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운하고 아름답게 마무리 준비하자

소중한 인연들

만남은 설렘이지만 헤어짐은 아쉬움이다. 만남은 날아서 오지만 헤어짐은 기어서 간다. 만남은 무지개 빛으로 다가오지만 헤어짐은 안개비를 뿌리며 더디게 간다. 만남은 소중한 인연이지만 헤어짐은 더욱 소중하게 마무리해야한다.

옷깃 스치는 것도 인연이라지만 만남은 끌어당김이고 헤어짐은 밀어내기의 법칙으로 동전의 앞, 뒤나 그림이 같지 않다. 만남은 느낌의 배려에서 비롯되지만 헤어짐은 확인 사살처럼 감정의 막 내림으로 마무리된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누구나 천 번의 만남과 만 번의 헤어짐 속에서 철이 들고 늙으며 병들어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숱하게 겪으며 윤회하는 만남과 헤어짐에 서툴고 어색하며 같은 몸짓으로 실수를 반복하는 것이다.

우선은 남의 밥 콩이 굵게 보이는 중생심에서 자유롭지 못하여 눈높이만큼 세상이 보이고 보인만큼 알아차리며 즐거움과 노여움 슬픔과 즐거움의 쳇바퀴를 쉴 틈 없이 돌고 있는 다람쥐가 되는 것이다. 더러는 장닭처럼 허세를 부리며 깃털을 세우며 거드름을 피우고 똥개처럼 아무에게나 짖어대며 경계하듯 탐색전을 즐기지만 만남과 헤어짐 뒤엔 남는 것은 허무의 그림자 같은 빈 손 뿐인 것이다. 때 늦은 후회도 삶의 뒤안길에서 되돌아보면 가벼운 나의 말과 행동이 지는 낙엽처럼 마른버짐처럼 싸하게 가슴 깊이 번지는 것을 느낄 터이다.

세월이 흐르면 무엇이 남는지 곰곰이 생각해보면 남는 것은 빈손, 빈손의 허무뿐이다. 일생을 가꾼 마음의 영토에서 추억의 줄기처럼 타작해보면 알곡은 몇 알이 안 되고 검불떼기 뿐인 안쓰러움이 후회로 남는 법이다. 검불더미 속에서 외톨이의 삶을 분해해보지만 흔들리는 어금니처럼 달아난 젊음이 두어 방울의 눈물로 남을 터이다.

젊은 시절 글짓기를 즐기던 나는 오현·정휴·성우·지현 스님 등과 ‘승려시인회’를 만들어 동인지도 발간하고 분주한 몸짓으로 뻐기며 살았다.

나이 들어 죽음의 문턱에서 떠날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요즈음, 오현 스님은 설악산의 산신령으로, 정휴 스님은 천하제일의 자유인으로, 성우 스님은 종단의 전계사이자 BTN불교TV 회장으로, 지현 스님은 번역 대가(大家)의 선지식으로 색깔을 달리하며 까마득히 멀리 있다.

요즘은 지리산의 용타 스님과 영산 스님, 도법 스님, 그리고 숨은 도인 광재 스님과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며 붉은 노을로 살고 있다.

한때는 오현 스님과 정휴 스님, 나는 셋이서 ‘고행자 수첩’이란 책을 함께 펴내며 걸레스님 중광과 잡설(雜說)을 즐기며 더러는 살아있는 전설 속의 몸짓으로 여행 아닌 여행을 즐겼었다.

중광 스님은 천재 화가답게 선배로서 죽음도 먼저 맞이했지만 10권의 책으로도 부족할 그의 자유분방함은 세월이 흐를수록 전설로 남을 터이다.

오현 스님과 정휴 스님과의 첫 만남도 지극히 소설적인 살아있는 전설이다. 계림사로 오현 스님을 찾아갔을 때 오현 스님은 누워있는 자연스런 몸짓으로 나를 보며 팔뚝 굵어 시(詩)쓰는 일보다 가스나 섬기는 일이 제격이라며 호탕하게 웃었고, 불국사 강사인 정휴 스님을 처음 만나 함께 잠을 자는데 정휴 스님은 문구멍으로 볼일을 봐 나의 기차표 하얀 운동화가 흥건히 젖어있던 일도 어제 같다.

몇 년 전부터 늙은이들이 도반 모임으로 가끔씩 만나고 있다. 통도사의 혜남 스님이 사자암에 와서 두어 차례 밤을 밝히며 대화 나누며 도담(道談)을 즐겼는데 혜남 스님은 몸으로 설법하는 스님다운 스님으로 좋은 도반으로 꼽힌다. 늙어갈수록 허울의 옷을 벗고 순수하게 진솔한 삶을 몸으로 보여야 참 스승이고 착한 벗인 것이다.

맑고 밝은 모습으로 개운하게 떳떳하고 당당하게 누가 무엇을 물어도 머뭇거리거나 망설임 없이 진리를 드러내 보일 수 있는 힘이 진정한 의미의 힘인 것이다. 있는 듯이 없는 듯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자연에 순응하며 드러내고 감출 것 없이 살아야 인생 마무리의 삶인 것이다. 만남도 소중하지만 헤어짐에 방점을 찍어 개운하고 아름답게 마무리를 준비하며 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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