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의 마음속에 주장자인 주인이 엄연히 있습니다

오늘은 여러분과 같이 토론 형식으로 서로 질문 문답이 있길 바랍니다. 그러기에 앞서 우리가 어떻게 해서 인생을 이렇게 살고 있고 또 어떻게 가야 옳은지 그것을 제가 먼저 한마디 말씀드리겠습니다.

보이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전력이 있다는 것은 믿죠?

그렇게 믿듯이 나를 끌고 다니는 내 주인공도

반드시 있다는 그 믿음을, 신념을 가지세요.

우리가 이렇게 살면서 생활하는 데는 별의별 천차만별의 뜻으로써, 환경에 따라서 용도에 따라서 다가오는 문제들이 한두 건이 아닐 겁니다. 한두 건이 아닌 반면에 자기가 마음을 어떻게 가지고 다스리면서 어떻게 살아나가느냐에 따라서 앞으로의 미래가 주어지겠죠. 알고 범하는 것은 알고 받게 마련이고 모르고 짓는 것은 모르고 받게 마련이니까요. 그러다가 한세상을 다해서 떠날 때는 어떤 분들이고 다 가져가는 분은 하나도 없습니다. 금은보화라도 바로 방문 안에서 배웅을 하고 아무리 좋은 집이라도 대문 안에서 배웅을 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권세가 좋고 친척이 많고 자식 부부지간이 아무리 버릴 수 없는 인연들이라고 하더라도 바로 동구 바깥에서 배웅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 자기가 이 세상을 살아나온 그 자체가 바로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그림자처럼 그 업식이 쫓아다니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살아간 그 차원에 따라서 이 세상에 정자 난자, 즉 어머니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서, 또한 나의 영혼과 더불어 같이 삼합이 한데 합쳐지는 동시에 자기가 선업을 지었다면 선업의 그림자가 거기 포함될 것이요, 악업을 지었다면 바로 악업의 그림자가 거기 따라설 겁니다.

그래서 그 몸뚱이 하나가 태어나는데 그 몸뚱이 속에 악업과 선업이 동시에 들어서 모두 지금 현세의 여러분 몸뚱이 속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몸뚱이 속에 있는 것이 어떤 때는 즐거운 마음이 생기게 하고, 어떤 때는 아주 복통이 나게끔 마음이 생기고, 착잡하고 답답할 때가 많이 생기고, 여러 가지가지로 애고가 생기고 유전성이 생기고 또는 업보성이 생기고, 세균성이 생기고 윤회성이 생기고 이 모두가 자기가 살아온 대가입니다. 그것이 쉴 새 없이 나오는 것을 이 불가에서는 바로 숙명통이라고 합니다.

숙명통을 예를 들어서 컴퓨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 숙명통에, 과거로부터 가지고 나온 내 몸뚱이 속에 실려 있는 그 그림자, 그 의식들, 그 모습들은 다 내가 지고 나온 겁니다. 그러니까 타의에서 오는 어떠한 경우라도 이것은 타의의 탓이 아니라 내 탓이라고 돌려야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은 좋은 것이나 언짢은 것이나, 좋은 것이라면 바로 나를 끌고 다니는 내 주인공에 모든 것을 감사하게 놓고 일임하고, 또 잘 안되는 것은 그 모든 과거로부터 그림자처럼 그 컴퓨터에서 입력이 돼서 나오는 거니까 다시 거기다 입력을 하는 것이, 바로 주인공에다 다시 맡겨 놓는 것이 입력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거기다 맡겨 놓고 ‘당신만이 잘 이끌어 줄 수 있어. 당신만이 모든 거를 다 간파할 수 있어. 어떠한 애고든지 어떠한 병고든지, 무엇이든지 해결할 수 있는 건 당신밖에 없어.’ 하고 거기다가 맡겨 놓고 지켜보는 거고, 그리고 지켜보다 보면 체험을 하게 되고 체험을 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진짜 참선입니다. 무조건 틀고 앉았다고 그래서 참선이 아닙니다. 참선이라는 것은 모든 일체, 앉으나 서나 또는 자나 깨나 일하나 어떠한 거든지 참선 아닌 게 없습니다.

여러분 한마음 속에서 빚어지는 그 가지가지 천차만별의 생활, 그러니까 그 마음속에서 나오는, 그 과거로부터 나오는 거를 모두 현실에 나오는 데다가 다시 입력을 하셔야만 될 겁니다. 바깥으로 끄달리고 바깥으로 신을 찾고 바깥으로 부처님을 찾고 바깥으로 칠성, 관세음 모두 찾는다면 그거는 절대로 잘못 가는 일입니다. 이 세상에 못났든 잘났든 자기 빼놓고 뭐가 있겠습니까. 자기로부터 이 세상이 벌어진 것이고 자기로부터 생활이 있는 것이고, 자기로부터 상대성이 있는 것이고 자기로부터 인연의 법칙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자기로 인해서 모두 벌어진 것을, 자기로 인해서 나오는 것을 자기로 인해서 또 거기다가 맡겨 놓는다는 그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모두 몸뚱이가 여러분인 줄 알지 마세요. 여러분의 몸뚱이는 나의 집일 수밖에 없는 거고, 나의 종일 수밖에 없는 거고, 관리인일 수밖에 없는 거고…. 그리고 즉 말하자면 대장 소장 간장 방광 콩팥 심장 간장, 이런 회사의 중역들이 바로 여러분 부분에 있는 거지 딴 데 있는 건 아니겠죠? 그러니 그 수효가, 수십억의 수효가 다 누구겠습니까? 그런데 별쭝나게 ‘나, 나’가 뚜렷하게 선다면 그것은 나로 인해서 내가 망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영원한 것이 못 됩니다, 물질인 이 몸뚱이는. 그러나 그 의식들과 이 마음을 다스리는 마음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은 어떠한 애고가 있더라도 애고가 거기서 나온 거니까,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나온 것이니까 다시금 입력을 그 자리에다 한다면 앞서 입력된 거는 없어지면서 현실의 입력이 들어갑니다. 그래서 운명이니 팔자니 이런 것이 무조건 무너지는 것이라고 봅니다. 모든 것을 개선해서 내가 발전하고 내가 창조하고 내가 자유스럽게 걸어갈 때에 비로소 자유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몸뚱이 안에 과거로부터 내가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그 차원의 그 이미지를 여러분 지금 현실에 모두 가지고 계십니다. 과거는 지나갔으니까 없고 미래는 오지 않았으니까 없을 거고 현실은 공해서 없는 것입니다. 그것도 조금도 쉬지 않고 돌아가고 있습니다. 조금도 쉬지 않고 작용을 합니다. 인간의 두뇌도 바른쪽 왼쪽 조금도 쉬지 않고 작용을 하고 있습니다. 바른쪽 왼쪽 그 핵심에서 바로 사대로 통신을 합니다. 사대로 통신을 해서 다들 그 의식들이 한마음으로 뭉쳐 주는 그런 작업을 합니다.

여러분이 내 한마음 주인공에다 모든 거를 맡겨 놓는다면 그런 작업이 될 것이고, 만약에 ‘내가 나다.’ 그러고 ‘나뿐이지, 뭐!’ 그러고서 내 속에 있는, 작용하는 그 의식들을 무시하거나 또는 모든 일에 모든 것을 다 무시하고 ‘내가 이만하면 나도…. 내가 이런 사람인데….’ 하고 이렇게 나간다면, 내 마음이 그러니 이 속에서들도 그렇게 ‘너가 너라면 나도 나다.’ 하고 이렇게 갈라집니다. 그렇다면 몸에 파워도 올 수 있고 어떤 회사의 직원들이 파워를 낼 수도 있고 그럼으로써 한 몸뚱이가 기울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바로 보이지 않는 데서 보이는 데로 나오는 것이지 보이지 않는다고 그래서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정신계 50%와 물질계 50%가 서로 상응하면서 서로 상대적 원리로써 이것이 같이 화합해서 작용하는 도리를 아셔야 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살림하는 데도 회사에 나가든지 어딜 나가든지 인연의 법칙으로써 인연들이 주어져 있기 때문에 학교도 있고 선생님도 있고 또는 제자도 있고, 모두 이러한 인연들이 한데 합쳤기 때문에 공부할 수 있게 성립이 되는 거지, 그러한 모든 인연들이 성립이 되지 않았더라면 공부할 수 있게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불을 하나 이렇게 켠다 하더라도, 촛불을 하나 켠다 하더라도 초의 인연, 심지의 인연 또는 만드는 사람의 인연, 보는 사람의 인연, 켜는 사람의 인연 모두가 인연이 있기 때문에 바로 불이 켜지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인연의 법칙이 아니라면 우리가 개발이나 과학이나 성립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생활이 과학하고 다르다고 생각은 하지 마세요. 우리 생활이 그대로 과학이자 그냥 그대로 여여한 자유인이 살 수 있는 여여한 생활입니다, 그냥. 그런데 여러분의 마음이 넓지 못하고 옹졸해서, 즉 말하자면 아주 가깝게 우리가 한 식구를 본다면 한 식구만 보이지만 넓게 본다면 인생도 네 자식 내 자식, 내 부모 네 부모 따로 찾을 게 없다는 사실이 나옵니다. 한번 죽어서 다시금 또 딴 집에 가서 태어나고 딴 모습으로 태어나고, 이렇게 연방연방 돌아가면서 그렇게 하다 보니, 구름이 모였다가 또 딴 구름하고 모이고 이럭하다 보니까, 넓게 생각을 한다면 네 구름 내 구름 찾을 게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 나중에 알고 보니까 네 부모가 따로 없고 내 부모가 따로 없고, 네 자식이 따로 없고 내 자식이 따로 없더라. 네 생명이 따로 없고 내 생명이 따로 없고 모두가 둘이 아니더라. 이 모든 자리도 네 자리 내 자리가 둘이 아니요, 동서가 둘이 아니요, 여자 남자가 둘이 아니요, 크고 작음이 둘이 아니요, 모든 일체 만법은 하나로 돌아가는 것인데 그 하나로 돌아가는 것은 어디로 돌아가는 것인가.

우리가 어저께도 얘기했지만 우주의 근본이 인간의 마음의 근본에 직결이 돼 있다. 천 지 인 삼대, 삼심이 다 일심이니 그 일심이 바로 우주하고도 직결이 돼 있지만 이 세상하고도 가설이 돼 있다. 그랬으니 여러분도 바로 지수화풍 네 가지가 대두돼 있기 때문에 광력이나 전력 자력 통신력을 용도에 따라서 충만히 끌어 쓸 수 있는 그러한 여건이 바로 여러분한테 주어져 있다는 것을, 그 사실을 발견하셔야 될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신통이라는 이름이 나온 것입니다. 지수화풍이 대두돼 있기 때문에 그 네 가지 요소가 또 대두돼 있고, 맘대로 끌어 쓸 수 있는 거기 때문에 바로 오신통이라는 게 돼 있습니다. 천이통, 이것은 무전통신기를 말합니다. 듣지 않는 데서 들을 수 있는 거를, 모든 데서 말입니다. 또 마음의 눈으로 전체를 보는 거를 천안통이라고 합니다. 신족통을 지금 용어로 팩시밀리라고 이렇게 표현을 좀 하면 되겠죠? 타심통을 탐지기라고 해도 됩니다. 이게 남의 마음을 아주 상세히 아는 걸 말합니다. 숙명통은 과거로부터, 아까 얘기했지만 과거로부터 나온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 모두가 보는 것도 도가 아니요, 듣는 것도 도가 아닙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보는 것만 해도 엄청난 겁니다. 예를 들어서 달을 이렇게 끌어다가 놓고 보는 거와 같은 거니까요. 한쪽만 보는 게 아닙니다. 천체를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것만 봐도 이것은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거지만 그래도 도가 아니라고 그랬습니다. 듣는 것도 도가 아니요, 아무리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온다 하더라도 도가 아니니라. 남의 속을 아주 빤하게 다 일거일동 안다고 하더라도 도가 아니니라. 과거로부터 어떻게 나온 거를 아주 솔살피 알아도 이것은 도가 아니니라 이랬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 다섯 가지를 볼 때에 우리의 이 몸뚱이, 통 속이라고 합니다, 통 속! 우리 몸뚱이를 통 속이라고 그럽니다, 몸뚱이 안. 만약에 몸뚱이 안에서 내 마음이 벗어나지 못하면 통 안에서 내 몸뚱이를 자유스럽게 굴릴 수가 없고, 바로 이 우주의 모든 섭류를 자유롭게 굴릴 수가 없다는 조건이죠. 그래서 이 몸뚱이 속에 있는 이 모든 마음을 탁, 그 다섯 가지에 속박되지 말고 벗어나야 된다는 얘깁니다. 속박되지 말고 벗어나야만이, 즉 말하자면 누진, 지금 시체로 말하면 레이더망이라고 그래도 아마 비슷할 겁니다, 표현을 하자면. 이거는 레이더망이라고 해도 그건 물질이기 때문에 아니 되는 거지마는 말입니다. 안에서 나오는 것, 바깥에서 들어오는 것 전부 책정하고 통신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은 이 누진에서, 이 다섯 가지에서 벗어나서 누진으로, 누진의 작용으로, 즉 말하자면 양면의 작용으로 핵심적으로 들어가야 이것이 누진이라고 합니다. 누진에서는 맘대로 들고 나고 맘대로 할 수 있는 자유자재권을 가졌습니다, 누진에서는.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아까 얘기했죠? 광력이나 전력 자력 통신력 그런 것들을요. 그러한 모든 그 핵심의 에너지 여건을 주기도 하고 내가 용도에 따라서 쓰기도 할 수 있는 그런 요소를 말한다면 이 물 한 그릇을 목마른 사람에게 주기도 하고 목마르면 자기도 마실 수 있어야만이 그것이 바로 도심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이거를 아무리 봤어도 갖다가 먹을 수 없다면, 쓸 수 없다면 소용이 없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가 아니라고 그랬습니다. 보기만 해도 도가 아니요, 듣고 자유스럽게 그것을 작용을 못한다면 들으나마나죠? 보나마나 들으나마나, 가고 오나마나 모두가 헛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다섯 가지 요소가 내 몸뚱이 속에, 이 정신력에 다 있으니까 눈이 간 데 귀가 가고, 귀가 간 데 냄새가 가고 결정이 가고 부딪침이 가고 모두 이렇듯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까 법회 의식에 있었던 반야심경에도 바로 둘이 아니어서, 고정됨이 없어서 없다고 그랬죠? 그 모두가 내가 아무리 본 것도 없고 들은 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도 목마른 생각이 있고 목마르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 거를 알면 아무 말 없이 물 한 그릇 푹 떠서 탁 주고 탁 자기 먹고 ‘아! 이만하면 목마른 것을 시원하게 축였구나. 이만하면 목마른 갈증이 없을 것을….’ 하면 그뿐이지 거기 뭐가 이론이 붙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오신통에 묶여 있는 것이 오신통이란 얘깁니다. 그러니까 오신통 안에서 벗어나야 된다는 얘깁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우리가 변소에 갈 때 아무 생각 없이 가지, 지금 대변이 마려워서 죽겠는데 대변 마려운 생각뿐이지 거기에 간접적으로 뭐가 들어갑니까? 그 순간에는 말입니다. 들어가서 똥을 팍 싸 놓고 봐야 그때 인제 뭐든 생각나고 그러지, 그 외에는 아예 아무 생각이 없는 겁니다. 그와 같이 아무 생각 없는 그런 마음이 돼야 된다는 얘깁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여러분 끌고 다니는 주인공을 진짜로 믿는다면 아무 생각이 없을 것입니다. 왜? 주인공에서 모든 것을 다, 어떠한 거든지 거기에다, 자가발전소에다 대기만 하면 다 그냥 타 버리니까. 나쁜 것도 타 버리고 좋은 것은 승화되고 이렇게 하니까 모두가…. 보세요. 용광로에다가 모든 것을 집어넣으니까 자동적으로 쇠가 생산돼서 나가죠? 넣는 사람, 작업하는 사람이 작업만 잘한다면 생산돼서 나가는 거는 저절로 자동적으로 나갑니다. 그런데 왜 걱정을 합니까? 걱정할 게 하나도 없죠. “은 나와라 뚝딱” 하면 은 나올 것이고 “금 나와라 뚝딱” 하면 금 나올 것인데 구태여 왜 걱정을 하고 지냅니까? 이 세상에 한번 나서 캠핑을 왔다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어떻게 지내느냐에 따라서, 어떻게 노느냐에 따라서 주어질 것이라는 것만 알면 잘 다스려서 부드럽게 잘 행동하지 남을 원망하거나 남을 증오하지는 않을 겁니다. 이건 한 가정에서 한 철 나다 간다 하더라도 부질없이 싸움이나 하고 이렇게 되니까, 아니, 한 철 나러 왔다가 웬 싸움입니까? 그리고 한 철 나러 왔다가 다 놀면 소꿉장난 놀다가 그냥 툭툭 털고 일어나는 거와 같은 건데 그거 왜들 그럽니까?

그러니까 아내와 남편이라도, 자식과 부모라도, 어떠한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괴로운 것은 거기다 맡기고 서로를 위해서 부드럽게 말해 주고 부드러운 행동을 해 준다면 마음과 마음이 서로 상통해서 서로 한방에 불이 들어오듯 그렇게 에너지에 불이 당겨진단 말입니다. 그러니 마음 편안하니 좋고 화목하니 좋고, 일이 성립이 잘되니 좋고 애고가 없어지니 좋고, 유전성이 없어지니 좋고 이거는 모든 일거일동이 다 좋아지는 겁니다. 이 마음이 하여튼 강하고, 그저 말도 다스리지 않고 속상하는 대로 탁탁 내뱉으면 뱉는 그대로 이 속에서도 그대로 내뱉을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대로 내 속의 그 의식들이 그대로 따르니까요. 그리고 털구멍을 통해서 나고 들면서 자꾸자꾸, 이거는 내 안에 들어 있으니까 내 안에만 들어 있다고 생각 마세요. 세균성도 오염시키는 것이 바로 나가서 끌고 들어오는 데 있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여러분 가정에서 만약에 집을 비워 두면 자손들이 친구들하고 막 들어와서 그냥 분쟁을 일으키고 그러는 거와 같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데서 이 털구멍을 통하고 눈구멍을 통해서 나가서…, 이 집안에 주인이 없다면 그렇다는 얘깁니다. 집안에 주인이 없다면 그냥 뭇 의식들을 끌고 들어와서 막 난장을 벌이고 나가게 되고, 그러면 그 집안이 뭐가 되겠습니까? 이 집도 주인이 없이 아마 일 년이고 이태고 십 년이고 그냥 놔둬 보십시오. 거미줄이 슬고 썩어들어 갑니다. 그와 마찬가집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주장자인 주인이 엄연히 있습니다. 그러니 주인의 그 기둥을 달리 생각하지 마시고…. 세상에는 형상을 믿을 수도 없고, 중들의 고깃덩어리를 믿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름을 믿을 것도 못 되고 허공을 믿을 것도 못 됩니다. 혼자 왔다가 혼자 쳇바퀴 돌듯이 반복하는 세상을 살아나가기에 너무 역겹지 않습니까? 쳇바퀴에서 좀 훨훨 벗어나고 싶진 않습니까? 중이라고 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불교, 이건 중만이 아는 것도 아닙니다. 이 세상 진리가 다 그러합니다. 한 핵심에, 블랙홀이라고 하는 한 핵심에 과학도 의학도 모두 다 여기에 붙어 있는 것입니다. 모두 가설이 돼서 말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에너지를 이 핵심 속에서 다 자기의 용도에 따라서 굴리고 돌아갈 때에 용도에 따라서 끌어 쓰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용도에 따라서 끌어 쓰려니 알아야 끌어 쓰죠. 아, 숟가락을 갖다 주고 먹으라 해도 못 먹는데, “숟가락이 보이지 않습니다. 뭐, 떠 먹을 게 보여야 떠 먹죠.” 요러는 걸요. 하하하….

아, 전력이 지금 들어오고 나가는데 들어오고 나가는 거 보입니까? 보이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불은 들어오고 나가고 하지 않습니까. 전력이 있다는 것은 믿죠? 그렇게 믿듯이 나를 끌고 다니는 내 주인공도 반드시 있다는 그 믿음을, 신념을 가지세요. 그게 없다면 어떻게 하루라도 지낼 수가 있겠습니까? 이름도 없고 빛깔도 없고 쥘 수도 없고 그런 거니까, 어떻게 이름을 붙일 수가 없으니까 ‘주인공’이라고 한 겁니다. 대의적인, 즉 이름입니다. 영화에서도, 007인가 뭐, 거기서도 주인공 죽는 법 못 보셨죠? 주인공이 죽는 법은 없습니다. 영원한 것입니다. 다시 그 용도를 가지고, 또는 대권을 가지고 다시 이 세상에 또 출현할지, 그것은 또 그 다음 일이고요. 하여튼 여러분의 주인공은 틀림없이 이 자리에 있기 때문에 이 자리에 와 계신 겁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얼마나 얍삽한지 남이 좋다 그러면 좋은 걸로 알고 이렇게 하지 마시고요. 어떡하면 좋은 거를 저 사람에게 줄 수 있을까 하는 그 마음 자체가 바로 하늘과 땅과 인간의 그 섭류가 한데 동시에, 우주 법계가 한데 합치는 마음입니다. 그저 남에게 그냥 준다고 해서 이것이 공덕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이 도량에도 ‘아, 이것이 중들의 도량이 아니라 우리들과 중들과 동시에 같이 배우는 한도량이구나.’ 이렇게 생각한다면, ‘아, 그냥 그 도량에서 일주일 일주일 우리가 가는 그런 거니까 십시일반으로 그저 2불이든 3불이든 내가 같이같이 이렇게 해서 해야겠다.’ 하는 이런 마음이 중요하지 내가 내 이름을 내서 저 방송국에 갖다가 아이, 그 이름을 척 써서 아, 좋은 일을 해 달라고 이렇게 갖다 주는 건 공덕이 못 됩니다. 자기 이름을 자기가 좀 위대하게 하려고 하는 것밖에 안 되니까 말입니다. 공덕이란 이 우주 법계에서 다 알고 결정을 짓는 것이 공덕입니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이 미국에 올 때는 여러 분이 달러를 바꿔서 정성스럽게 해서 싸 줍니다. 또 어떤 때는 거기 있는데도 용돈이 참 많이 들어갈 테니까 용돈을 쓰라고 줍니다. 주는데 그 용돈 주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들인가 검토를 합니다. 그런데 이 도리를 잘 배워서 회사의 회장 노릇 하는 사람들, 뭐 사장 노릇 하는 사람들, 뭐 별 사람 다 많죠. 과학자든 물리학자든 이런 사람들이 전부 팀들이 죄 돼 있습니다, 서울은. 그럭해 가지고 이 공부를 하면서 이렇게 가니까 너무들 신기하게 잘되거든요. 상대방의 모든 것들도 다 조절할 수 있고 아, 그냥 내 회사 직원들도 잘 조절할 수 있고, 이렇게 되니까 나한테 용돈을 갖다 줘도 몇 배가 남는 겁니다.

그런데 나는 또 어떻게 하는 줄 아십니까? 그거를 이제 우리 스님 시켜서 차곡차곡 또 모아 놓습니다. 그랬다가, 전세도 사글세도 들 수 없어서 방을 내쫓기는 이런 형편에 도달하는 사람들이 어떤 때는 드문드문 있습니다. 그런 때는 누가 볼세라, 왜냐하면 그 사람도 사람입니다. 내가 절에 와서 도움이나 받고 이런다고 소문이 나면 그 사람 마음이 좋겠습니까? 그러니까 넌지시 그것을 줍니다. 하다못해 방이라도 나가라, 들어가라 이런 소리는 없어야 될 거 아닙니까. 먹는 거는 어떻게 먹더라도 말입니다.

(다음 호에 계속)

※위 법문은 대행 스님께서 1992년 6월 28일 오하이오지원 법회에서 설법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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