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문화의 찬란한 결합 간다라 불상

18-19세기 서구 열강들은 세계 각국을 자신들의 먹이 터로 나누어 가졌다. 제국주의의 깃발이 힘차게 휘날리던 시대였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도 침략국의 하나였다. 유럽 사람들에게 유린당한 곳은 아시아, 아프리카, 사우스 아메리카 등 이른바 제3세계였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던 위대한 민족, 그것도 붓다의 나라 인도, 인도 역시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20세기 중반에 이르러 제국주의의 깃발은 내려지기 시작했다. 식민지로부터의 해방. 인도는 해방되었다. 하지만 이슬람 문화로 물든 북부지역은 딴 살림을 차렸다. 바로 오늘날의 파키스탄을 일컫는다. 당시 파키스탄은 국토를 동과 서로 분리하여 독립했다. 결국 동 파키스탄은 뒤에 방글라데시로 다시 독립했다. 오늘날의 파키스탄 지역, 바로 이 일대가 간다라 문화의 요람으로 주목을 끌고 있다. 힌두쿠시 산맥 아래의 카불 분지, 페샤와르 분지, 펀잡 등의 지역이다. 간다라, 아, 간다라!

헬레니즘 받아들인 간다라 지역
그리스·인도의 타문화 존중 현장
마투라와 불상 기원설 논쟁 전개
인체 비례미 강조·정면 입상 특징

간다라 지역 불상.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알렉산드로스라는 사나이가 있었다. 기원전 327년, 그의 나이 불과 스물아홉 살, ‘드디어’ 그는 힌두쿠시 산맥을 넘었다. 청년은 그의 고향 마케도니아에서 출발하여 세계 정복전쟁 길에 나선지 7년을 보냈다. 장장 2만 5천km, 엄청난 대장정이다. 인도에 이르기 전 알렉산드로스는 이미 이집트를 점령했고, 페르시아 제국 등을 유린했다. 엄청난 정복욕의 결과였다.

그래도 그렇지, 알렉산드로스 군대는 어떻게 아시아까지 눈을 돌려 ‘세계 정복’을 도모했을까. ‘대왕’ 알렉산드로스 앞에 탁실라 왕은 저항은 커녕 그냥 무릎을 꿇기도 했다. 오늘날 간다라 지역은 그래서 그레코 로만 계통의 미술, 즉 간다라 미술의 온상이 되었다. 달리 표현한다면, 그리스의 헬레니즘 문화를 받아들인 아시아의 대표적 지역으로 꼽히게 되었다. 한 청년이 ‘겁도 없이’ 쳐들어와 남긴 과외의 ‘유산’이었다. 동서문화 결합의 독특한 결과였다. 달리 표현한다면, 동서 최고급 문화의 결합, 즉 유럽 헬레니즘과 인도 불교문화의 결합, 바로 간다라 문화였다.

헬레니즘이라. 그것도 인도 지역에서 볼 수 있는 헬레니즘이라, 놀라운 일이지 않을 수 없다. 사전식 정리를 하면, 헬레니즘은 그리스의 사상과 생활양식을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하여 헬레니즘 시기라 하면, 알렉산드로스 동방원정(기원전 334년)부터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악티 해전 패배 이후, 즉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패망까지 3백년 간을 말한다. 헬레니즘의 동전(東傳), 인류사의 한 전환점인가. 불상 기원설과는 무관하게 불상 제작의 화려한 시대를 열었다는 점은 주목을 요한다.

동양미술사에서 말하는 5백년의 ‘무불상 시대’, 이를 접고 드디어 불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누가 불상을 먼저 만들기 시작했는가. 마투라와 간다라. 오늘날 불상기원설 관련의 논쟁을 말한다. 대표적 학설의 주인공은 ‘A. 푸쉐 : 쿠마라스와미’, 즉 ‘간다라 : 마투라’의 싸움이다. 서구의 간다라 기원설에 맞선 인도 민족 자생설과의 대결이다. 이 같은 마투라와 간다라의 원조 논쟁이 있고, 또 다른 한편에서 마투라와 간다라의 동시 기원설도 설득력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불상을 만들기 시작했는가.

즉, 쿠샨 왕조의 이전인가, 이후인가. 세계 학계의 논쟁과 연구성과는 눈부시게 하고 있다. 그런 성과의 하나로 쿠샨 왕조 카니슈카 왕 시대의 명문 있는 불상 조성을 확인했다. 그래서 불상 기원은 기원전 1세기 후반에서 2세기경에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영향 관계는 그리스 영향, 로마 영향, 그레코-이란 양식의 영향, 마투라 영향 등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간다라 기원설의 대표학자 푸셰는 논문 <불상의 그리스적 기원>(1913)을 발표하고, 이후 <간다라의 그리스적 불교미술>을 발표했다.

거기서 푸셰는 간다라 불상의 그리스풍과 아폴론 신상과의 유사성을 말했다. 즉 깊은 눈, 콧날의 선, 계란형 얼굴, 물결모양의 머리카락, 옷 주름 등의 특색을 설명했다. 하지만 불상을 감싼 가사, 기다란 귓밥, 머리카락을 묶은 육계, 미간의 백호, 애조 띈 표정 등은 그리스 신상과 차이가 있다고 지적했다. 결국 간다라 불상의 작가는 그리스인 아버지와 인도인 어머니 사이의 혼혈로 보는 견해다.

그러나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오늘날 숱하게 남아 있는 간다라 불상은, 한마디로 걸작 반열의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너무 아름답고 멋있어 감탄사를 연발하게 한다.

어떻게 이렇듯 품격 높은 작품을 만들었을까. 바로 아름다움과 깨달음의 화신, 간다라 작품에서 감동을 끌어안는 것은 자연스럽다. 왜 그럴까. 원래 깨달은 이의 형상을 만들지 않던 인도 사람들은 어떻게 하여 이렇듯 멋진 불상을 만들기 시작했을까. 분명한 것 가운데 하나는 오늘도 ‘걸작의 행진’을 쉽게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스 신상인가 했더니, 바로 깨달음의 화현 붓다 이미지가 아닌가.

그리스 신상이라면, 비너스를 연상하게 한다. 8등신의 늘씬한 키에 적당한 볼륨,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비례의 아름다움, 아니, 그냥 아름답다. 그 이상 무슨 사족이 필요할까. 그리스 여신의 조각이 자아내는 느낌을 간다라에서 재현할 수 있다면, 바로 간다라의 문화적 특성과 맞물리는 부분이다. 그리스 신상과 불교문화와의 결합. 간다라 불상의 출발이다.

인체의 비례미를 강조하기 위해서 그랬을까, 간다라 불상은 대개 입상이다. 서 있는 모습, 거기서 아름다움의 실체를 보게 한다. 물론 가부좌 자세도 있다. 이는 인도 요가 수행의 자세를 반영했을 것이다. 불상은 대부분 정면상이다. 공양자가 공양물을 올리는데도 붓다는 공양자를 쳐다보지 않고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경우를 염두에 두게 한다.

정면은 위엄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집트 조각에서 이런 점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정면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입상, 간다라에서 본다. 조선시대 임금 초상화의 경우, 대게 정면에서 그렸다. 정면관은 시대를 뛰어넘어 권위의 상징인가 보다. 하기야 고개를 숙이거나 옆으로 돌리면, 그만큼 인간미가 묻어난다. 몸을 세 번 구부린 삼굴(三屈) 자세는 보살상에서나 볼 수 있지, 여래상에서 보기 어렵다. 반듯한 자세, 게다가 정면 직시의 모습, 거기서 권위와 위엄을 자아낸다.

간다라 불상의 특징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왕후 귀족 모습 같은 품격 높은 분위기를 보인다. 옷차림도 눈길을 끈다. 우선 온몸을 커다란 천으로 감싼 단순한 모습임을 알게 한다. 치장을 위한 어떤 장신구도 없다. 단순함 속에 깊이를 넣었다. 조각가의 능력이기도 하겠지만 당시 사회 풍습의 반영이기도 할 것이다. 불상의 외형적 특기 사항은 바로 헤어스타일이다. 인도 역시 출가 사문은 삭발했을 것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불상은 머리카락을 표현하고 있다. 아니, 삭발은커녕 기다란 머리카락을 틀어 올려 상투처럼 강조했다. 불상의 머리카락 표현,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까. 터번을 두른 것 같은 모습. 32상의 하나로 강조할 만큼 땋아 올린 상투, 그것은 대인(大人)의 모습을 표현하려는 인도의 전통이었을 것이다. 이 같은 우슈니샤를 한역경전에서는 육계 즉 ‘살상투’라고 번역했다. 머리 정수리에 혹처럼 솟아오른 부분. 이는 실제의 모습이었을까. 그래서 그것을 감추기 위해 상투처럼 머리카락을 틀어 올린 것일까.

아무튼 상투 모습의 헤어스타일은 간다라 불상의 특징이다. 바로 ‘붓다 이미지’를 대표하기도 했다. 간다라 불상의 얼굴에 나타난 도상학적 특징으로 미간 사이의 백호(白毫)를 들 수 있다. 더불어 육신에서 뿜어 나오는 광채, 특히 머리 뒤에서 나오는 빛. 이를 상징하는 광배가 있다. 광배, 이는 몸에서 뿜어 나오는 빛의 상징이라. 어쩌면 헬레니즘의 영향일까.

나는 간다라를 걷는다. 파키스탄의 땅, 오늘날 이슬람의 땅을 걷는다. 불교의 시대는 가고, 역사책에 남아 있는 과거의 현장을 답사한다. 과거의 영화는 초라하다. 아니, 이슬람은 형상 자체를 부정한다. 그래서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에 들어가면 아무런 치장이 없다. 교주의 모습은커녕 그 흔한 십자가도 없다. 다만 메카를 향하여 예배를 올릴 뿐, 텅 빈 실내 공간, 그것이 모스크의 진면목이다. 그건 그들의 교리에 의한 결과이리라.

그렇다고 타종교의 존상까지 파괴할 것은 무엇인가. 탈레반의 바미얀 석굴 파괴는 인륜사의 엄청난 만행이었다. 나도 간다라 지역을 통과하면서 몇 차례나 곤경을 겪기도 했다. 총격전을 목격하기도 했다. 장총을 든 군인이 내가 투숙했던 호텔을 호위하기도 했다. 현지 군인의 보살핌 아래 파키스탄과 아프카니스탄의 국경지대를 가기도 했다.

아프가니스탄과 타지키스탄 북쪽의 옥서스 강 유역에 아이하눔 도시유적이 있다. 이를 비롯 페샤와르 분지의 푸슈칼라바티, 탁실라의 비르 마운드, 시르캅, 시르숙 등은 그리스인이 건설한 유적으로 알려졌다. 특히 아이하눔은 그리스 풍의 광장, 궁전, 신전, 원형극장 같은 유구가 있다. 유적에서 아테나, 헤라클레스, 디오니소스, 에로스, 티케, 아폴론, 헤르메스, 아틀라스 같은 그리스 신상을 만날 수 있다. 라호르 뮤지엄 소장의 아테나 상은 그리스 신상으로 아테네의 수호신이며 전쟁의 여신이다. 또한 사자 머리의 헤라클레스는 간다라의 바즈라파니 모습이고, 또 동북아시아의 사천왕상과 연결된다.

나는 페샤와르 혹은 라호르 뮤지엄 가기를 즐겼다. 간다라 불상들이 즐비하게 진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비록 타종교의 권역에, 그것도 뮤지엄 진열장 안에 갇혀 있지만, 감동을 자아내는 것은 숨길 수 없다. 간다라, 간다라는 뜨거운 감동의 현장이다. 2천년이 흐른 오늘도 역시 마찬가지다. 간다라, 간다라가 과연 무엇이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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