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절강성 가흥현(浙江省 嘉興縣)에 화정(華亭)이라는 곳이 있는데 사람들이 나룻배를 타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뱃사공 노릇을 하면서 지낸 스님이 있었다. 스님은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뱃사공 형색으로 오가는 사람들을 배에 실어 강을 건네주기만 할 뿐이었다. 오랜 수행을 하고 깨달음을 얻은 도인이 오후보림(悟後保任)의 은둔기를 보냈는지 모를 일이지만 사람들은 그를 ‘화정 선자’(華亭船子)라 불렀다. 화정 선자에 대한 정확한 고증이 나타나지 않으나 여러 전등사(傳燈史)에 단편적으로 언급되어 있는 내용을 종합해 보면 법명은 덕성(德誠)으로 청원행사(靑原行思)계(系)의 법을 이은 약산유엄(藥山惟儼) 선사의 제자로 알려졌다. 그의 행적이 후세에 큰 감명을 남긴 것은 그가 쓴 절창(絶唱)의 선시 한 편 때문이다.

긴 낚싯줄 아래로 드리우니

한 물결이 일렁이자 수많은 물결이 잇따라 출렁인다. 

밤은 고요하고 물은 찬데 

고기가 물지 않아 

빈 배에 달빛만 가득 싣고 돌아오누나.

(千尺絲綸直下垂 一波?動萬波隨 夜靜水寒魚不食 滿船空在月明歸)

나중에 이 게송이 공안(公案)으로 채택돼 ‘덕성천척’(德誠千尺)이라 하였다. 〈선문염송설화〉에는 이 송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였다. ‘천척의 낚싯줄’이란 비단잉어(錦鱗)는 깊은 곳에 숨어 있기 때문에 반드시 천 자(尺)나 되는 낚싯줄을 드리워야 한다는 뜻을 제 1구가 가지고 있다 하였다. 고도의 상징적 은유로 ‘꼬리 붉은 비단 잉어’가 나오며, 이를 낚으려면 모름지기 천척의 낚싯줄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무위의 큰 교화를 가리키는 것이라 하였다. ‘한 물결이 일렁이자 수많은 물결이 잇따라 출렁이다’는 것은 낚시질로 인하여 물결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바람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물결이다. 이것은 한 생각이 일어나자마자 곧바로 오음(五陰)과 삼계(三界)가 갖추어져 생사의 물결이 그치지 않고 세차게 솟구친다는 뜻이다. 다음 ‘밤은 고요하고 물은 차고 고기가 물지 않았다’는 것은 제도할 중생이 하나도 없었다는 뜻이라고 하였다.

혹자는 이 게송의 낚으려 하는 물고기는 도를 비유한 것이라고 말한다. 〈오등회원〉에는 덕성의 또 다른 게송이 있다.

한 마리 물고기여! 너무 커서 손 쓸 수가 없구나.

모든 걸 포괄하니 참으로 기특하다.

변화에 능하여 바람, 우레 토해 내니

낚싯줄 드리운들 어떻게 낚으리오.

(有一魚兮偉莫栽 混融包納信寄哉 能變化吐風雷 下線何曾釣得來)

여기서 한 마리 큰 물고기는 도(道)의 광대함을 표현한 것이라 한다. 도는 없는 데가 없다. 불성이 온 우주에 두루 하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천지를 포괄하는 한 물건을 고기에 비유한 것이다.

숨어 은둔한 자취를 보여 준 화정 선자 덕성 스님도 그의 법이 ‘협산선회(夾山善會)’ 스님에게 이어진다. 협산 스님은 〈벽암록(碧巖錄)의 책 제목에 인용된 벽암이란 말을 써 오도송을 읊었던 사람이다.

“원숭이는 새끼를 안고 푸른 산 뒤로 돌아오고 새는 꽃을 물어다 푸른 바위 앞에 떨어트리네.”(猿抱兒歸靑?後 鳥啣花落碧巖前)

협산 스님이 도반이었던 도오(道吾) 스님의 권유에 의해 화정으로 덕성 스님을 찾아 갔다. 덕성 스님이 협산 스님을 보자마자 물었다.

“대덕은 어느 절에 머무르시오.” “절에 머물지 않고 머문다면 곧 같지 않습니다.” “같지 않다는 것은 무엇과 같지 않다는 것인가?” “눈앞에 보이는 법과 같지 않습니다.”

“한 언구의 합당한 말은 만겁에 나귀를 매는 말뚝이다. 천척(千尺)의 낚싯줄을 드리운 것은 깊은 연못의 바닥에 닿고자 함이다. 그대는 어떤가?”

협산 스님이 한참 생각하다 입을 벌리려 하자 노(櫓)로 때려 물속에 빠뜨렸다. 협산 스님이 겨우 배에 오르려 하자 또다시 “말해 봐”하고 노로 후려쳤다. 이때 협산 스님이 활연히 깨닫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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