⑫ 중흥사서 문수사 가는 길

서울을 내려다 보는 북한산 문수봉 전경. 새비지 랜도어는 중흥사에서 문수사로 가는 길목의 이 봉우리에서 조용한 우리나라의 아름다움을 느끼지 않았을까. 그의 행적은 유별나 보이지만 사찰순례에서 얻은 영감이 우리나라를 평가하는데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하다.

 등산객 하나가 나보다 앞서 어기적어기적 비탈길을 오른다. 나는 그의 등 뒤에서 가물거리는 옛사람의 자취를 본다. 잘 알려진 사람부터, 덜 알려진 사람, 그리고 전혀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이 북한산 중성문 안쪽에 있는 중흥동을 지난다.

새비지 ‘아침의 나라’ 평가

북한산 산행에서 비롯돼

그의 여행기는 일종의 참배기

북한산성 축조를 명령한 숙종이 지났고, 산영루 터에 시비를 남긴 정약용이 지났다. 중흥사 주지 태고 보우 대사가 지났고, 생육신 김시습이 지났다. 총융사(摠戎使)를 지내 산영루 왼쪽 비석거리에 이름을 남긴 신헌이 지났고, 안무사(按撫使)라 불리며 민심을 수습했던 김성근이 지났다.

모두 당대의 명사였지만, 영국 여행가 아놀드 새비지 랜도어(Arnold H. Savage Landor)만큼 눈에 띄지는 않는다.

복원불사 중인 중흥사 만세루

중흥사(重興寺)는 비석거리 왼쪽에 있다. 비석거리에서 조금 아래 이정표가 있는 갈림길 오른쪽, 계류를 건너 이어지는 길은 의상능선의 부왕동암문으로 올라선다.

중흥사를 창건한 시기는 12세기 초로 추측한다. 고려 숙종 8년에 제작된 중흥사의 금고(金鼓), 군대에서 지휘용으로 쓰던 징과 북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거란이 고려를 침범했을 때는 태조의 재궁(齋宮)을 이곳으로 옮겨왔다. 혹여 거란족이 불을 지를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후 중흥사는 무슨 까닭인지 갑작스레 폐사지로 변했다. 중흥사가 최후에 이른 것은 고종 때 입은 두 차례의 화재 때문이었다. 설상가상으로 1915년에는 대홍수까지 겪었다.

북한산을 유람하는 주요 인사들은 으레 북한산성 수비의 중심지였던 중흥사에 들렀다. 새비지 랜도어는 1890년 중흥사를 다녀갔다. 호기심이 많은 데다 모험심까지 강한 이 청년화가는 몇 장의 그림과 함께 ‘고요한 아침 나라 조선. Corea of Cho-Sen : The land of The Morning Calm’이란 여행기를 쓴다. 그의 중흥사 견문기는 북한산 중흥사를 처음 방문하는 이방인의 시선을 보여 준다. 상부에서 특별한 지시가 있었는지 중흥사 스님들은 푸른 눈의 새비지에게 유별난 친절을 베풀었다. 새비지의 눈이 여유롭게 가람을 쓰다듬는다.

보현봉을 바라보는 문수사 전경

그곳에 방문했을 때, 승려들은 나를 공손하게 대해 주었으며 진기한 것들을 보여 주었다. 나는 마중 나온 스님들과 인사를 나누는 이방인 새비지 랜도어 곁에 슬그머니 다가선다. 2015년과 1890년이 접촉하지만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

중흥사는 다른 절보다 보존상태가 훨씬 좋았으며, 지붕 밑의 단청과 장식이 밝은 색조를 띤 것으로 보아 최근에 개축한 것 같았다. 불광사 회주 지홍 스님의 불사로 대웅전이 복원됐다. 아직 단청을 하지 않은 전각에서 알싸한 나무냄새가 났다. 새비지가 길을 묻듯 내 곁에 가까이 왔으므로 태고사 쪽으로 함께 걸음을 옮긴다. 이번엔 1980년이 2015년과 나란히 길을 걷는다. 태고사의 옛 이름은 중흥사를 중수했을 때 지은 태고암이다. 대웅전과 산신각을 거쳐 올라간 새비지는 그 옛날에 무심코 지나쳐보았던 부도 한 기를 뒷동산에서 발견해낸다. 우리나라 불교 여러 종단에서 종조(宗祖)와 중흥조(中興祖)로 숭배하는 태고 보우 대사, 그의 입적을 기려 세운 원증국사부도탑이다.

태고사를 나와 새비지 랜도어와 함께 오른 길은 청수동암문 방향이었다. 중흥사에서 청수동암문 방향으로 경사가 완만한 계곡을 이삼백 미터 올라가면 행궁(行宮)이 나온다.

전란을 피해 임금이 거처하는 산속의 궁전이 행궁이다. 임진왜란 같은 병화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소원하며 1711년에 숙종이 지었다. 새비지는 이 궁전에 대해 ‘서까래가 썩어 지붕이 무너져 내린 집이 많았으며, 주요 건물도 매우 황폐했다’라고 묘사한다. 고종의 어진을 유화로 그린 화가다운 관찰이었다.

새비지 랜도어는 성벽 너머 조계폭포를 보면서 다시 산을 오른다. 계곡을 따라 오르면 어영청 유영지가 나오는데, 그 왼쪽 길을 통해 대성문이 있는 능선에 올랐고, 대성문을 거쳐 대남문을 찾아갔다. 지붕이 없는 대남문 너머로 오래된 암자 한 채가 보인다.

125년 전의 새비지 랜도어는 대남문을 지나 절벽에 가까스로 난 좁은 길에 발을 디뎠다. 문수봉에 매달리듯 기댄, 지금은 문수사(文殊寺)로 부르는 작은 암자의 위태로운 아름다움을 만끽할 요량이었다. 과연 그는 모험심이 강한 제국의 괴짜 청년이었다. 새비지(Savage), 야만인이라는 별칭을 이름 앞에 공연히 덧붙인 게 아니었다.

절벽 끄트머리에서 작은 절이 암반을 등지고 있었다. 이곳으로 들어가는 길은 한 사람이 겨우 드나들 만한 폭이어서, 조금만 발을 잘못 디뎌도 낭떠러지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위험을 각오해야 한다.

지금은 쇠기둥을 단단히 박고 그 위에 고무를 깐 계단을 설치해서 누구나 안전하게 절벽을 통과해 문수사로 갈 수 있다. 건너편 보현봉이 구름 위에 앉아 둥둥 떠간다. 북한산에서 절경을 감상할 수 있는 각도의 하나가 보현봉을 바라보는 문수사임을 아는 사람은 안다.

문수사에 있는 불상들은 새비지에게는 낯설지만 우리에게는 낯익은 것들이다. ‘어떤 신상은 긴 관복에 깃을 단 관모를 쓰고 평온하고 위엄 있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 외의 신상은 사나운 눈매에 호전적인 무사의 형상이었다.’ 사천왕상이나 지장전의 시왕을 표현했음직한 새비지의 문장은 웃음을 자아낸다.

유래가 깊어 설까, 절이라 불러야 할지 암자라 불러야 할지 곤혹스러울 만치 문수사는 꽤 여러 전각을 거느리고 있다. 그러나 문수사를 대표하는 것은 문수굴이라고 부르는, 문수천연동굴(三角山天然文殊洞窟)이다. 새비지도 이를 놓치지 않았다.

태고사 원증국사사리탑

새비지의 북한산행은 그가 의도했든 안 했든 중흥사와 태고사, 문수사를 거침으로써 사찰순례가 돼버렸다. 그의 하산길은 내리막이 길기로 소문난 구기동 계곡이었다. 그리고는 그 당시 북문이라고 부르는 홍지문을 통해 서울로 들어갔다.

언제 어디서 새비지와 헤어졌는지 모르겠다. 구기동 계곡을 빠져나와 버스 정거장으로 가는 동안 어느새 나는 혼자였다. 125년의 역사가 기나긴 꿈을 꾸다 깨어난 듯 눈앞이 몽롱했다.

영국에서 태어나고 프랑스에서 미술을 공부한 아놀드 새비지 랜도어는 나와 헤어진 뒤에도 역마살이 낀 사람처럼 오대양 육대주를 찾아다녔다. 그는 미국, 호주, 아프리카, 대서양의 아조레즈군도를 여행했고, 민다나오에 체류할 때는 그곳에 백인종 만사카스가 살고 있음을 외부 세계에 알렸다.

러시아와 인도의 지리를 연구했고, 아프리카와 남미를 횡단했으며, 네팔의 룸파산을 등반했다.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벨기에 정부에 고용되어 전령으로 활약했다는 전언도 있다. 그의 행적이 유별나 보이지만 어쩌면 사람마다 자기 생이 지시하는 길을 가야 하는, 의무 아닌 의무가 있지 않을까. 나 또한 내게 남아 있는 길을 다 걸어야 하니.

걷는길 : 북한산성 버스역 - 대서문 - 중성문 - 중흥사 - 태고사 - 행궁지 - 대남문 - 문수사 - 구기동 계곡

거리와 시간 : 12km 정도, 5시간 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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