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것이 아름답고 소중하다

이별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이별을 준비하는 마음으로’는 책상의 밑 서랍을 열면 만나는 구절이다. 나는 글을 원고지에 한자 한자씩 써 넣는다.

책상의 밑 서랍엔 볼펜이 서너 자루가 늘 담겨있다. 볼펜 밑의 종이에 11자로 적힌 ‘이별을 준비하는 마음으로’가 설렘으로 눈물방울로 언제나 새롭게 다가온다. 설렘이란 수북이 쌓인 삶의 흔적을 하나씩 둘씩 정리해가며 누군가에게 나누어 주는 기쁨의 설렘이다. 눈물방울이란 마지막 그림자를 언젠가는 거둬들일 순간의 처연한 작별인사가 한 두 방울의 눈물방울로 앞당겨 다가오기 때문이다.

무슨 무거운 병이라도 지니고 있거나 중병 앓는 환자처럼 너스레 비슷한 요란을 떨고 있지만 당뇨 없고 혈압이 정상이다. 암 따위는 키우지 않는 것으로 검진 결과 밝혀졌다. 다만 세월의 무게에 삭신이 녹이 슬어 곳곳에서 예전 같지 않은 어두운 신호음이 울리고 있다. 티베트와 중국에서 익힌 자가 치료로 사혈도 하고 침도 꽂으면서 건강관리에 소홀함이 없도록 드문드문 살피고 있다. 항시 긍정적인 생각으로 욕심을 덜어내며 가벼움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

이별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살다보면 하나하나가 아름답고 소중하다. “미안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가 생활의 언어가 되는 것이다. 작은 일에도 감동하게 되고 소홀함이 없었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거짓과 능청보다는 순수하게 진실하게 드러내고 감출 것 없이 넘침보다는 부족한대로 행복인으로 자유인으로 마무리를 개운하게 하고 싶다.

덜어내고 비워가며 머묾 없는 머묾으로 흔적 없이 가고 싶다. 글쎄, 남은 세월이 얼마일지는 모를 일이나 ‘훅’ 불어 꺼져버리는 호롱불처럼 미련도 후회도 없이 한 점의 바람이 사라져가듯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에서 자유로운 여행의 마침표를 찍고 싶다.

찾아오는 죽음도 번거로운 일이요, 아무개 아무개가 죽음을 애도하며 꽃상여를 준비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흔적도 자취도 찾을 수 없는 곳에서 조금은 죽음을 앞당겨 내가 내 죽음의 상주가 되어 마지막 미소를 지켜보고 싶다. 애처로운 눈빛으로 손 마주잡아주는 사람 없어도 하늘이 있고 땅이 있고 해와 달이 있어 수행승의 죽음은 외롭지 않을 터이다.

인도와 네팔, 티베트에서 여러 차례 죽음의 고비를 겪게 되었고 그때마다 질기게도 죽음에서 부활한 누구처럼 되살아났던 것이다. 하여, 죽음을 경험하거나 죽음이 두렵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죽음의 징조가 뚜렷해지면 스스로 몸과 마음을 추슬러 생각해둔 곳을 찾아 흔적도 자취도 없이 홀가분하게 개운하게 마지막 그림자를 거두고 싶다.

육체는 정직하다. 망가지기 전에 탈이 나기 전에 병(病)을 알아차리도록 신호음을 울려댄다. 자가 치료와 예방을 위해 어지간히 건강 돌봄을 시도하지만 나이를 속일 수 없듯 세월에 삭아 내리는 종착역은 죽음의 문이다.

하여, 날마다 떠날 준비가 되었는지 이별을 연습한다. 이별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살다보면 흔들림과 헐떡임이 줄어든다.

작설차 주전자도 하나만 남기고 나누게 되고 책과 붓글씨 그림등도 미련 없이 즐거운 나눔을 실천하게 된다.

사람이 늙어 사라지는 것도 자연의 순리이자 법칙이다. 해질녘의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만남과 헤어짐, 자연풍광이 아름답고 소중하다. 사형이 집행되는 날, 마지막 식사에서 반찬투정이 있을 수 없듯 이별을 준비하는 마음에는 언제나 텅 빈 충만의 감사와 고마움뿐이다. 오늘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마음의 준비로 삶이 더욱 풍요롭고 기적으로 이어진다. 누구나 그러하듯 미운자도 보내고 나면 울컥 서러워 가슴에 짠한 아픔이 남는 법이다. 내 죽음에는 내 자신이 상주가 될 터이다.

땅이 관이 되고 하늘이 상여가 되어 산천초목 바다의 배웅을 받으며 떠날 터이다. 미운 얼굴, 그리운 얼굴 가슴에 담고 어머니를 부처님처럼 나직이 불러보며 안녕이란 말을 차마 반쯤 남기리니, 한 점 바람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려니, 이별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은 그대로 아름다운 정토의 세계이다. 하루하루가 기적이다. 고마움이다.

오늘도 비우며 덜어내며 텅 빈 충만의 행복인이 된다. 자유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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