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데휘 부인 극락 체험기 下

상품상생인의 모습, 세세생생의 선업으로 보살이 되어 왕생하였다. ‘극락구품도’의 부분, 1841년, 비단에 채색, 동화사 소장.

참~ 진짜 같지요. 불교에서 말하는 가상의 세계, 임시의 세계, 그래서 거짓이라는 세계. 내가 진짜라고 굳게 믿는 이 세계는 불교에서는 가상현실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불교에서 말하는 진실한 세계는 무엇일까요. 〈관무량수경〉은 고통 속의 위데휘 부인에게 부처님께서 몸소 극락의 세계를 보여주시는 내용입니다. 그 도입부를 보면, 부처님께서는 진실한 세계를 바로 볼 줄 모르는 범부를 위해 이를 비유해서 설하였다고 합니다.

중생이 가진 根機는 ‘천차만별’
9품 근기로 나눠 무리져 왕생
지성심·심심·회향발원심 갖춰야
최고 근기 ‘상품상생인’ 이르러

위데휘 부인은 어느 왕국의 여왕으로, 한 순간에 자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던 가치를 모두 잃어 버리게 됩니다. 아들과 남편, 가정과 지위가 순식간에 파탄 나고 또 목숨까지 위협받게 됩니다. 그녀가 어떻게 진실된 세계를 보아 이를 헤쳐 나갈 수 있을까요? 어떻게 이러한 고통을 모두 뛰어넘을 수 있을까요?

이에 부처님은 부인에게 현재에 ‘마음’을 집중하라고 이릅니다. 그리고 먼저 ‘지는 해’를 관(觀)하면서 극락의 물, 땅, 나무, 누각, 연못의 순서로 장엄한 세계로 이끌고 들어갑니다. 속계에서 법계로, 번뇌의 세계에서 본질의 세계로, 갇힌 자아에서 광활한 바다로 노출됩니다.

이렇게 차근차근 관해서 들어가다가 드디어 본체와 계합하는 (부처님의) 진신관(眞身觀)에서 내용은 절정을 이룹니다. 이렇게 총 16관법 중 13관법까지가 실제로 여여한 진여(眞如)의 세계에 눈뜨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경전의 마지막 부분인 14관, 15관, 16관은 다른 내용으로 구성되는데 그 제목을 보면 상배관(上輩觀), 중배관(中輩觀), 하배관(下輩觀)입니다.

중생 ‘근기’ 따라 왕생
중생들은 각자의 근기(根機)가 천차만별인데 그 근기의 높고 낮음에 따라 상·중·하로 나뉘어 크게 세 개의 연못에 무리지어 왕생합니다. 중생들은 상품(上品)·중품(中品)·하품(下品)으로 구분지어지고 각 3품 속에서 상·중·하로 다시 나뉩니다. 그러니까 상품에는 상품 상생(上生), 상품 중생(中生), 상품 하생(下生)이 있고, 중품에도 상중하, 하품에도 상중하가 있습니다. 그래서 총 9품입니다. 극락에 있는 왕생(往生)의 연못을 보통 ‘구품 연못’이라고 하는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덧 ‘구품’이라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서 조선후기 극락 그림은 ‘극락구품도’라고 불리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불교는 모든 존재의 평등을 말하고 어떤 차별도 없는 무차별의 세계를 말합니다. 헌데, 어찌 중생을 이렇게 9등급으로 나누어 차별한단 말입니까. 극락에 왕생을 해도 이미 차별화된 연못에 배당을 받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 차별의 기준이 되는 ‘근기’가 무엇인지 보도록 합시다. 불교에서는 중생을 어떤 세속적 가치로도 평가하지 않습니다. 출신 배경, 돈, 학벌, 외모, 직위 등 모두 허망한 잣대일 뿐입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기준은 고수하는 데 그것이 ‘근기’입니다. ‘근기’란 중생이 태생적으로 전생에서부터 지어서 가지고 나온 근본 바탕을 말합니다. 즉, 본성을 나무의 뿌리(根)에 비유하고 그것의 작용을 기(機)라고 합니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교화될 수 있는 능력, 또는 그것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다만 ‘수행할 수 있느냐 없느냐’ 즉 ‘수행을 할 근기가 되느냐 안 되느냐’, 나아가 ‘수행을 어느 수준까지 진전시킬 수 있느냐’라는 기준입니다. 아무리 지체 높은 사람이라도 수행하지 않으면 하품이고, 비록 사회적 지위가 낮더라도 그가 수행하는 사람이라면 상품입니다.

근기는 종교인이냐 아니냐는 상관없습니다. 법복을 입었건 안 입었건, 불교 공부를 했건 안했건, ‘스스로를 자각하는 힘의 척도’를 얼마나 갖고 있느냐가 관건입니다. 이렇게 근기를 따지는 것은, 물론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 교화 방편을 베풀기 위함입니다.   

중품의 연못에 왕생한 모습.

티끌의 불씨, 만개 횃불 밝힌다
모든 존재는 본질적으로 무상하며 공(空)이라는 하나의 진리를 공유하지만, 유위법(有爲法) 속에서 짓는 업(業)은 각자 천차만별입니다. 그리고 업행이란 것에는 ‘인과응보’라는 철칙이 따릅니다. 선업(善業)에도 다양한 역량과 종류가 있어, 그것의 과보로서의 내용들이 다르게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느 근기에 해당하는가. 과연 어느 왕생의 연못에 태어나는가. 가장 최고의 근기인 상품상생(上品上生)을 보도록 합시다. 상품의 연못은 보통 화폭의 정중앙에 위치합니다. 상품 중에서도 특히 상품상생인은 눈에 띄게 그려졌습니다. 커다란 홍련위에 천의를 입고 보관 장엄을 하고 나타납니다.

보통 보살의 모습을 이미 갖추고 있고 광배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아미타부처님이 바로 앞에 몸소 나투어 정면에서 맞이합니다. 경전에는 ‘삼종심(三種心)을 갖추면 (지금 이 자리에서) 정토의 세계가 열린다’고 합니다. 상품상생인이 되기 위한 전제조건은 삼종심(세 가지 마음의 씨앗)을 갖추는 것입니다. 첫째가 지성심(至誠心: 정성을 다 하는 마음), 둘째가 심심(深心: 깊게 믿는 마음), 셋째가 회향발원심(回向發願心:모든 선업을 회향 발원하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전생에 지은 많은 업들은 어디 가지 않고, 자신의 업식(業識)으로 남은 채 그대로 저장됩니다. 자신이 지은 업의 성향과 모습대로 우리는 다시 윤회하게 됩니다. 생전에 ‘수행의 업’을 얼마나 지었느냐에 따라 ‘근기’의 높고 낮음이 결정됩니다. 그리고 극락 또는 깨달음의 체험에 있어 규모와 시간 등이 다르게 나타납니다. 물론 근기에 따라 절대적으로 필요한 수행 기간도 다릅니다.

상품상생인은 무생법인(無生法忍)의 궁극적 진리를 깨달아 부처님 세계에 확고부동하게 안주합니다. 반면, 상품하생(下生)인은 잠시 아미타불을 친견하지만, 활짝 폈던 연꽃은 오므라들어 빛은 사라지고 다시 무명(無明)에 갇히게 됩니다. 하루 지나지 않아 다시 연꽃이 피는데 7일간 아미타불을 볼 수 있으나 명료하게 보지는 못합니다. 계속 정진하면 21일이 지나야 분명하게 극락세계가 보입니다.

깨달음 세계와 계합하는 것은, 중생이 타고 앉은 연꽃이 활짝 피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반면, 무명(無明)에 떨어져 있는 상태는 연꽃이 피지 않고 닫혀 있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깨달음(覺)의 상태는 청정한 연꽃이 만개하여 찬란한 광명이 비춰들고 이 빛 속으로 융해되는 것으로 설명하고, 깨닫지 못한(不覺) 상태는 피지 않은 연꽃 봉우리 속에 갇혀 빛을 보지 못하는 상태로 그려집니다.

비록 삼매 체험을 잠시 하더라도 근기가 얕으면 다시 빛이 없는 무명(無明)으로 떨어지는 것을, 연꽃이 잠시 피었다가 바로 오므라들어버리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악한이 어찌 부처님을 맞이하는가
그렇다면, 중품의 근기를 가진 사람은 어떤가. 중품중생인은 밤낮 하루 동안 계(팔재계 사미계 또는 구족계)를 지킨 사람입니다. “수행이 적은 데도 어찌 이와 같은가 라고 말하지 말라. 티끌의 불씨라도 능히 만개의 횃불을 밝힐 수 있다”고 초발심의 중요성은 강조됩니다.

마음 속 청정한 깨달음이 활짝 열려 찬란한 빛이 들어오는 것도 잠시, 이내 연꽃은 오므라들고 맙니다. 다시 7일이 지나야 연꽃이 피는데 그때는 마음의 눈이 열려 수다원과(須陀洹果)를 얻게 됩니다. 수다원이란 팔리어 소타판나(sotpanna: 전향)를 음사한 말로서 예류(預流) 또는 입류(入流)로 번역됩니다. 즉 중생의 마음에서 성자의 마음으로 전향, 방향을 바꾸어 성자의 대열로 진입한 사람을 일컫습니다.

하품상생인의 경우는 “가지가지 악업을 짓는 중생을 말한다. 어리석기 때문에 온갖 나쁜 짓을 하고도 참회하거나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라고 합니다. 이 사람은 염불공덕을 아주 간절히 한다고 해도 아미타부처님을 만나기는 힘듭니다. 대신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나투시고, 연꽃을 타고 연못에 태어나게 되는데 49일이 지나야 비로소 연꽃이 핍니다.

49일로 연꽃 속에서 대기하는 기간이 제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49재를 지내는 우리 중생들은 대부분이 하품상생인에 해당한다는 것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하품중생인의 경우는 “계율을 범하고 승단이나 스님네 물건을 훔치며, 자기의 명예와 이익을 위해 허무맹랑한 부정설법을 하면서도 뉘우치거나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사람. 갖가지 악업을 짓고도 오히려 스스로 옳고 장하다고 뽐내는 사람”입니다.

하품상생인은 모르고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이고 하품중생인은 의도적으로 나쁜 짓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중생도 선지식의 법문을 접한 인연으로, 지옥에 떨어졌다가 다시 극락의 바람이 불어 구제받게 되는데, 극락에 왕생하더라도 6겁(劫)에 달하는 참으로 아득한 기간이 지나야 비로소 연꽃이 열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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