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치유학교장 혜민 스님

불교TV무상사 초청법회…‘깨달음의 과정’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불자들이 가장 많이 외는 〈반야심경〉 말미에 등장하는 깨달음을 얻기 위한 주문이다. 하지만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외면서도 정작 깨달음은 오지 않는다. 무엇이 깨달음을 가로 막는 것일까? 힐링멘토 마음치유학교장 혜민 스님은 6월 2일 방영된 불교TV무상사 일요초청법회서 ‘깨달음의 과정’이라는 주제로 법문했다. 스님은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며 하얀 스크린의 존재를 잊어버리기 때문”이라며 “수행을 통해 ‘앎’을 얻어야 본성과 대상이 둘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고 조언했다. 정리=윤호섭 기자

혜민 스님은… 1996년 캘리포니아주립대 버클리캠퍼스에서 종교학 학사를 받았다. 1998년 뉴욕 불광선원 휘광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2000년 해인사서 사미계를 수계한 뒤 하버드대 대학원 비교종교학 석사, 2005년 프린스턴대 대학원 종교학 박사를 취득했다. 2006년 미국 햄프셔대학 종교학 교수로 활동하고, 2008년 직지사서 비구계를 수계했다. 현재 뉴욕 불광선원 부주지, 마음치유학교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 〈완벽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사랑〉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젊은 날의 깨달음〉 등이 있다.

몸 경계로 ‘나’ 구분하고
보이는 대상에 얽매이면
내 성품 바로 볼 수 없어

모양도 생각도 없는 본성
변하거나 사라지지 않아
그대로 봐야 ‘앎’ 얻는다


대상에만 집착하는 나
오늘은 깨달음의 과정에 대해 얘기해보려고 합니다. 불자라면 모두가 법회마다 암송하는 것이 〈반야심경〉인데요. 맨 마지막에 이 세상에서 깨달음으로 가는 훌륭한 주문이 있다고 하죠.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입니다. 이것만 외우면 깨닫는다고 〈반야심경〉에서 보증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불자님들은 백번 천번 외는데 깨닫지는 못하셨죠? 산스크리트어로는 ‘가테 가테 바라가테 바라삼 가테 보디 스바하’라고 하는데 무슨 뜻인지 아시나요?

‘아제 아제’는 보통 ‘가자 가자’라고도 하는데, 조금 다른 의미로 ‘가버렸다’고 설명합니다. ‘바라아제’는 ‘어서 가자’라고 하는데 과거완료형으로 ‘완전히 가버렸다’고 할 수 있고요. ‘모지’는 깨달음을 의미하는 ‘보디’입니다. ‘사바하’는 감탄사죠. 즉 가버리고, 가버리고, 다 가버리고 나니 깨달음이 나타났다는 겁니다. 다 가버리고 깨달음이 남았다는데 무슨 뜻일까요?

〈반야심경〉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부처님 성품이 아닌 게 뭔지 쭉 나열하죠. 색수상행식. 우리는 보통 ‘나’는 몸 안에 있고 밖에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반야심경〉은 몸도, 생각도, 느낌도 내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우선 ‘진정한 나’는 변하면 안 됩니다. 그렇다면 몸은 어떻습니까? 계속 변하죠. 내 의지와 상관없이, 말도 듣지 않고 변합니다. 그래서 진정한 나라고 할 수 없습니다. 생각과 느낌 역시 상황이 바뀔 때마다 변합니다. 이렇게 몸이나 생각, 느낌은 내가 통제할 수 없고 상황에 따라 변하기 때문에 내가 아닙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쳐냅니다.

그 다음 〈금강경〉을 보면 부처님은 모양이 없는 무상(無相)이라고 합니다. 형태가 있으면 그것은 진짜 부처가 아니라는 겁니다. 몸은 어떻습니까? 모양이 있죠. 생각도 모양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글을 쓰고 음악을 만듭니다. 느낌도 마찬가지로 좋았다가 싫었다가 모양이 있죠. 즉 이런 것들은 부처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럼 몸도, 생각도, 느낌도 아니고 모양도 없는 게 부처라는데 그게 뭘까요? 흔히 ‘불성’ ‘깨달음’이라고 말은 하지만 그 단어가 지칭하는 본질이 뭔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그래서 비유를 들어 이해를 도와볼까 합니다.

먼저 부처님의 성품, 즉 진정한 나를 ‘하늘’에 비유해보겠습니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요. 모양도 없고 소리도 없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어느 순간 토끼 모양 구름이 생겼습니다. 하늘은 모양이나 소리가 없어 잘 인지하지 못했는데 구름이 생기니 마음이 가 집착하게 됩니다. 하늘은 구름에 집착하면서 ‘나는 토끼 구름’이라고 착각합니다. 모양이 있어 보이고, 그래서 집착에 빠지기 쉽습니다.

내가 하늘인데 스스로를 토끼 구름이라고 여긴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토끼 구름뿐만 아니라 별의별 구름이 다 있겠죠. 어마어마하게 큰 구름도 하늘보단 작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구름이 나라고 생각하고, 하늘 전체로서 나의 성품을 잊게 됩니다.

조금 더 쉽게 설명해보죠. 여러분 영화 보러 영화관에 많이 가실 겁니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영화가 나온다고 가정합시다. 왕도 나오고, 신하도 나오고 많은 이미지가 상영되죠. 그런데 그 과정에서 우리는 영화를 볼 수 있게 해주는 하얀 스크린의 존재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그 스크린이 없는 것은 아니죠. 바로 우리의 근본 바탕이 하얀 스크린과 같습니다. 그 존재는 영화가 완전히 끝나고 영화관에 불이 켜져야 알게 되죠.

참 안타깝게도 우리 인생은 영화처럼 계속 이어집니다. 중간에 끊어지지 않아요. 그래서 모양만 계속 보게 됩니다. 여러분 눈앞에도 혜민이라는 사람이 계속 말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얀 스크린을 못 보고 모양에 집착합니다. 모양에 집착하면 부처 성품이 드러나지 않아요.

제가 정말 좋아하는 부처님 모습 중 하나를 〈열반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돌아가실 때쯤 깨달은 제자들은 감정적인 동요가 없는데, 깨닫지 못한 제자들이 울고불고 난리가 납니다. “어떻게 저희를 버리고 가시나이까”하고 말이죠.

부처님이 뭐라고 하셨을까요? “왜 그리 슬피 우느냐. 나 어디 안 간다.” 맞습니다. 부처님은 어디 가지 않습니다. 물론 몸은 사라지겠죠. 하지만 성품은 어디에 가거나 사라지지 않습니다. 마치 하얀 영화 스크린처럼 말이죠. 영화 속 주인공이 죽는다고 해서 스크린이 죽는 게 아닙니다.

불성은 변하지 않는다
이처럼 불성은 변하지 않는 겁니다. 오지도 가지도 않은 불성 자체를 깨닫는 게 중요합니다. 근데 인생을 살면서 한순간이라도 모양이 나타나지 않는 때가 있긴 한가요. 게다가 근본 바탕은 모양이 없어서 잘 보이지도 않습니다. 눈 뜨고 나서 모양이 아닌 것을 봐야 부처를 볼 수 있다고 〈금강경〉에서 말했는데요. 이것을 실천하기 위해 전통 선불교에서는 방편을 썼습니다.

모양을 잠시 멈추는 방법, 한시적이지만 본성인 영화 스크린이 드러나는 겁니다. 첫째, 선사들은 어느 때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지 알아봤습니다. 그건 바로 뭔가를 궁금해 하지만 답을 모를 때였습니다.

예를 들어 친구를 20년 만에 봤는데, 얼굴은 기억나지만 이름을 통 모를 때가 이와 같습니다. 이름을 기억해내기 위해 ‘뭘까’하고 멍한 그 순간, 이름이 떠오르기 직전까지입니다. 이때 내 생각은 텅 비어버립니다. 그래서 스승이 제자에게 화두를 던져줍니다. 답이 바로 안 나오겠죠. 그 사이 생각이 멈추고, 모양은 사라집니다. 바로 간화선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파란 하늘 예에서 구름이 다 사라지고 난 뒤 ‘어? 이게 나야?’하고 스스로를 보게 됩니다. 지금까지는 구름이 나인 줄 알았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닫죠. 〈육조단경〉에서 깨닫는 경지를 무착(無着)이라고 합니다. 모양이 없을 때 착(着)할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무주(無住), 마음에 머무는 바 없음입니다. 마음이 머물려면 대상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죠. 모양을 다 걷어내면 머물 데가 없습니다.

둘째, 이번엔 마음을 고요하게 만들려 했습니다. 여러분 잠을 푹 자고 아침에 일어났을 때 마음이 고요하지 않습니까? 그런 순간을 만드는 겁니다. 바로 쉬고 또 쉬고 뭔가를 하려고 하면 또 쉬게 합니다. 깨달음을 목적지로 두면 노력이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계속 쉬게 해서 고요해졌을 때 회광반조를 합니다. 바로 내 의식을 감지하는 겁니다.

컵을 바라봤을 때 내 마음은 컵에 가 닿습니다. 그게 보통 사람이고요. 회광반조는 컵을 보고 있는 그 의식을 바라보는 겁니다. 마음이 텅 빈 상태에서 회광반조를 하면, 구름에 마음을 두고 있는 그 자신을 보게 됩니다. 스스로 느끼기 시작하죠. 모양이 없는 근본 바탕을 깨닫게 하는 것, 묵조선이라고 합니다. 고요한 채로 밝힌다는 뜻이죠.

셋째는 이보다 더 오래 전의 방편 조사선입니다. ‘부처님 성품이 무엇이다’하고 찔러주는 겁니다. “네가 그렇게 찾는 게 바로 너다.” 여기엔 스승을 믿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제가 한번 여러분을 찔러보겠습니다.

성품 자체는 모양이 없기 때문에 텅 빈 것 같아 공합니다. 그러나 죽은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살아있어서 ‘앎’으로 드러냅니다.

여러분 눈앞에 혜민이 있다는 걸 압니다. 점심시간이 다가오면서 배고프다는 것도 알죠. 근데 앎의 대상은 서로 다릅니다. 혜민은 여러분 몸 밖에, 배고픔은 몸 안에 있습니다. 하지만 앎 자체는 같습니다. 대상만 다를 뿐입니다. 앎의 대상은 끊임없이 바뀌지만 앎 자체는 변하지 않습니다. 즉 몸 안의 앎과 밖의 앎은 하나입니다. 앎 자체는 모양도 없죠.

불성을 느끼고자 한다면 앎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봐야 합니다. 대상에 집착하는 게 아니라 대상을 아는 앎을 말이죠. 이해되시나요?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본성을 깨닫고 나면, 간혹 깊이가 없이 깨달았을 때를 말합니다. 텅 빈 채로 살아 있는 마음 상태가 여기 있고, 눈에 보이는 모양들은 또 따로 노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컵을 봤을 때 컵이 내 마음이라고 느껴져야 하는데 텅 빈 것 따로 모양 따로 말이죠. 이것을 통합해야 합니다.

TV에서 드라마 연속극을 하는데 전원이 꺼져 있는 검은 브라운관과 드라마를 표현하는 색깔의 브라운관은 하나입니다. 파란 하늘에 구름이 생겼는데 이 둘이 완전히 다른 게 아니라는 겁니다. 하늘 안에 구름이 있고, 하늘은 곧 구름이 됩니다. 그래서 눈에 드러나는 형상, 모습, 이것이 다 앎입니다. 앎이 텅 빈 채로 있는 게 아니라 제 앞의 마이크 모양으로, 또 컵의 모양으로, 혜민의 목소리로 사방천지에서 본성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겁니다. 바로 ‘앎’으로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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