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앎(知)’과 ‘참 봄(見)’은 깨달음의 완성을 의미한다. 예불문(禮佛文)에서 해탈지견(解脫知見)은 계(戒), 정(定), 혜(慧), 해탈(解脫)의 완벽한 충만을, 완성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참 앎과 참 봄을 이룬 자는 헤매거나 헐떡이지 않는다. 머뭇거리거나 망설이지 않는다. 꾸밈이 있거나 돋보이려 드러내지 않는다. 있으면 있는 대로 고마워하고 없으면 없는 대로 받아들이며 감사히 만족하며 당당하면서도 넉넉하다.

집착이 모든 병의 원인임을 살펴 열고 닫음이 자유롭다. 작은 일에도 소홀함이 없이 걸림이 없이 오고가나 나누는 기쁨을 생활화한다.

참된 知·見은 깨달음의 완성
일상이 진리, 마음이 부처


행복은 만족에서 비롯되고 불행은 견줌의 버릇에서 시작된다. 소유욕은 키울수록 병이 되고 욕심은 버릴수록 편안하다. 몸과 마음이 분주하면 탈이나 재앙을 부르고 생각과 행동이 단순하면 느긋해 단잠을 이룰 수 있는 법이다.

입으로는 막힘이 없는 자유와 다함이 없는 행복을 노래 부르지만 낮과 밤의 행동이 같지 않다면 그는 허명(虛名) 허세(虛勢)의 생각의 윤회를 거듭하는 ‘업덩이’ 중생일 따름이다.

실천이 따르지 않는 설법에는 메아리는 커녕 중생들의 번뇌만 깊게 할 뿐이다. 명예를 앞세우며 돈과 세력 키우는 일에 머물러 있다면 그는 이름이 수행자 일뿐 진정한 의미의 수행자는 아닐 터이다.

버리지 못하고 비우지 못하고 나누는 일에까지 인색하다면 그는 얼간이요 머저리 등신이다.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떠나는 것, 홀로 와서 홀로 떠나는 것, 챙기고 모으고 내세우며 드러내는 꾸밈과 조작이 얼마나 허무하고 부질없는 짓임을 죽음을 눈앞에 두고 후회한들 돌이킬 수 있겠는가?

입이 평화를 부르면 몸도 평화를 실천해야 생명력이 있는 것이다. 입이 자유를 부르면 몸도 얽매임의 부끄러움에서 벗어나야 큰 울림이 있는 것이다. 언행의 일치란 결코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일반인이 아닌 수행자에 있어서는 그 의미의 무게감이 다른 것이다.

거짓보다는 진실하게, 꾸밈보다는 진솔하게, 마음 편하게, 부담스럽지 않게, 방편 쪽으로만 치닫지 말고 열린 진리의 세계를 펼쳐 보여야 한다. 진리는 숨어 있거나 높고 깊은 곳에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물처럼, 공기처럼, 자갈처럼, 빨래처럼 숨어 있지 않고 드러나 있는 것이다. 일상생활 그대로가 진리이며 이 마음이 그대로 부처인 것이다.

다만 머뭇거리며 망설이며 생활의 하나하나에 마음이 머물러 집착을 키우다보면 진리는 먼 곳으로 아득히 사라지는 것이다.

행복과 자유는 느낌으로부터 비롯된다. 느낌이 밝은 빛이면 행복이요, 자유지만 느낌이 어두운 그림자 쪽으로 기울면 그 자체가 불행이요, 속박이기 때문이다. 사람살이의 8할은 느낌으로 끌어당김과 밀어냄의 연속으로 이루어진다. 사람살이의 큰 비중인 사랑놀이에 있어서도 느낌으로 불이 붙는 빨려듬과 빨아당김으로 시소게임을 즐기지만 대화의 단절과 이해의 결핍으로 상대 가슴에 방아쇠를 당기듯 멀어지는 것이다.

자, 글의 흐름을 다시 ‘참 앎’과 ‘참 봄’으로 되돌려 그 의미를 되살려보자. 막연한 추측으로 머리 굴린 생각으로 주어들은 상식으로 짜깁기식의 지식모음으로는 앞도 캄캄하고 뒤도 캄캄한 흑암(黑暗)의 무리일터.

간절심으로, 참으로 오롯한 간절심으로 생사(生死)마저 벗어버린 지극한 간절심으로 마음모아 ‘참 앎’과 ‘참 봄’을 이루어야 진정한 의미의 자유인,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진리를 알면 자유인이 되기 때문이다. 진리를 보면 행복한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꾸미고 드러낼 것 없이, 챙기고 모으는 것 없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고맙고 감사하고 미안한, 기쁨 충만의 날마다 좋은 날이 되는 것이다.

드러내고 감출 것 없는, 궁금한 의혹이 남아있지 않는, 순수함과 진솔함 그대로 발길 닿는 곳이 정토(淨土)가 되는, 진정한 의미의 자유인, 행복인이 되는 것이다. 해탈지견(解脫知見)은 깨달음의 완성을 의미한다. ‘생활이 도(生活是道)’요 ‘마음이 부처(心卽是佛)’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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