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현 전북대 명예교수

대한불교진흥원 화요열린강좌… ‘퇴계 정신을 말하다’

불교에서는 이 세계를 ‘인드라망’으로 표현한다. 모든 존재가 하나의 그물로 얽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의 사소한 행위 하나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하지만 일련에 벌어지는 사건사고 소식은 ‘주의’를 무색하게 한다. 무엇이 문제일까. 김기현 전북대 명예교수는 6월 20일 대한불교진흥원 화요열린강좌서 ‘퇴계 정신’을 주제로 강연했다. 그는 퇴계의 사상 중 ‘개방적 생명정신’을 강조하며 “잠재적인 도덕정신을 일깨우기 위해 끊임없이 수양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정리=윤호섭 기자

김기현 명예교수는… 서울대 법과대학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고려대 대학원에서 동양철학으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플로리다 주립대 방문교수(1995~1996), 전북대 대학원장(2010~2012), 전북대 사범대학 윤리교육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동 대학 명예교수로 있다. 주요 저서로 〈조선유학의 학파들〉 〈선비〉 〈선비의 수양학〉 등이 있고, 〈주자서절요를 통해 본 퇴계의 학문정신〉 등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다.

사회서 얻은 다양한 이름
자신의 정체성 되지 못해
미물까지 확장한 利他정신
끊임없는 수양으로 가꿔야


직함은 나의 본질이 아니다
강연 요청을 받고, 퇴계의 사상을 어느 방향으로 풀어 나가야할지 많이 고민했습니다. 퇴계에 대한 얘기는 그 범위가 굉장히 넓기 때문이죠. 그래서 오늘은 극히 일부분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주제는 바로 ‘퇴계의 자아의식과 삶의 정신’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어떤 삶을 살든 이 질문을 던지는 데서 삶이 시작됩니다. 나 자신을 향해 던지는 질문이죠. 모든 분들이 자신의 문제로 고민할 수 있는 주제입니다.

누군가 여러분에게 “당신은 누구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저라면 “나 김기현이오”라고 답하겠죠. 그런데 태어날 때 부모로부터 받은 이름이 날 알려주는 것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명함에 찍힌 직함이나 신분, 어느 소속집단의 일원 등은 나의 정체성을 밝혀주거나 본질을 드러내주지 않습니다.

퇴직자의 경우 ‘갑자기 쉽게 늙는다’고들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쩌면 그분은 여태껏 자신의 존재를 어느 조직의 일원으로 자각해왔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리고 그 자각이 어느 순간 끊어져버리니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마주하게 됐을지도 모릅니다. 자칫 허무나 존재의 상실감에 빠져버릴 수도 있습니다.

존재론적 관점에서 본다면 ‘부장’ ‘과장’ 등 직함은 사물에 불과합니다. 영어로는 ‘it’이라고 표현하죠. 나의 존재를 표명하고 정체성을 확인하는데 사물을 들이대는 건 스스로를 사물화 하는 것과 같습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인류가 영원히 풀 수 없는 숙제이기도 합니다. 소크라테스가 ‘자신을 알라’고 했고, 부처·공자·예수 등 모든 성인들이 통찰했다고 하지만 우리는 처음부터 다시 질문해야 합니다. 성인들의 답변으로 쉽게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죠.

그래서 우리는 지금까지 수많은 인간관계와 사회생활 속에서 형성돼온 모든 나의 모습, 불교에서 말하는 아상(我相)을 지워야 합니다. ‘선생’ ‘학생’ ‘남편’ ‘부인’ ‘사장’ 등 나라고 생각해왔던 것들을 지워보세요. 그러면 마지막에 뭐가 남을까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겁니다. 불교의 공의 세계로 진입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쯤되면 그저 ‘내가 존재한다’는 것 말고는 설명이 안 됩니다. 사유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면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신비감 속에서 존재의 근원을 묻게 됩니다. 광활한 우주 속에 내가 존재하고,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이러한 형이상학적 물음은 나뿐만이 아니라 만물로 확대될 수 있습니다. 개 한 마리, 풀 한 포기까지도 말이죠.

퇴계 역시 이와 비슷한 사유를 했습니다. 벼슬생활을 통한 각종 직함이 덧없는 것임을 뼈저리게 느끼죠. 마치 이를 허공 속 연기 같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명예를 ‘파리 떼’에 비유했는데요. 파리 떼는 먹을 것이 없으면 다 날아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퇴계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이름을 지워버리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이런 이름이라는 것은 나의 존재를 왜곡시키는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어르신들이 ‘할아버지’ ‘할머니’라는 표현을 싫어하는 이유는 스스로 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즉 이 표현이 나의 존재를 왜곡시킨다고 느끼는 겁니다. 퇴계는 이런 언어표현의 폭력성까지도 인지했습니다.

만물의 존재근원은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에 따라 삶의 방식이 달라집니다. 존재근원을 절대자라고 한다면, 그는 절대자를 닮아 살려고 할 겁니다. 이와 달리 생명의 기원을 원시 유기물에서 찾았던 다윈에 따르면 진화된 원숭이밖에 안 되겠죠.

퇴계는 존재근원을 하늘에서 찾았습니다. 하늘의 소명이요. 오늘날 아스팔트 위에서 살아가면서 체감하긴 어렵겠죠. 산속에 들어가 옛 방식으로 산다면 가능한 일입니다. 퇴계는 땅이 부응하고 계절의 변화가 느껴지는 신비함 등 자연의 섭리에 귀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만물은 이런 하늘의 소명을 타고났다고 여겼습니다.

‘월인천강지곡’이 이를 잘 설명해주는 표현입니다. ‘달이 1천개의 강에 도장처럼 찍혔다’는 뜻이죠. 즉 강의 크기에 따라, 물결에 따라 달 모양이 달라지고 이는 만물이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존재근원인 하늘을 만물이 제각각의 형식 속에서 다양하게 받아들이게 되고, 결국 천차만별의 특성을 갖게 됩니다.

참자아 실천해야 하는 이유
퇴계에 의하면 인간은 하늘의 소명을 경건히 읽어 참자아를 실천해야 합니다. 여기서 자아와 참자아는 구별되는데요. 자아계발 등과 같은 세속적인 자아와 하늘로부터 타고난 참자아를 의미합니다.

맹자는 벼슬에 천작(天爵)과 인작(人爵)이 있다고 했습니다. 장관 같이 사람들끼리 주고받는 벼슬은 덧없는 것이고, 하늘이 내린 사랑과 의로움 같은 천작은 인간 고유의 본질이어서 주거나 빼앗을 수 없는 것이죠. 그래서 퇴계는 세속이 만들어낸 비본래적 자아의 모습에 거부감을 갖게 됩니다. 하늘의 소명과 거리가 멀기 때문인데요. 어쩌면 하늘이 준 벼슬을 버리고 사람이 준 벼슬만을 추구하는 건 사람 되기를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초목금수와 달리 인간이 고유하게 타고나는 소명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참자아는 또 무엇일까요. 생명론적 관점에서 초목금수는 자연으로부터 타고났지만 생명을 자기 안에 가둬 폐쇄적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물론 동물은 새끼를 낳고, 무리와 살며 조금 열려 있다곤 하지만 부분적입니다. 이에 반해 인간은 자연의 생명정신을 개방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났습니다. 바로 이타(利他) 정신입니다. 자식뿐만 아니라 인류 모두에게, 나아가 미물에 대해서까지도 가질 수 있는게 이타 정신입니다.

인간의 개방적 생명정신은 도덕정신의 다른 말이기도 합니다. 몇몇 사소한 예절이나 윤리규범을 두고 한 말이 아닙니다. 퇴계가 생각한 도덕은 만물을 위해 나의 온 존재를 기울이려는 노력이 담겨 있습니다. 도덕성은 이러한 정신능력을 타고났음을 표명하는 겁니다.

중국 북송의 유학자인 주렴계가 자신의 제자가 찾아왔을 때 일입니다. 정원에 풀이 가득한 모습을 보고 제자가 “왜 베지 않으시느냐”고 물으니 주렴계는 “그것도 나와 생명을 같이 했다”고 답했습니다. 퇴계는 여기에 사랑의 본질이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제가 대학교수로서 강의를 들어갔을 때도 주렴계의 일화를 활용한 적이 있습니다. 캠퍼스 정원을 가꾸시는 분들이 예초기를 돌리며 풀을 다 베어놨을 때인데요. 강의에 들어가자마자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풀냄새가 어떤지 말이죠. 그러자 한 학생이 대뜸 “싱겁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학생에게 “혹시 풀 피비린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느냐”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 학생은 입을 닫더니 기말시험을 볼 때 답안지 말미에 “자신은 그때의 충격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라고 적었습니다. 바로 이런 풀 한포기에 대한 마음, 사랑입니다.

어느 날 동료교수와 산책을 나가는데 그가 보도블럭 위에 먼지에 뒤덮인 지렁이를 집어 촉촉한 풀숲으로 옮겨줬습니다. 이것도 역시 사랑입니다. 보는 순간 자신도 먼지에 쌓인 듯한 생명의 위기감을 느꼈을 겁니다.

맹자는 만물이 나의 존재 안에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내 밖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죠. 아마 불교에서 말하는 인드라망과 같은 뜻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퇴계는 모든 존재가 우주적 존재라고 생각했고, 이것이 나로 하여금 도덕적 요구를 일어나게 한다고 봤습니다. 결국 만물이 내 안에 갖춰져 있고, 그에게서 나도 같은 것을 느끼는 것이죠. 안타깝게도 일상생활 속에서 이기심에 의해 무뎌질 수 있는데 그렇다고 아주 없어지지는 않는 것으로 퇴계는 판단했습니다.

이 같은 생명정신의 개폐여부가 사람됨의 차이를 결정합니다. 성선(性善)의 의미가 여기서 드러납니다. 나의 생명을 내어 남을 보듬어 안고, 보살펴주는 사랑 정신은 사람들에게 기쁨과 감동을 주기 때문에 훌륭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선설은 인간이 이런 심성을 천부적으로 타고났다고 보는 것이죠.

나만을 위해 사는 건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이걸 악이라고 합니다. 악은 자폐적인 생명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입니다. 혹자는 이런 질문을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에 따르면 인간은 이기적 유전자를 타고난 게 아니냐고 말이죠. 그런데 어느 책에 따르면 어느 서양학자가 도킨스에게 문제를 제기합니다. 그러자 도킨스는 “책을 쓰고 난 뒤 생각을 바꿨다. 인간은 이기적 유전자가 아닌 협력적 유전자를 타고났다는 게 맞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서로 도우면서 살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걸 인정한 것이죠.

도덕정신은 잠재적인 것이고, 사람들의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남을 향해 개방하느냐, 나를 위해 폐쇄하느냐는 전적으로 개인 몫입니다. 우리는 ‘사람이 되어가는 존재’이니까요. 처음부터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됨’이라는 표현은 끊임없이 되어가는 존재라는 걸 말합니다. 퇴계가 수양의 노력을 그토록 중시한 까닭이기도 하죠.

오늘날 우리는 ‘소유하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소유에서 자기 존재를 찾는 것이죠. 이런 잘못된 인간관을 수양을 통해 가꿔 나가야 합니다. 단순히 좌선하듯이 되는 일이 아닙니다. 밥 먹고 출근하고 일상생활 모든 자리가 수양의 도량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사람됨은 바로 거기에서, 나와 남과의 관계 속에서 태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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