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여기 오지 않았다고 해서 없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내가 이 세상에 나와서 이 세상을 알고,

이 세상을 들이고 내고 하고 가는 이 자체가

바로 내 주인공이 하는 거라고 생각하세요.

 

(지난 호에 이어서)

그러니까 아무도 모르게 그렇게 한다 하더라도 그 사람하고 나하고는 알기 때문에 법계에서 알고 있는 거예요. 이것은 이 한 사람만 알고 있는 게 아니라 의식들이, 수십억 개의 의식들이 알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깐 아무도 모르게 해도, 아무도 모르게 조건 없이 그 좋은 일을 한다 하면, 바로 내가 좋은 일을 하는 게 아닙니다, 또. 나는 심부름꾼으로서 그 사람의 거를 그 사람으로 돌려서 어떡하면 잘 써 주나 이거지 내가 좋은 일을 한 게 아닙니다.

그걸 잘 들으세요. 심부름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너도 나도 둘이 아닌 까닭에 다 서로가 공덕이 될 것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그것을 어떻게 요렇다 조렇다 말로 형용을 할 수 있겠습니까? 난 사실 돈이 그립거나 그래 본 예가 한 번도 없습니다. 일 푼어치도 없습니다. 그 많은 돈을 그렇게 저거 했어도, 어떤 때는 신도들이 가져오는 것도 그 집 봐서 거기서 삼만 원이면 삼만 원, 만 원이면 만 원 딱 꺼내고선 도로 줍니다. “네가 잘 살아야 나도 마음이 편안하니까 말이야.” 하고 주고 빚을 얻어 가지고 온 거라면 빚 갚으라고 도로 줍니다. 그리고 그 위에 더 붙여 줍니다. 왜냐?

사람이 아주 없을 때는, 하다못해 여기 돈으로 따진다면 100불, 100불이라도 어디서 나왔다 하면 그것이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는 겁니다. 먹지 못하고 있다가 그걸 가지고서 먹을 걸 사다가 오손도손 식구들이 앉아서 먹을 때 얼마나 한숨이 훅 나가겠습니까. 이 모두가 상대방의 그 어려움을 내 어려움같이 생각하고, 내 아픔같이 생각하고 그렇게 부드럽게 해 나갈 수 있다면 남을 원망 안 합니다. 어떠한 일이 와도 남을 원망 안 합니다. 왜냐?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탓이니까. 잘했든 못했든 말입니다. 이 세상에 내가 태어났기 때문에 부딪침이 있고 말 상대가 있고 인연이 돼 있는 거지, 내가 없는데 아무것도 없는 거지 뭐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모든 것을 내 탓으로 돌린다면 그것이 나중엔, 여러분이 실험해 보시면 알 겁니다. 내 탓으로 돌려서 잘못되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내 탓으로 돌리니까 그쪽에서 잘못했다고 사과를 하러 오고 외려 더 친절해졌다는 사람들이 하고많습니다. 이 건건이 살아나가는 데에 인연에 따라서 모든 게 돌아가지 않는 게 하나도 없으니까. 한 가정도 그렇고 말입니다.

내가 이런 말 저런 말 왜 하느냐 하면 모든 게 그 살림살이에서, 모두 그 마음에서 빚어지는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도 빼놓지 말고 ‘내가 이 세상에 나와서 이 세상을 알고, 이 세상을 들이고 내고 하고 가는 이 자체가 바로 내 주인공이 하는 거로구나.’ 이렇게 생각을, 아예 몽땅 줘서 생각을 해 버리라는 얘깁니다. 여러분, 생명이 없으면 송장이죠? 생각이 없다면 목석이죠? 육신이 없다면 무효죠? 삼합이 같이 돌아가면서 작용을 하니까, 이것이 바로 주인공의 원리란 말입니다.

나만 또 여직껏 얘기했네요. 하여튼 질문하십시오.

 

질문자1(남) 이렇게 또 한 말씀 해 주시려고 먼 길을 와 주셔서, 정말 뭐라고 감사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선원에 나온 지도 얼마 안 되고 아는 것도 없고 그래서 또 여러 가지 참 궁금한 것도 많습니다. 질문이 좀 유치하더라도….

큰스님 아뇨, 유치한 건 하나도 없어요. 이 세상에 유치한 게 어디 하나라도 있겠습니까.

질문자1(남) 널리 이해해 주시고 들어 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스님 법문을 듣다 보니까 동물을 피치 못한 일로 죽였을 때 자기 한마음에 거둬들이면 그 동물이 다시 사람으로서 자기 마음속에 환생이 된다는 그런 말씀을 하셨고, 또 한편으로는 사람이 죽으면 천도를, 자기 갈 길을 가라고 천도를 하는데 제 의문은 동물이고 사람이고 간에 스님 같으신 분께서 한마음으로 다 들일 수가 있을 텐데 왜 제 갈 길 가게 하는지 그 점이 첫째 질문이고요.

큰스님 그런데 이것이 법원에 가면 십 년을 받고 무기징역을 받고 이런 사람들 있죠? 그런데 그분은 딴 검사가 다 해 놓은 거란 말입니다. 그렇죠? 새로이 검사나 판사가 들어가서 해결할 일이 못 되죠. 그와 같습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만약에 소가 지나가는데 도살장으로 끌려간다 합시다. 그런다면 그거는 누구도 개입한 예가 없단 말입니다. 누구도 개입한 게 안 되죠. 그렇기 때문에 얼른 쉽게 말해서 그냥 그 즉시 나로 하나로 집어넣는다면, 그러면 거기 들어가기 이전에 벌써 사람으로 환생이 된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소는 도살장에 가서 맞아도 아픈 줄을 모릅니다, 안락사처럼. 아픈 줄을 모르고 무명을 벗습니다. 그럼 됐습니까?

그리고 천도도 그렇습니다. 생전에 살면서 이 도리를 모르는 사람은 내 몸속에 들어 있는 그 악업 선업의 그림자에 밟혀서 한 발짝도 나갈 수가 없습니다. 아까 얘기했지만 부부지간이나 자식지간, 동료, 그 모두 동구 바깥에서 인사를 하고 갑니다마는 그 악업 선업의 그림자는 떠나질 않습니다. 자기 영혼에 딱 붙어서 그냥…. 그러니까 그 의식들에 묻혀서 한 발짝도 떼어 놓을 수가 없으니까, 이 도리를 모르니까 자기가 체가 있는 줄 알아요. 자기가 환상인 줄 모르고 이 체가 있는 줄 알고 그냥 한 발짝도 벗어날 수가 없는 거죠. 그런데 어떡하다가 벗어났다 하더라도 강을 건너가야 하는데 빠져 죽을까 봐 못 건너갑니다. 내 이 몸뚱이가 있는 줄 알았거든요. 지금 살아서 없는 줄 아셔야 합니다, 하하하. 그런데 그렇지 못해서 죽어도 있는 줄 알기 때문에 배가 올 때를 기다리고 거니는 겁니다. 불바퀴를 넘어서야 할 텐데 타 죽을까 봐 못 들고요. 그러니 세 조건이 다 없는 겁니다, 아주. 그러니 천도가 생긴 겁니다. 눈 뜬 사람을 통하고 귀 뜬 사람을 통해서, 그런 사람의 길잡이를 통해서 말입니다.

지금도 각 절에서, 원효 대사가 사자 새끼가 죽었는데 거기다 대고 목탁을 치고 염불을 하니까 대안 대사가 “허, 그렇게 염불을 해서 천도가 될 건가?” 그러고 그 바가지에 얻어 온 젖을 사자 새끼에게 끌어다가 먹였단 말입니다. 그것을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지금도 어느 사찰이든, 사찰뿐만 아닙니다. 어느 종교, 티베트 불교든지 일본 불교든지 한국 불교든지 모두 이게 기복으로 하는 데는, 부처님이 이렇게 이렇게 하라는 대로 그냥 하다 보니까, 그것도 그대로나 하나요? 제대로 그대로 못하는 점들이 많죠.

그런데 제가 생각할 때는요, 중들이 마음이 넓어야 천도를 시키는 그 영혼도 들어와서 중의 마음과 같이 동시에 알아짐으로써 이 시야가 넓어지는 겁니다. 그런데 중들이 요만한 교자상에다 크게 잘 차려 놓고 이렇게 할 때 그 중들이 이렇게 잘 차리고 한다는 것만 알았지 우주의 섭류의 그 모든 문이 여여하게 열린 줄은 모르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중들이 마음이 얼마큼 넓으냐에 따라서, 하다못해 찹쌀떡 하나 갖다 놓고 제사를 지내도 이 세상 전부 그 영혼의 거니까, 그 세상 모든 중생들을 다 먹이고도, 모든 조상들을 다 먹이고도 그 떡 하나가 되남더란 얘깁니다. 천도를 시켜도 이쯤 돼야 천도라고 할 수 있는 거지 목탁 치고 염불만 한다고 천도가 아닙니다. 영계를 만나서 얘기할 줄 알고 교류할 줄 알고, 그래도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지금 가고 뭐를 하고 있는지 그쯤은 알아야 천도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천도도, 아까 소가 지나갈 때 그것도 천도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천도하고 이 천도하고는 또 다르죠. 왜냐하면 아무 조건도 없어야 할 텐데 이 한 사람을, 내가 이거는 아주 철저하게 실험해서 체험한 거니까요. 이 한 사람을 건져 주려면 몇 집을 돌아쳐야 건질 수가 있는 겁니다. 연결 연결 돼서 말입니다. 그걸로 인해서 이게 막아지고 그걸로 인해서 저게 막아지고 죄 이렇게 되니까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천도도 가지가지에 의해서 용도에 따라서 주어지는 거고 그러니 그 천도도 천차만별이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천도라는 건 한마디로 그냥 천도지마는 그 천도의 가짓수는 나름대로 그 사람이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서 주어질 테죠.

질문자1(남) 두 번째 물어보겠습니다. 사람의 몸을 받기도 어렵고 또 일단 사람으로 태어나면 그냥 갈 수 없다고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제 질문은 낙태에 관한 것입니다. 지금 미국을 보면 이 낙태 문제 때문에 낙태 수술을 해 주는 병원을 사람들이 막기도 하고 못 들어가게도 합니다. 또 낙태하는 것을 여성의 권리라고 생각하고 그런 사람들끼리 서로 싸움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근데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는 인간이 태어나려면 정자와 난자와 함께 영혼이 삼합이 합쳐져야 된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렇다면 태아가 형성될 당시에 벌써 하나의 인간이, 몸은 아직 발전되지 않았지만 하나의 인간이 그 안에 들어 있는 거라고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그러면 세속 법에서도 그렇게 사람을 죽이면 큰 벌을 받는데 우리 한국 사회에서는 사실 그걸 좋아하고 잘한다고 하는 사람은 없지만 큰 죄의식을 갖거나 사회 문제로 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 낙태라는 것이 어떻게 보면 사람을 죽이는 걸로 볼 수도 있고 또 한편으로는 어떤 인연으로 어떻게 얽혀져서 그렇게 일이 된 줄도 모르겠습니다마는 스님께서는 그걸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큰스님 그것도 여러 가지죠. 원인에 따라서, 어떻게 됐기에 낙태를 했느냐에 따라서 더하고 덜함에 죄가 있겠죠. 어쩔 수가 없어서, 남편의 배신으로 어쩔 수가 없어서 그렇게 하는 수도 있고요, 또는 여자가 배신을 하기에 그렇게 하는 수도 있고요, 또는 돈벌이를 해 가지고 나중에 어린애를 낳고 살자 해서 낙태하는 수도 있고요, 여자애를 많이 낳았기 때문에 남자애가 영 생기질 않아서 자꾸 낙태하는 수도 많고요. 여러 가지가지겠죠. 말로 어떻게 다 하리까.

그런데 서울에 산부인과 의사들 팀이 있어요. 그런데 그 낙태하는 숫자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래서 낙태하는 숫자를 생각해서 그냥 그걸 정성을 들이려고 자꾸 그래요. 그래서 “네 마음의 영에다가 영을 만 개를 넣으면 몇 개가 되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도 없다는 거죠. “하나도 없다는 걸 알았으면 됐소!” 했습니다. 그 전에는 건건이 일이 터져 가지고는 문도 닫게 되고 뭐, 여러 문제들이 발생되고 건건이 그랬습니다마는 이 공부를 그네들이 하고부터는 그렇게 발생이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태어나려고 딱 70살이고 80살이고 주어져서 인제 잉태가 됩니다. 그러는데 중간에서 그냥 탁 치워 버리니까 그 영혼은 어디로 가겠습니까? 만약에 70살까지 살 나이라면 70살까지 허공에서 돌아야만 됩니다, 기한까지는. 이게 자연적인 법칙에 의해서 조금도 에누리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중간에서 그렇게 놓고 보니까 얼마나 기가 막히겠습니까?

그런데 이 도리를 배우는 사람에 한해서는 바로 그냥 자기가 돼 버리는 거죠. 돼 버려도 두드러지지 않죠. 빗물이 바다로 수많은 방울이 들어간다 하더라도 두드러지지 않죠? 이 한 그릇의 물을 한 그릇의 물에다가 이렇게 부은들 그냥 한 그릇이죠. 그와 같이 두드러지지 않는 것을 또 이 주인공에 의해서 줄을 놔서 내보낸단 말입니다, 좀 더 좋은 데로. 그렇게 악행스럽게 죽여야만 하지 않으면 안 되고, 그렇게 죽이지 않으면 안 되리만큼 됐던 그 가정에 다시금 태어나지 말라 하고 한번 염원을 해 주는 거죠. 그러면 그대로예요.

그러니까 청와대에 들어가는데, 예를 들어서 청와대에 있는 사람이 청와대에 들어갈 때는 아주 자연스럽고 쉽죠? 근데 청와대에 들어가지 못할 사람이 들어갈 때는 검열이 심하고 못 들어가죠. 그와 같습니다. 이 지금 우리가 주인공에다 모든 것을 맡겨 놓고 일임하고 이렇게 믿고 나가는 데는 이 블랙홀이라는 이 핵심적인 거기 문을 자유스럽게 드나들 수 있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그것을 못할 때는 언감생심 거기를 어떻게 드나듭니까? 들어가고 싶어도 못 들어가죠. 그러니까 거기 직원으로서 배지라도 얻어야 거길 다닐 수 있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무조건 인생의 조건은 그 청와대에서 나오는 건데…, 하하, 이건 청와대 아닌 청와대를 말합니다.

그 블랙홀, 핵심적인 거기에서 모든 인생의 차원이 주어지는 건데, 어떻게 살고 돌아가느냐에 따라서 거기에 입력이 됐기 때문에 주어져 있는 겁니다. 그런 것도 그렇게 한다면 그 죽은 아이도 오히려 천도가 되고 외려 천도를 시켜 줬으니 고맙게 생각할 거고, 그러니까 일은 더 잘되고 산부인과 일은 자꾸 걸리기만 하다가 아주 걸리지도 않고 잘돼 나가고 그럴 수밖엔 없죠, 걸리는 게 없으니까. 그러니깐 보이는 데 문제보다도 보이지 않는 데서 문제가 더 크다는 얘깁니다. 이렇게 상세히 얘길 해 드리다 보니까 하이 참, 이상스러운 것 같습니다. 하하하.

나는 어떡하든지 여러분이 편리하고 되는 조건으로 자꾸 얘기를 해 드리거든요. 뭐, 죄가 있어서 안 된다, 너는 무슨 업이 있어서 못한다, 이런 거 없습니다. 그것은 모두 이 불바퀴에다가 갖다가 넣으면 타 버리는 거와 같고, 자력이라는 것은, 즉 말하자면 그 뭡니까? 큰 자석 덩어리가 있는데 쪼끄만 것들이 아무리 많아도 그냥 큰 데 붙으면 그냥 하나, 하납니다, 하나. 하나로 돼 버리고 말죠. 그와 같은 겁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참 생각하기에 달려 있고, 그 생각하기에 달려 있는 반면에 생활이 윤택해질 수도 있고, 생활이 급박해질 수도 있고, 생활이 완화될 수도 있고, 다복할 수도 있는가 하면 극치적으로 그냥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자유스럽게들 못하는지 나 그것이 좀 이해가 안 가는 점이 많아요. 도시락 싸 가지고 나왔다가 뭐 그렇게 오래 살다가 가겠다고 그렇게 하는지….

질문자2(남) 오늘 처음 나와 가지고요, 저는 교리에 대해서, 방금 앞에 질문하신 분은 그래도 제가 듣기에 상당히 전문적인 용어도 쓰시고 그러는데 저는 그런 것도 하나도 모르는 그런 단계입니다. 제가 스님 말씀하시는 데 가장 깊은 감명을 받은 것은 자유인이라는 표현입니다. 이는 곧 자기 마음속의 주인공이라고 말씀하셨고, 이 공부는 그걸 찾는 길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내 마음속에 여러 의식이 존재한다고, 제 육체 속에요,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과연 그런 의식 중에 어떤 것이 내 참의식이고, 소위 말해서 접근 방법, 수행 방법이 과연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그와 동시에 제가 가장 궁금스럽게 생각하는 것은요, 제 주위에 있는 많은 분들이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지금 스님과 같은 분들은 불교에서 더 오를 수 없는 경지에까지 오르신 분이다.” 이렇게 말씀하세요.

그렇다면 아까 오신통이라고 말씀하셨는데요, 거기 위에 어떤 도인의 경지라는 말씀으로 제가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그 오신통의 경지를 넘어선 도인의 경지라면 자기의 과거나 미래사를 충분히 다 꿰뚫어 보시고 이미 다 보신 상태라 이렇게 이해가 되는데요, 과연 스님의 과거는 어떠했고 미래는 어떠한지 이것도 상당히 궁금합니다. 하하하. 아이, 당돌한 질문이지마는 좀 말씀해 주십시오.

큰스님 아이, 좋아요. 그런데요, 과거는 지나갔으니까 없고, 알고 보니까. 아까도 얘기했죠. 미래는 오지 않았으니까 없고, 현실은 공해서 고정됨이 없이 돌아가니까, 시공을 초월해서 돌아가니까 그것조차도 없더라 이겁니다. 하하하. 그런데 만약에 내가 꼭대기까지 올라갔다면, 다시금 꼭대기다 아래다 없이 아예 그냥 같이 요리를 해서 모든 여러분과 나와 동시에 같이 더 올라가고 더 내려가고도 없이 아, 평등하게 같이 나누어 먹겠습니다.

질문자2(남) 지금 두 번째 질문에 대하여 답하신 거고요, 첫 번째, 자유인이 되는 길, 자기 진짜 나를 찾는 길, 그 수행 방법을 스님의 경험을 통해서 한번 말씀해 주십시오.

큰스님 그럽시다. 그런데요, 나의 경험을 통해서 꼭 듣고자 하신다면…, 나는 아버지도 참, 지금으로 생각하면 장군으로서 유명 인사였었고 또 가정도 부유했었고 그랬기 때문에 그런 걸 모르다 어려서 모두 일본 사람들한테 어떤 제한을 받은 것 같아요, 어려서 모르긴 하지만. 그래서 다 뺏기고 식구가 산중으로 들어가게 됐고, 그랬기 때문에 묘지 옆에서 자지 않으면 안 됐고 그런 문제들이 벌어져 있었죠. 그래서 그랬는지 식구가 모두 제가끔 헤어지지 않으면 안 되리만큼 돼 있었죠.

그러니까 아버지도 그립고 엄마도 그립고 그런데, 예를 들어서 그 누구더러 엄마니 아빠니 뭐, 이렇게 부를 수가 없으니까 안에다가, 어려서부터 ‘아빠!’ 이렇게 불렀답니다. ‘아빠! 아빠만이 밥 굶는 사람 그런 거를 해결해 줄 수 있을 거야.’ 그러고 ‘해 줄 수 있을 거야.’를 떠나서 내가 극치적으로 죽겠으니까 죽겠으면 그냥 ‘아빠’ 하고 붙들고 울었을 뿐이죠. 그러다 보니까, 그 아빠가 지금 내가 말하는 주인공입니다.

그래서 그 주인공이 틀림없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거죠. 그래서 처음에는 아주 너무 감응이 오고 그러는데도 믿지를 못해서요, 허허, 나도요. 어린 마음에 ‘아빠가 정말 있다면 내 손을 좀 들어 봐.’ 이렇게 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들어 보랄 때는 안 들어 보이고 그냥그냥 무심하게 그냥 이렇게 돌아서서 저거 하면 ‘내가 여기 있다.’ 그러듯이 팔이 번쩍 그냥 올라가는 겁니다. ‘아하! 있긴 있구나.’ 그렇게 생각했죠. 그리고 인제 내가 글을 모르는데 글을 써도 내 손으로 쓰는 게 아니라 그 아빠로부터 쓰게끔 돼 있었고, 말을 해도 아빠로부터 지금 말을 하는 거지 내가 그놈의 거를 뭐 책을 봐서 어떻게 그걸 일일이 얘기합니까? 세상 돌아가는 것이 팔만대장경이거든요. 다른 거 없어요. 글로, 책으로 어떻게 세상 돌아가는 걸 다 써 놓겠습니까?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다, 때에 따라서는 다 그저 먹게끔 돼 있고 주게끔 돼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도 걸림이 없고, 대권이라고 할까? 그런 한마음의 대권은 여여하게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도 여러분과 같이 나누어서 대권이지 나 혼자만의 대권이 아닙니다. 천상천하에 유아독존이라고 한 부처님의 말씀을 한번 새겨 봅시다. 바다에서 일하는 사람은 바다에서 제일이고 또는 나라에서 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정치를 하는 사람으로서 위대하고, 농사짓는 사람은 농사짓는 대로 농사꾼으로서 위대하고 전부 손가락 하나도 버릴 게 없고 전부 위대하다고 한 겁니다. 전부 위대하다. 작든지 크든지 다 위대하다. 작은 게 있기 때문에 크게 보였으니까, 그것도 한몫하니까 모든 게 위대하다. 그래서 천상천하에 유아독존이라고 했던 겁니다.

그러니 “나 하나만 위대한 게 아니다. 모두가 전부, 천상천하의 모두가 다 위대하니라. 그리고 나 아님이 하나도 없느니라. 그리고 내 아픔 아님이 하나도 없느니라. 그리고 내 자리 아님이 하나도 없느니라. 그리고 부처는 중생 속에서 나왔고 중생은 부처 속에 있느니라.” 이랬습니다.

질문자2(남) 감사합니다.

큰스님 그러니 지금이라도 꼭 참선을 하시려고 든다면 앉아서 좌선하는 것만이 참선이 아니라 그저 서나 앉으나 일하나 내가 생각나면 거기다 맡겨 놓고 ‘나는 믿어! 당신만이 나의 물리를 틔게 해 줄 수 있고, 참나를 발견하게 할 수 있는 것도 당신밖엔 없어.’ 하고 거기에 모든, 어떠한 가정의 용도라도 거기에 놓고 지켜보는 것이 참선입니다. (합장하시고)

그리고 내가 여기 오지 않았다고 해서 없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보이지 않는 데서 여러분 마음먹는 대로 그 에너지는 충족될 것입니다.

※위 법문은 대행 스님께서 1992년 6월 28일 오하이오지원 법회에서 설법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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