맹이들이 자전거를 끌고 오더라고요. 알고 보니 그곳이 자전거 수리 센터였어요. 저를 쳐다보던 녀석의 얼굴이 환해지더니 연장을 들고 자전거를 1~2분 사이에 고쳐주더군요.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 그 자전거 수리공과 비슷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그때 했습니다. 자전거를 수리하려고 앉아있으면 많은 자전거들이 고장 나서 수리하러 오기를 바라겠죠. 자전거가 고장 난다는 우연찮은 사건은 자전거를 타던 아이들에게는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입니다. 그런데 조금 객관적으로 이 사건을 살펴보면 이것들이 다 계획된 우연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몸이 고장 나기도 하고 마음이 좋지 않은 병적인 상태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병원에 가면 의사는 당연히 내 몸을 고쳐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그렇게 요구할 자격이 있는지 생각해보면 그들을 위해 한 일이 없어요. 이건 온전히 빚지는 일이고 고마운 일이죠. 옷을 세탁해주는 사람, 청소해주는 사람, 학교에서 가르쳐주는 사람…. 그렇게 우리 삶은 여러 사람에 의해 도움을 받으면서 용기를 얻고, 또 일을 찾으면서 살아오게 된 것입니다.

모든 게 허상, 주체만 남는다
우리에게 행복을 준 것들을 보면 나만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고, 내가 그걸 받을만한 자격이 온전히 있던 것도 아니고 또 잠깐 있다가 가버린 것들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살면서 얻은 모든 것은 언젠가 우리를 버리고 다시 왔던 데로 돌아가 버립니다. 우리가 보고 듣고 경험하는 것이 이 삶이라고 해도 우리에게 온 모든 것은 다 스쳐갈 뿐 우리에게 남아있지 않습니다. 기억은 남아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이가 들면 점점 기억력도 떨어지고 어쩌면 치매를 겪을지도 모르죠. 지금 이 순간의 능력이 이렇게 있을 뿐이에요. 그렇게 무상을 자각했을 때 우리는 존재적으로 좌절하고 나아갈 길을 더 이상 한걸음도 뗄 수가 없습니다.

사실 부처님은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하고 의문을 제기한 것입니다. 그런데 답을 찾지 못한다면 결국 좌절할 수밖에 없겠죠. 부처님은 그 답을 발견하고 목적지에 섰습니다. 밖으로 찾아다니면 아무리 멀리 쏘다녀도, 우주선을 타고 나가도 그것을 찾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공간이 본래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공간은 우리 안에서 나온 것이에요. 우리가 이 공간보다 먼저라는 것입니다. 이 공간이 있고 그 속에 내 몸이 있고, 이 몸을 가지고 몇 십 년 살아간다는 것은 중생의 무지이고 크나큰 착각입니다. 사실 내가 어디서 왔는가 하는 질문을 따라 가보면 그것은 내 안이고, 내 참 존재이고, 나 자신이라는 것이에요. 결국 시간도, 공간도, 그 속에서 펼쳐져 나가는 우리 인생도 다 꿈같은 것이고 허상입니다. 그래서 ‘나’도 없습니다. ‘나’가 없기 때문에 남도 없고 내 안도 밖도 없습니다. 다만 그 속에서 살았던 주체는 오고 감 없이 불생불멸입니다. 그것을 부처님은 깨달으신 거고 그런 존재를 우리는 부처라고 합니다. 바로 이런 자각 위에서 여러분들이 이 세상을 다시 보아야 하고 순간순간을 살아나가기 시작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경계이고, 보살의 삶이고, 수행인이 마음을 펼치고 거두는 선의 도리입니다.

나를 놓아버리는 가장 좋은 길은 ‘나’가 무엇인가 제대로 보는 것입니다. ‘나’가 무엇인가 묻기보다는 ‘이것이 무엇인가’ 하고 묻는 거예요. 나라는 것은 이미 하나의 상이고, 이것 자체로 번뇌입니다. 더 깊이 들어가서 뿌리를 찾아내려면 ‘무엇이 나를 일으켰는가’ 혹은 ‘지금 이 순간에도 무엇이 보고 무엇이 듣고 무엇이 이 세상을 살고 있는가’ ‘무엇이 죽음을 향해서 이 시간을 지나고 있는가’ 이렇게 물어야한단 말이에요.

잘 보면 내가 보는 게 아니에요. 항상 내가 본다고 착각하잖아요. 알 수 없는 무엇이 보고 있어요. 그 무엇을 묻고 물으면서 나아가야 하고, 길 없는 길 끝에서 그것이 돼버려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자아가 무명을 완전히 깨뜨렸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모든 것이 나와 더불어 하나이고 모든 것이 다 내 마음이고 나와 더불어 조금도 다르지 않은 존재입니다. 이것을 불이(不二)라고 하죠. 그때 비로소 진정한 자비심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자연이라는 말 있잖아요. 스스로 그러하다. 이 모든 것들은 본래 다 그러하고 저절로 그렇게 돼갑니다. 나를 내려놓는 순간 진정한 ‘나’는 저 자연과 더불어 하나인 채로 온전히 빛나면서 제 일을 행할 것입니다. 그런 진정한 삶의 길로 여러분 모두를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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