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se
현대불교
상단여백
HOME 옛 연재 진원 스님의 ‘깨달음 찾는 <금강경>
본래 갖춘 마음이 바로 ‘부처’26. 금강경의 참 뜻

마조 선사가 말했습니다. “우리들에게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는 이 마음이 바로 부처이다. 일체의 생활 일상에서 움직이고, 머물고, 앉고, 눕는 가운데에서 대상으로 파악되는 모든 것은, 어느 것도 얻을 수 없는 그저 이름뿐인데, 진여(眞如) 또한 어느 이름에도 속하지 않지만 그렇다 하여 이름이 없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름이 없는 것도 없다’의 무무명(無無名)에 관해서 조사께서는 “어떻게 해서 이름이 없는 것을 그 이름으로 불러주고, 모양이 없는 것을 그 모양으로 알아볼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도가 도라는 이름 없이 그대로 머무는 자리는 과연 어디일까? 그러므로 지인(至人)은 네모에 머무를 때는 네모가 되고, 동그라미에 머무를 때는 동그라미가 되며, 하늘에 머무르면 하늘이 되고, 사람들 사이에 머무르면 사람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삼아승지겁(三阿僧祗劫)의 백천(百千)이나 되는 명호가 있는 것은, 때와 장소에 따라 이름을 세우기 때문입니다. 대상에 따라 그 색이 변하는 마니주(摩尼珠)와 같이 파란 색의 대상을 만나면 파랗게 되고, 노란 색의 대상을 만나면 노랗게 되지만, 그 본체는 아무런 색도 띄고 있지 않습니다. 손가락은 스스로 자신을 만질 수 없고, 칼은 스스로 자신을 자를 수 없으며, 거울은 스스로 자신을 비추어 볼 수 없듯이, 그때그때의 때와 장소라는 조건을 따라 나타나는 대상에 각기 서로 다른 이름을 붙여 주는 것입니다. 이 마음은 허공과 그 수명이 같아서 설령 육도를 끊임없이 윤회하여 각양각색의 형체로 바뀌어 태어나도, 그 마음만은 결코 생겨나지도 멸하지도 않고 불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중생은 자신의 마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문득 미혹한 마음을 일으켜 갖가지 업을 지어 그 과보를 받으며, 본성을 잃은 채 속세의 풍류에만 집착하고 있는 것입니다.

네모에 머물면 네모가 되고, 사람에 머물면 사람이 되며, 파란 색을 만나면 파랗게 되고, 눈에 있으면 본다고 하고, 귀에 있으면 듣는다고 하며, 코에 있으면 냄새를 맡고, 혀에 있으면 맛을 보며, 몸에 있으면 움직이고 감촉을 느낍니다. 손가락은 스스로 자신을 만질 수 없고, 칼은 스스로 자신을 자를 수 없으며, 거울은 스스로 자신을 비추어 볼 수 없는 것과 같이, 마음도 네모가 없으면 있을 수 없고, 파란 색이 없으면 있을 수 없으며, 손가락이 없으면 있을 수 없고, 눈이 없으면 마음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보는 눈과 보이는 모양이 마음이고, 듣는 귀와 들리는 소리가 마음이며, 코와 냄새가 마음이고, 혀와 맛이 마음이며, 몸과 촉감이 마음이고, 생각과 생각의 대상이 마음입니다.

이와 같이 일체가 오직 한 마음이지만, 우리들은 마음을 보면서도 마음을 못 보고, 마음을 듣고 있으면서도 마음을 듣지 못하며, 마음을 맡고 있으면서도 마음을 모르고, 마음을 맛보면서도 마음을 모르고 있으며, 마음을 느끼면서도 마음을 모르고, 마음을 생각하면서도 마음을 모르고 있습니다.

왜냐 하면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을 보고, 감촉을 느끼고, 생각을 할 때, 좋아하고 싫어하는 미혹한 분별심을 일으켜서 마음을 막고 있기 때문에 마음을 모르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에서는 “관자재보살이 색, 수, 상, 행, 식의 5온이 모두 공한 것을 비추어 보고 온갖 괴로움과 재앙을 건너니라. 사리자여, 물질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물질과 다르지 않아 물질이 곧 공이요 공이 곧 물질이니, 밭음과 생각과 의지작용과 의식도 또한 그러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모든 행위를 앎의 형식으로 축적하는 행위인 수, 상, 행, 식이 있다 없다, 옳다 그르다 하는 우리들의 잘못된 생각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끝〉

진원 스님  noduc@hyunbul.com

<저작권자 © 현대불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진원 스님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