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영순 전국저시력인연합회장

현재 앞이 보이지 않는 미영순 씨는 신경질환으로 엄지가 정상인처럼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힘차게 엄지척을 하는 그녀의 모습은 당당한 불자, 그 자체였다. 그녀는 저시력인들도 정상인처럼 당당하게 활동했으면 한다고 바람을 밝혔다.

부처님 10대 제자 중 아나율 존자는 시각장애인이다. 부처님 설법 도중 잠이 든 아나율 존자는 부처님의 경책에 수마(睡魔)와 싸워가며 쉼 없이 정진했다. 아나율 존자의 눈 앞은 점점 어두워졌고, 부처님도 아나율 존자의 수행을 만류했다. 하지만 아나율 존자는 끝없이 정진 결국 지혜의 눈을 얻어 ‘천안제일(天眼第一)’로 불리게 된다.

고등학교 2학년, 꿈 많던 한 소녀의 눈 앞도 마치 아나율 존자처럼 깜깜해졌다. 시력이 안 좋아지긴 했으나 실명할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10대 소녀에게 세상은 암흑천지였다. 하지만 이 소녀에게는 부처님 가르침이 있었다. 아나율 존자와 같이 끊임없는 정진을 이어오고 있는 미영순 씨(米榮順)의 이야기다.

 

불교에서 찾은 인생 해답

신에 대한 의문, 철학서 탐독

이오네스카 ‘禪’ 설명 관심

<선가귀감> 속 묘사에 발심

룸비니 불교학생회서 활동

 

급작스런 좌절에도 희망 품어

고2 때 망막맥락염 진단

6개월간 실명, 신경통 앓아

“눈 안보이니 다른 감각 살아

苦 뒷면엔 樂이 세상 이치”

 

자아비판 가능한 불교에 매력 느껴

“만약 불교를 몰랐다면 정말이지 자살하지 않았을까요? 부처님 가르침은 어두웠던 제 인생의 나침반이자 한줄기 빛이에요.”

미 씨의 집안은 기독교였다. 미 씨의 아버지는 함북 경성 출신이지만 6ㆍ10만세운동에 연루돼 17세에 중국 하얼빈으로 피신했다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당시 하얼빈대학 교수였던 미 씨의 어머니를 만났다. 미 씨의 부모님은 한국전쟁 직전 월남해 48년 서울에서 미 씨를 낳았다. 어머니가 기독교 신자였기에 자연스럽게 미 씨는 교회에 다니게 됐다.

“어머니 6촌 오빠가 한신대를 세운 김재준 목사세요. 온 집안이 독실한 기독교였지요. 성경암송대회에 나가서 1등을 할 정도였던 저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신의 존재에 대해 의문이 들었어요. 왜 신은 평등한데 교회 구조는 피라미드 형식인가는 의문에서였죠. 저에게는 인드라망이 와 닿았어요. 1960년 중학교 1학년 때 수유리로 이사를 가며 이런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신학 공부를 열심히 하게 됩니다. 당연히 철학책도 많이 봤구요. 결국 독일 철학자 ‘야스퍼스’가 답을 줬습니다. ‘아무도 내게 열쇠를 집어주는 사람은 없다. 이 길을 쭉 가면 열쇠가 있고, 길이 나올 것이다’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는 철학이 답해주지 못한 목마름이 있었다. 철학이란 진리를 찾아보겠다는 방법일 뿐 진리는 아니라는 걸 짐직하고 김이 빠져있던 고등학교 1학년, 미 씨는 〈대머리 여가수〉의 저자 이오네스코가 선(禪)에 대해 쓴 글을 읽었다.

“Who am I? What is in my heart? 하고 물으면 사부께서 따귀를 때려주는 것, 정답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요. 멍멍하던 귀가 확 뚫린 듯 후련한 것 같았어요.”

이 후 미 씨는 미국공보원에서 하는 영어회화 모임에서 한 남학생으로부터 봉은사 룸비니 불교학생회를 소개받았다.

“어려서는 불교를 역사와 전통이 있는 큰 무당 쯤으로 알고 있었어요. 룸비니 불교학생회가 당시에는 대각사에서 있었는데, 이른바 큰 무당 지도법사겠죠? 호호. 김지석 고려대 철학과 교수님이 강연을 하셨어요. 김 교수님과의 첫 만남에서 저는 무참하게 깨졌죠. 있지도 없지도 않다는 공(空)을 무엇으로 깨부수겠어요. 백기를 들고 말았죠.”

미 씨는 이후 불교경전을 열심히 읽었다. 구해지는 대로 잠도 자지 않고 읽고, 조사어록도 읽으며 조금씩 불자가 되어 갔다. 〈반야심경〉부터 〈능엄경〉, 〈화엄경〉, 〈육조단경〉 등을 보았는데 그 중 미 씨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선가귀감〉이었다.

“〈선가귀감〉에서 선비가 길을 잃어버리는 대목이 나옵니다. 갈림길에서 가시덩쿨과 횃불을 든 도둑이 기다리는 내용이죠. 저는 그 도둑을 스님으로 봤어요. ‘아! 불교는 자아비판이 가능한 종교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철학이 아닌 종교가 자아비판을 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에요. 그래서 공부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죠.”

매주 토요일마다 미 씨는 대각사로 향했다. 하루는 그녀가 청담 스님에게 “왜 불교는 이렇게 좋은 교리를 가지고도 이 것밖에 못하나요?”라고 당돌하게 묻자 스님은 미소 지으며 미 씨에게 “그러게 말일세, 자네가 와서 잘해보게”라고 말했다고 한다.

미 씨는 “직접 만나본 스님은 ‘아! 도인이구나, 이것이 도인이구나’는 생각이 절로 들게 했다”고 말했다.

미 씨는 청담 스님이 출가를 은근히 권하신 것으로 당시 일화를 풀이했다.

“스님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속세에서 머리를 안 깎았어도 머리 깎은 사람처럼 다할 테니 깎으라고 하지 마세요.’라고요. 당시의 저는 ‘건방과 맹랑’을 빼면 시체였으니까요.”

여생은 아나율 존자 같이 전법 회향

최근 고령으로 시력 개선을 위한 약을 끊어 앞이 보이지 않지만 그녀가 ‘心眼’으로 바라본 세상의 이야기는 아름다웠다.

제2의 인생, 저시력인 위한 삶

끊임없는 노력, 국제전문가 활약

대만 유학 후 귀국해 봉사 나서

1999년 저시력인연합회 창립

장애인식 개선 및 도움 활동 전개

“받은 도움, 회향이 인생 목표”

 

佛心이 낳은 한국의 헬렌 켈러

밝은 성격을 지닌 10대의 그녀에게 갑작스런 시력 상실은 그야말로 청천벽력과 같은 것이었다. 그녀는 1964년 경기여고 2학년 재학 당시 시력을 잃었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점차 시력이 나빠져 도수가 높은 안경을 썼지만 실명까지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체감했을 때는 봉은사 룸비니 불교학생회 활동을 한창 하던 중이었다.

“1964년 12월 15일이었어요. 박정희 대통령이 민간인 신분으로 나와 대통령 선거가 진행된 날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당시 불교학생회 법우들과 북한산 등반을 했어요. 그 전에 이미 거리 감각은 없었던 것을 느끼고 있었죠. 등반 중에 바위 사이를 건너는 길이 있는데, 다른 법우들은 폴짝 뛰어서 뛰어넘은 그 바위에서 거리를 잘못 재어 그만 굴러 떨어지고 말았어요. 놀라서 구하러 뛰어내려 온 친구들에게 ‘염라대왕이 나를 잡상인인지 알았나봐, 내 쫓았어’라고 너스레를 떨었지만 몸보다 제 눈이 심각한 상태란 걸 직감했어요.”

미 씨는 점점 나빠지는 눈에 안과병원에서 정밀검사를 했다. 하지만 의사도, 부모님도 한창 나이인 10대 소녀에게 쉽게 말을 건네지 못했다. 판정 소명은 망막맥락염. 빛을 수용하는 망막세포에 이상이 생겨 낮과 밤을 어렴풋이 가릴 수 있는 후천성 희귀질환이었다. 이미 수년째 망막 손상이 진행돼 야맹증이 왔지만 어린 나이에 설마 하는 생각이 병을 키웠다.

“6개월 동안은 완전히 암흑천지였어요. 녹내장과 백내장 등 눈과 관련된 모든 질병이 차례로 찾아왔죠.”

사투를 벌인 미 씨는 희미하게나마 사물을 볼 수 있게 됐다. 처지는 나아지긴 했지만, 정상적인 생활은 어려웠다. 계단의 끝이 보이지 않아 발을 헛디디고 길의 움푹 파인 곳을 보고 멈춰서기 일쑤였다. 그 무엇보다 신경통이 심각했다.

“시 신경 치료를 하면 눈이 빠질 듯이 아파요. 눈이 터질 듯이 아프면 머리가 멍합니다. 이런 고통을 극복하는데 부처님 가르침이 큰 힘이 됐습니다. 인생에는 고의 뒷면에는 낙(樂)도 있다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이죠. 저에게는 고통이 없어요. 통(痛)은 있지만 고(苦)까지 연결되지는 않죠. 고는 통을 괴롭게 받아들일 때 고통이 됩니다. 통도 즐기면 고가 되지 않아요. 눈이 보이지 않으니 신기하게 다른 감각이 발달하더군요. 장판지 밑에 아버지가 감춰놓은 비자금도 알아차리고요. 호호.”

 

마음을 통해 세상을 보다

앞이 보이지 않아도 그녀는 점자를 배우며 학업을 이어갔다.

버스정류장에 버스가 서면 “8번 버스인가요?”라고 물어서 탔고 그 것마저 힘들 때는 종이에 ‘8번’을 써서 버스를 세웠다. 인근 점자책이 있는 도서관을 가기 위해 육교의 계단 수를 외워 오르내렸다.

그렇게 집에 돌아오면 온 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그 어려운 와중에도 미 씨는 부모님에게는 내색 한번 하지 않았다.

다니던 학교에 휴학원을 낸 미 씨는 수유리의 여맹원에서 점자를 배우기 시작했다. 룸비니불교학생회에는 나가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가 헤매며 찾았던 것, 철학책들의 한계를 딛고, 삶을 이해할 수 있었다.

미 씨는 이 무렵 인근 화계사를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자주 찾았고 숭산 스님과 인연을 맺는다. 하루는 미 씨는 화계사 계단을 오르지 못하고 범종 옆에서 법회 소리를 듣고만 있었다고 한다. 이런 미 씨를 발견한 숭산 스님은 “왜 학교에 가지 않고 절로 오느냐”며 미 씨를 불러 자신의 방에서 법문을 들려줬다.

“여기 선을 그어 한 쪽에는 X, 다른 쪽에는 Y라고 하자. X와 Y사이에 보이지 않는 연결고리를 찾는 것이 바로 불교이니라.”

하지만 밝은 성격의 미 씨는 “스님, 공통인자는 Z가 아닐까요? 전 Z를 찾아보겠습니다”고 답했다.

한번은 숭산 스님이 미 씨에게 “한 손으로 손뼉을 쳐보라”고 했다. 미 씨는 냉큼 달려가 벽을 쳤다.

“사실 그게 화두를 주신 것 같은데…….말 그대로 맹랑했으니, 스님이 그저 ‘쩝쩝’ 입을 다시시더라고요. 결국 스님은 ‘안 되겠다. 넌 그냥해라’고 하셨지요.”

그 후 세월이 많이 지나 미 씨가 반백이 된 뒤 스님을 찾자 숭산 스님은 그녀에게 “티끌처럼 작아도 세상을 품는 넉넉한 쉼터에 연꽃이 피어났구나”고 격려했다. 2004년 미 씨의 수필집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여자〉 발간 시에도 스님은 추천사로 애틋한 마음을 전했다.

“스님에게 약속한 Z는 아직 못 찾았지요. 아무튼 눈이 아니라 마음을 통해 세상을 보는 것을 터득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조금씩 노력하자 세상이 희미하게 보인 것은 ‘심안’일까. 미 씨는 “돌멩이 하나도, 쓰레기 하나조차도 모두 아름답게 보였다”고 말했다. 1년 만에 다시 복학, 글자를 겨우 보는 시력에도 불구하고 1967년 고교과정을 무사히 마쳤다.

하지만 시각장애인이 된 그녀가 갈 수 있는 대학은 많지 않았다. 결국 1973년 방송통신대 가정학과에 진학했다. 아버지가 새벽에 일어나 강의방송을 녹음하고, 낮에 들려줬다. 교재를 읽어주는 학생들의 도움으로 결국 미 씨는 방통대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국민대 정외과에 장학생으로 편입하며 이러한 열정은 더했다. 1980년 국민대를 졸업한 그녀는 이듬해인 1981년 지도교수의 추천으로 대만국립정치대에 장학생으로 유학을 떠났다.

“안 보여도 공부를 할 수 있어요. 눈이 터질 듯한 안압 때문에 책 읽기가 힘들었어요, 그래서 한번 읽으면 끝날 수 있게 외웠지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하나하나에 집중하면 가능합니다.”

1984년 석사과정을 마친 뒤 박사과정까지 밟아 결국 1990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 씨는 1989년 귀국 후 ‘세종연구소’와 ‘북방연구소’에서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2016년 영등포본동 자원봉사캠프 후원 모습.

받은 도움, 모두 회향이 인생 목표

미 씨는 당시 유학생활에서 돌아올 때 많은 생각을 했다고 털어놨다.

“저를 태어나게 해준 부모님을 비롯해 교수님, 스님, 그리고 필기를 해주고 식사를 도와준 친구, 도우미 등 모든 분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되갚자고 생각했습니다.”

연구소 연구위원으로 일하며 미 씨는 제일 먼저 호스피스 교육을 받고 양로원을 다녔다. 보육원과 장애인 시설인 소쩍새 마을 등 가리지 않고 도움이 되는 곳이라면 찾아갔다. 그 무렵 ‘한국의 헬렌 켈러’로 언론에 소개된 미 씨에게 저시력인들이 하나둘 씩 찾아왔고 이들의 사연을 들으며 다독였다.

이들의 수가 늘어나자 미 씨는 1999년 50여 명의 저시력인들과 전국저시력인연합회를 들었다. 가장 먼저 그녀는 ‘약시’로 통용되던 시각장애를 구분해 ‘저시력’이란 법률 용어로 정착시켰다. 또 저시력인을 위한 확대독서기 보급사업도 펼쳤다. 김안과병원의 도움으로 연합회는 저시력인들의 사연을 담은 〈마음으로 보는 세상〉을 펴내기도 했다.

현재 전국저시력인연합회는 저시력인 어르신들을 위한 봉사와 저시력 어린이나 저시력 부모 자녀를 위한 심리상담도 한다. 대학생들을 모집해 저시력인 멘토링 사업도 진행하는가 하면 저시력인 아이들을 데리고 국악마당 등 문화를 체험하기도 한다.

특징은 모두가 다른 저시력인들이 봉사자로 참여한다. 시각장애인들이 오히려 도움을 많이 받기 때문에 ‘세상과 주위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자’는 취지에서였다.

“불교에서는 원래 ‘내 것’이 없어요. 그러니 나눌 것도 없겠지요. ‘나눔’이나 ‘베풂’이 아니라, ‘돌려줌’, ‘갚음’입니다. 저처럼 다른 이들에게 많이 받고 산 사람말고도, 고마웠던 혹은 미안했던 일이 있는 사람을 어루만지는게 중요하지요.”

연합회 활동과 별개로 미 씨는 김안과병원에서 저시력 아이들과 부모를 대상으로 상담업무를 하고 있다. 최근에는 고령으로 약을 먹지 않아 시력이 더욱 나빠진 상태지만 첫째주와 셋째주 주말은 자택에 가까운 해군 통해사에서 신행활동을 하고, 불자장애인모임 보리수아래에도 나간다. 넷째주 주말은 조계종 산악회와 함께 산행에도 나선다.

미영순 씨는 봉사자의 도움으로 등반활동도 하고 있다.

최근 저시력인 1600여 명과 함께 해군 2함대를 방문하기도 한 그녀는 오래 전 자신과 같이 가슴앓이를 하며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헤메는 이들이 조금이라도 희망을 되찾기를 기원했다. 지금도 강연과 상담 수입의 삼분의 일 이상을 기부하는 그녀는 생명나눔실천본부에 전신을 사후 기증 약속한 상태다.

여고 재학 시절 미 씨는 복학 후 다른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해 개나리 두 그루가 우거진 일명 ‘개나리 다방’에서 사색을 즐겼다. 여생동안 미 씨는 자신에게 힘이 된 개나리 나무처럼 미약하지만 다른 장애인들에게 버팀목이 되고 싶다고 털어놨다.

“한가지 걱정이 있어요. 아직 쓸 만 할 때 남겨주고 가야지. 넝마가 다 돼서 주면 어쩌나 이 생각이죠. 호호.”

밝은 미소를 지은 그녀의 모습은 개나리를 닮아 있었다.

 

희미하게 앞이 보이던 시절, 관음보살로 그린 어머니

 

미영순 씨는? 경기여고 재학 시절 실명에 가까운 시력장애를 얻었다. 방송통신대와 국민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대만문화대학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세종연구소, 북방연구소 연구위원을 역임했으며, 중국 흑룡강성대 객원교수를 맡기도 했다. 현재 전국저시력인연합회 대표로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2004 이웃돕기 유공자 국민포장’을 수상했으며 〈새벽 산사에 가보세요〉 〈눈물 고인 가슴에 눈물 대신 품은 뜻〉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여자〉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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