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실상을 보는 법

유건 스님이 어느 날, 법당 뒤에서 좌선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본 마조 선사는 유건 스님의 귀에다 대고 ‘휴우’ 하고 입김을 두 번 내뿜었습니다. 유건 스님은 선정에서 깨어나 선사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선정에 들었습니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선사는 곧 시자를 시켜 유건 스님에게 차 한 잔을 가져다주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유건 스님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휙 일어나더니 곧장 그의 방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마조 선사가 내뿜은 두 번의 숨으로 선정에서 깨어난 유건 스님은 선사의 한숨이 수행의 과정임을 알고 다시 선정에 들었으나, 시자를 통해 보내온 차 한 잔을 보고 급히 방으로 돌아간 것은 좌선이 결코 치하와 보답의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한 것으로, 유건 스님은 마조 선사의 심중을 이미 간파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일으키는 한숨은 부처님의 뜻을 깨닫는 길잡이가 되어 수보리 존자처럼 감격의 눈물을 흘릴 때가 반드시 올 것입니다.

“참으로 희유하시옵니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심히 깊은 경전을 말씀하시는 것을 제가 예로부터 오면서 얻은바 지혜의 눈으로는 일찍이 이와 같은 경을 얻어 듣지 못하였나이다. 세존이시여, 만일 어떤 사람이 이 경을 얻어 듣고 신심이 청정하면 곧 실상이 생긴 것이오니, 이 사람은 마땅히 제일 희유한 공덕을 성취한 것임을 알겠나이다.”

이와 같이 심히 깊은 이 경전을 말씀하시는 것을 예로부터 오면서 듣지 못하였고 수보리 존자가 지닌 지혜의 눈으로도 알지 못했는데, 이제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신심(信心)이 청정하여 감격의 눈물을 흘린 이 마음을 곧 실다운 상(實相)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실상이 생긴 사람의 공덕은 삼천대천세계에 칠보를 쌓아놓고 남을 위해 보시한 사람의 공덕보다 더없이 뛰어나고 희유한 공덕을 성취한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 실다운 상이라는 것은 곧 상이 아니오니 여래께서는 이름이 실다운 상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모든 분별망념을 여읨으로 신심이 청정한 것을 실다운 상이라고 하여, 실다운 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분별망념을 여읜 것을 무엇인가 문자로 나타내려 하다 보니 실다운 상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실다운 상이라는 것이 있다고 하여 애착한다면 이는 허망한 상이므로, 실다운 상을 애착하지 않으면 실상이라는 것이 곧 실상이 아니고 이름이 실상인 것입니다. 그래서 실상이라는 이름은 마음의 별칭으로 이와 같이 바르게 보아야 합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이와 같은 경전을 얻어 듣고 알고 받아 지니는 것은 어렵지 않사오나 만일 이 다음 세상 이천 오백년(후오백세) 뒤에 어떤 중생이 이 경을 얻어 듣고 믿어 이해하여 받아 지닌다면 이 사람은 제일 희유한 사람이옵니다.”

이 다음 세상 이천 오백년 뒤 우리들 중에 누가 있어 이 경을 얻어 듣고 믿으며 마음으로 행한다면, 그는 삼계의 28천(天) 가운데서 가장 높은 무색계(無色界)의 경계에 머물고 있으며, 보살 10지(地)에 해당하는 보살 성인(聖人)이므로 참으로 희유한 사람입니다.

“왜 그러냐 하오면 이 사람은 ‘나라는 상’도 없고 ‘남이라는 상’도 없고‘중생이라는 상’도 없고 ‘오래 산다는 상’도 없는 까닭이옵니다. 왜냐 하오면 나라는 상이 곧 상이 아니오며, 남이라는 상, 중생이라는 상, 오래 산다는 상이 곧 상이 아니옵니다.”

지금 부처가 있는 것이 아니다 함은, 부처가 없다는 것이 아니고 부처를 좋아하고 싫어하는 생각, 즉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름이 부처이다 함은, 부처는 생각과 마음으로 인하여 있으므로 부처는 마음의 별칭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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