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재단, 〈5·18의 기억과 역사〉 불교편 발행

5.18 광주 민주화운동 37주년을 맞아 당시 불교 사부대중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망라한 구술사 연구서가 나와 눈길을 끈다. 5.18기념재단은 최근 〈구술생애사를 통해 본 5·18의 기억과 역사 8-불교·원불교〉편을 발간했다.〈사진

불교편에는 성연 스님(증심사), 의연 스님(백양사), 이광영(당시 진각 스님), 故김동수 열사, 박행삼, 김호균, 김형귀, 김광수, 정철 등 당시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불교 인사들의 구술 인터뷰가 실렸다.

구호 활동 참여 진각 스님
척추관통상 입어, 반신불수
환속 후 5.18부상자회 결성

성연 스님도 참여 후 고초
민불련 창립 기여 등 활동

관음사·증심사 등 지역사찰
불자회 활동상도 확인돼

이들의 인터뷰는 당시 불교계가 어떻게 활동했는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증언들이다. 급박했던 순간에 대한 기억들과 더불어 5.18이 개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알 수 있는 역사 자료이기도 하다.

가장 극적인 삶을 보여준 인물은 진각 스님으로 적십자 구호활동에 참여했던 이광영 씨다. 본래 화엄사 스님으로 1980년 당시 나주 다보사에서 공부하던 그는 광주 증심사의 부처님오신날 행사를 돕기 위해 광주에 왔다가 항쟁에 참여했다.

5월 19일 도반 성연 스님과 함께 시장에 갔다가 계엄군의 시위 진압을 목격하고 스스로 시위에 나갔다. 참혹한 현장을 목도한 진각 스님은 헬리콥터의 기총사격으로 쓰러진 여학생을 적십자 병원으로 옮기게 되고, 의사의 부탁으로 적십자 봉사대원으로 활동한다.

혈액 보급과 환자 후송을 하던 진각 스님은 도청 근처에서 계엄군의 총격을 받게 되고, 부상자를 돕던 중 척추에 총을 맞았다. 대수술 끝에 목숨은 건졌지만, 하반신은 마비됐다.

당시 상황에 대해 진각 스님은 “몸이 저릴 때 나는 느낌이 총소리가 들리자마자 척추에 왔다. 그러고는 몸에 힘이 하나도 없이 그냥 그 자리에 넘어졌다”며 “그때부터 총을 연발로 쐈다. 두 명이 차를 못 타서 죽었다”고 말했다.

항쟁 이후 반신불수가 된 진각 스님은 사찰로 돌아가지 못하고 환속해 결혼했다. 이후에도 고초는 계속 이어졌다. 반신불수가 됐지만 ‘폭도’로 분류돼 강제 퇴원돼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못했고, 지속적인 감시와 탄압 속에 살았다. 그러면서도 1982년 5.18부상자회 창립에 참여하는 등 운동 당시 부상을 입었던 시민들의 치료·보상을 위해 노력했다.

진각 스님의 도반 성연 스님도 시위에 참가했다. 구호대에서 활동한 진각 스님의 총상 소식에 그를 찾았을 당시 소회는 가슴을 아프게 한다.

성연 스님은 “진각 스님이 부모님 오시기 전에 자신을 증심사의 토굴로 옮기고, 그곳에서 염불하며 연탄을 피워달라고 했다. 빨리 이 몸을 벗고 인도환생해 다시 승려의 길을 가겠다는 것이다”며 “공감은 한다. 하지만 그럴 수 있는가. 결국 부모님이 오셔서 치료를 받게 됐다”고 술회했다.

항쟁 이후 성연 스님은 민주화운동에 투신했고, 1985년 민중불교연합 창립에 참여하고 이념분과위원장을 맡았다. 또한 인천 항쟁에 참여해 시위하다 구속됐다.

동생인 김동채 씨가 구술한 故김동수 열사의 삶에서는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전남지부와 원각사의 활동 일켠을 알 수 있다. 구술자는 “원각사는 금남로에 있는데 항쟁 당시 시민들이 피를 흘리고 절마당에 쓰러지니 신도들은 난리가 났다. 그때부터 신도들이 항쟁에 참여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광주불교학생회 22대 회장이었던 김형귀 씨는 광주 관음사의 봉축 준비를 하던 중 항쟁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대동고 교사였던 박행삼 씨(원각사 불일학생회 지도교사)는 고향 해남으로 가서 시민군을 조직해 광주로 오던 중 계엄군에게 무장해제를 당하기도 했다.

함께 수록된 정철 법사(광주불교교육원)의 소논문은 5.18민주화운동에서 불교의 역할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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