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꿈꿔오던 직업을 가졌고 그래서 정말로 즐겁게 생활한다던 외국에 사는 친구가 어느 날 잠들기 전, 노래를 하나 보내왔다. 학창시절 좋아한 ‘마왕’ 신해철의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였다.

“흐르는 시간 속에서 질문은 지워지지 않네. 우린 그 무엇을 찾아 이 세상에 왔을까”

이 때문에 결국 우리는 ‘사는 게 뭘까’라는 매우 흔하지만 어려운 문제에 대해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친구는 하루하루 즐겁게 원하던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그 역시 반복됨을 알게 된 어느 날, 자기 안에 숨어있던 이 질문이 다시 떠올랐다고 했다. 그리고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단다. 친구와 대화를 마치고 잠을 청하며, 안타깝게도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 ‘마왕’은 그 답을 찾고 눈을 감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무엇을 찾아 이 세상에 왔는지’ 나는 이미 알고 있었기에 이 질문에 대해 새삼 친구와 의문을 품을 이유가 없었다. 아니, 완전히 알지는 못해도 그 대답은 이미 숱하게 많이 들어보았다.

우리는 욕망 때문에 이 세상에 온 것이고, 행복이라는 이름의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살아간다. 욕망의 실현은 행위를 불러일으키고, 행위는 반드시 결과를 남긴다. 남겨진 결과의 힘이란 참으로 무서우리만큼 정직하다.

그래서 3가지 선한 행위를 하고 5가지 악한 행위를 했을 때 2가지 악한 행위의 결과만 받아 소진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3가지 선한 행위의 결과는 그 결과대로 기쁨을 누려야 하고, 5가지 악한 행위의 결과는 또 그 결과대로 고통을 받으며 소진해야만 한다.

그렇게 남겨진 결과(할머니들은 이를 ‘업보’라 부른다)를 다 소진할 때까지 우린 다음 생으로, 또 다음 생으로 이어지게 된다. 물론 결과를 만들어내는 행위는 어디까지나 ‘내 마음’이 주체이기 때문에 결정론이나 운명론과는 다르다.

이처럼 지난 생의 행위의 결과인 업보 때문에 이 세상에 왔음을 난 알고 있었는데 왜 친구에게 말하지 못했을까.

업보로 인해 이 세상에 왔고, 또 다음 생으로 간다고 하는 ‘윤회’는 시간과 공간 개념을 삶과 죽음 너머까지 확장시켜야하기 때문에 종교가 다른 이와 진지하게 나눌 수 있는 주제는 아니다. 사실 불교학을 공부하는 불교학자라고 해도 윤회의 관념을 하나의 상징체계로 이해하는 사람을 많이 봐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린 그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왔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불교는 분명히 대답을 주고 있다. 시작을 알 수 없는 그 언젠가부터 내 마음에 잠재되어 있는 욕망은 생을 달리하면서 여러 조건을 만나 싹을 틔운다. 그래서 그 욕망을 끊어내지 못하는 한, 꿀을 찾는 벌처럼 우린 그 욕망을 찾아 이 세상에 또 올 것이다.

이 이야기를 그 친구가 듣는다면 여전히 ‘조물주의 뜻’ 때문에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이야기만큼이나 믿기 어렵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조물주의 뜻’ 때문에 이 세상에 왔다면 조물주를 만나지 않고는 삶의 문제가 풀리지 않지만 ‘내 마음’ ‘내 욕망’ 때문에 이 세상에 왔다면 최소한 내 스스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된다.

다음에는 꼭 친구에게 불교의 대답을 이야기 해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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