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은 세상과의 소통 13

내면의 행위자·관찰자가
어떻게 만나느냐에 따라
자기 관리 결과 달라져
“에고 내려놓아야 빛난다”

요즈음 정부는 국무부 장관 임명에 따른 청문회로 진통을 겪고 있다. 여기서 필자가 관심을 갖는 것은 장관 내정자들이 보여주는 자신의 과거 행적에 대한 반응과 태도다. 대부분의 내정자들이 국회의원들의 질문에 ‘그런 일 없다’고 답변했다가 근거를 제시하면 ‘모른다’거나 ‘사과한다’고 대답한다. 그런데 그 중에서 법무부 장관 후보자였던 안경환의 고백은 이를 지켜보는 국민들을 혼란스럽게 한다. 그는 과거 신문 기고와 저서에 쓴 글에서 “음주운전, 운 좋게 적발되지는 않았지만 여러 차례 있었다”고 자신의 부끄러운 일을 고백했다.

이러한 고백은 국민들이 모르는 일인데 밝힘으로써 그가 ‘참 용기 있다’ ‘정직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는가 하면, ‘그런 잘못을 저질렀으니 장관으로서 자질이 없다’는 부정적인 측면도 있다. 문제는 그러한 고백을 지켜보는 국민들이 자신들의 삶에서 잘못된 과거를 밝히는 것이 올바른 건지 밝히지 말아야 올바른 건지 혼란이 일어난다는 점이다. 안경환의 고백은 진실을 밝힘으로써 인격적 성숙함을 인정받기보다 오히려 인격적 미숙함을 드러낸 격이 되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진실을 밝히면 오히려 부정적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려주었다(사실 이 글을 쓰는 중 안경환은 자진 사퇴했다).

고백으로 푸는 심적 부담
승가에는 안거를 마치고 마지막 날 서로 자기잘못을 뉘우치고 고백하는 자자고백(自恣告白)이 있다. 아마도 장기간의 수행을 통해 에고(ego)를 내려놓은 상태이니 자신에 대한 어떠한 비밀이나 아픔도 고백할 수 있는 힘이 생겼을 것이다. 스님들은 함께 수행한 도반들에게 고백을 하면서 더욱 가벼워진 마음으로 세상에 나오게 될 것이고, 그들에게 세상의 모든 것들은 극락으로 다가올 것이다. 고백을 하면 마음이 가벼워진다. 부끄러운 일이거나 잘못한 일들은 정서적으로 무거운 기운을 갖는다. 무거운 기운은 삶을 경쾌하게 하지 못하고 힘들게 한다. 그러므로 그 무거운 마음을 드러내면 가벼워진다. 비록 잘못은 없어지지 않지만 ‘잘못했습니다’라고 말을 하는 순간부터 무거운 기운이 밖으로 빠져 나오고 몸과 마음은 정화된다.

이 기회에 필자도 상대방의 고백을 들으면서 함께 삶의 기운이 가벼워졌던 경험을 소개하고자 한다. 몇 년 전 ‘비행청소년 예방을 위한 세미나 자료’를 준비하기 위해 상담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질문지를 처리하도록 요청했다. 그 학생 중에 M군이 컴퓨터를 잘 다루기 때문에 이 일의 책임을 맡겼다. 그리고 모두의 도움으로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나는 그 자료를 분석하여 세미나 원고를 작성하였으며 발표도 무사히 끝냈다. 이후 학생들과 힘들게 작업했던 일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지냈다.

몇 개월이 지난 뒤 나는 M군에게 다른 일 하나를 더 부탁하여 도움을 얻고자 하였다. 그런데 M군은 “저는 이미 다른 일이 계획되어 있어서 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 순간 다소 무안함을 느끼며 돌아섰다. 그러면서 M군이 나에게 뭔가 서운한 일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때는 그냥 넘어갔다. 그리고 그 후로 몇 번이나 M군과 마주치는 일이 있었으나 더 이상 부탁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았고, 왠지 마주 대하기 어색함을 느낄 수 있었다.

얼마 뒤 ‘동사섭 수련회’에서 나와 M군, 그리고 다른 학생이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 이틀이 지날 때까지 우리 세 사람은 가끔 프로그램을 통해 얻게 된 여러 가지 새로운 지식과 느낌들을 나누었고, 그러는 가운데 나는 M군이 언뜻언뜻 불편해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사흘째 되던 날 아침, M군은 어떤 이야기 가운데 문득 “교수님한테 서운한 게 있습니다”라고 말했고, 나는 그런 그의 마음을 받아 “그래, 나한테 서운한 게 있다고”라며 가볍게 넘겼다.

나흘째 저녁, ‘절 명상(상대방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큰절을 함)’에서 나는 그야말로 가장 존중하는 마음으로 M군에게 큰절을 세 번 하였다. 그리고 그를 껴안았다. 그 순간 M군은 눈물을 흘렸다. 나는 그의 아픔을 가슴으로 느끼며 정성을 다해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마지막이 되는 엿샛날 아침, M군은 약간 상기된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와 “교수님 실은 지난번 질문지 처리 후에 교수님이 세미나 발표를 하셨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다만 저에게 아무런 말씀이 없어서 서운하였고, 그래서 그 뒤 교수님이 다른 일을 부탁하셨을 때 일부러 거절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아차, 내가 이렇게도 어리석다니.’ 나는 그 순간 가슴이 뜨끔하고 부끄러워 M군의 얼굴을 바라보기가 민망스러웠다. 닷새 밤을 함께 지내고 나서야 비로소 M군은 나에게 속 깊은 마음을 보여주었다. 속마음을 꺼내기가 그렇게 어렵다. 그도 그렇게 마음을 꺼내는 게 힘들었지만, 나는 세미나 발표를 마치고 그 자료를 처리해준 M군에게 ‘덕분에 발표 잘 했어’라는 감사의 한마디도 못했다는 것에 대해 참으로 부끄러웠다. 나는 이러한 순간을 맞이하면서 기억할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나의 어떤 행위가 수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주었을 거라고 생각하니 가슴 밑바닥에 회한(悔恨)의 물결이 일었다.

있는 그대로 드러내자
앞에서 장관 내정자들의 ‘행적’을 얘기하면서 관심을 갖는 것은 ‘행적’이라는 단어가 중요한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이 단어의 의미는 한 개인이 남긴 발자취를 말한다. 눈 위에 사람이 지나가면 사람의 발자국, 소가 지나가면 소의 발자국, 차가 지나가면 바퀴 자국이 남는다. 안경환이 말한 “운 좋게 적발되지는 않았지만 여러 차례 있었다”는 말에서 한 번도 아니고 ‘여러 차례’라는 말이 단단한 발자국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이는 습관적인 음주운전이라는 의미를 갖게 한다. 그런 사람이 장관이 되든 안 되든 살면서 또 음주 운전을 자신도 모르게 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습관은 자신도 모르게 하게 되는 행동이다. 몇 년 전에 어느 교회의 목사가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적이 있다. 그때 목사의 행적을 보면 목사가 되기 전에 성폭행한 전력이 있는데, 스스로 그러한 행위에서 벗어나고자 작심하고 목사가 되었다고 했다. 적어도 목회 일을 하는 한 그런 욕망을 조절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욕망을 조절하지 못했고 자신도 모르게 성폭행을 저지르고 말았다. 본인이 생각해도 자신이 얼마나 한심스러웠을까. 본인은 의식적으로 개과천선(改過遷善)하겠다고 다짐했지만 무의식에서는 그 욕망이 들끓고 있었고 그는 이를 어찌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자자고백은 자기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데 깊은 의미가 있다. 내 안에 무거운 것이 있든, 탐욕이 있든 그것을 드러내어야 삶이 가벼워진다. 생리적이든 심리적이든 내 안에 무언가가 들어있어서 나를 불편하게 한다면 그것을 내어 놓고 가볍게 살아갈 필요가 있다. 마치 용변을 봐야 하는데 보지 못하고 간직한 채로 비행기나 버스를 탔다고 가정해 보자. 볼 일을 봐야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이므로 옆 사람과 얘기를 나누거나 책을 보거나 창밖을 보더라도 어느 것 하나 집중할 수가 없다. 심리학에서는 이처럼 시급한 과제를 전경(前景, figure)이라고 하는데, 매순간 우리 의식의 초점이 되는 것을 말한다.

건강한 개인은 전경으로 떠오른 과제를 해소하고 새로운 전경을 맞이하지만 전경이 해소되지 않으면 그것은 미해결 과제로 남아 새로운 전경을 맞이하는 데 방해를 한다. 그리고 해소되지 않은 전경을 해소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에너지를 사용해야 하므로 결국은 자신의 삶이 고갈되고 만다.

앞의 사례에서 우리는 M군이 자신의 아픈 마음을 나타내기까지 많은 시일이 걸렸음을 볼 수 있었다. 마음공부를 하는 집단 활동에서 M군은 조금씩 자신의 마음을 볼 수 있게 되고, 나와의 친밀감이 형성되면서 점차 자신을 노출할 힘이 생겨난 것이다. 다행히 나는 M군과 같은 방을 사용하며 자주 만날 수 있어서 마음을 나눌 수 있었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M군의 아픈 마음을 알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어리석음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인간의 내면에는 두 사람이 존재한다. 한 사람은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행위자로서 존재하고, 다른 한 사람은 그러한 행위자를 끊임없이 바라보는 의식이라고 하는 관찰자로서 존재한다. 행위자는 끊임없이 생각하고, 느끼며, 무언가를 실행에 옮기는 일을 한다. 그러면 다른 한 사람인 관찰자는 행위자가 하는 일을 관찰하면서 상황에 적절하면 그 일을 지속하고, 부적절하면 상황에 맞도록 조절하거나 멈춘다. 이 두 사람은 함께 할 때만이 온전한 자신의 모습으로 존재한다.

살면서 자기를 잘 관리한다는 것은 바로 행위자와 관찰자가 어떻게 만나느냐에 달려있다. 자기 자신이 잘 관리되어야 자기를 넘어 세상과의 관계를 잘 맺을 수 있고, 세상과의 관계가 잘 되어야 비로소 자신의 일(역할)도 잘할 수 있다. 안경환의 경우 음주 운전이나 상대여성 몰래 혼인 신고한 사실을 본인이 모를 리 없건마는 자신이 한 행위를 올바르게 통찰하지 못함으로써 마음의 관리는 물론 관계관리, 일 관리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다행히 자진 사퇴함으로써 자신의 운명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은 막을 수 있었지만 이 과정에서 보여준 그의 낮은 의식과 탐욕은 우리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준다. 자기성취에 대한 욕망이나 세상에 대한 욕망은 균형을 이룰 때 아름답다. 그보다 아름다운 모습은 자자고백으로 에고를 내려놓을 때 더욱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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