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를 지어 놓지 마시고 조건 없는 사랑을 하세요

(지난 호에 이어서)

큰스님 자력과 통신력, 광력, 전력 그런 것이 다 여러분한테 주어져 있기 때문에 여러분의 마음이 진짜로 믿고 실천을 하는 데에 멋진 게 나올 수 있다고요. 그리고 그 “멋진 게”라는 거는 묘법이란 뜻입니다. 묘법이 다른 게 아니에요. 불가사의한 법이 다른 게 아니라 그냥 우리들이 지니고 있는 거예요. 뭐, 불가사의하다 이러고 아주 위로 볼 게 하나도 없어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거니까요. 안 해 보셔서, 들어 보지도 못하고 먹어 보지도 못했기 때문에 모두들 그런 거죠.

부모가 자식들한테 조건 없이 사랑하는 거와

부처님이 조건 없이 응해 주시는 자비가 다르지 않다.

그게 진짜 무주상 보시다.

나는 어떤 땐 그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자장면 한 그릇을 못 먹어 봤다면…, 왜 손으로 이렇게 해서 자장면 만드는 거 있죠? 그거 예전에 자장면 한 그릇 먹어 본 지가 아마 근 십 년은 될 거예요. 그런데 지금은 국수로다가 해서 그걸 하니 무슨 맛이 나요? 그러니 그 맛을 봤기 때문에 그 맛도 생각이 나는 겁니다. ‘그때 그 자장면 참 맛 좋았어.’ 그런데 그걸 먹어 보지도 않고 보지도 못했다면 생각이 납니까?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요. 그러니깐 여러분은 항상 여기 오셔서 비디오로 하는 거나마 열심히 들으시고 열심히 들으심으로써 이 속의 업식들이 전부 들어요. 여러분 한 사람의 마음이 듣는 순간 이 수십억의 의식들이 들어요. 듣는 대로 그대로 반영을 해요. 이 사람이 어떻게 마음으로 듣고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그럼 질문 없으세요?

 

질문자1(여) 이렇게 가까이서 스님을 뵙게 되어서 감사합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해 십 년 넘게 혼자 있습니다. 그러나 저 자신은 전혀 가르치지 못하고 항상 자기 자신에게만 관대한 마음을 갖게 되고, 지금 제가 말씀드리는 건 질문도 아니고 그냥 넋두리 같습니다만 좌우지간 저는 비디오를 볼 때마다 저 스님께 한번 말씀드려 보고 싶은 그것이 제 소원이었기 때문에 지금 제가 말씀드립니다.

큰스님 예, 예. 좋아요. 그 생각을 하셨으니 앞으로는 잘되실 겁니다. 그 생각이 바로 여러 가지를 빚어 낼 수 있는 동기가 되니까요. 그 정성스런 마음, 바로 나를 내가 낮추는 그런 마음이 말입니다. 자기가 남을 가르치고 그런다 해서 자만과 오만 이런 걸 가져서는 절대로 안 되죠. 이건 금물이죠. 지렁이 생명이나 벌레 생명이나 우리의 생명이나 조금도 다를 바가 없고, 날아다니는 새, 다람쥐 이런 것들도 하나도 우리 생명과 다르지 않아요. 그런데 하물며 사람과 사람이 서로 업신여기고 한대서야 말이 됩니까? 이건 말로만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그렇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건 말로만 그러는 게 아닙니다. 그냥 업신여기면 업신여기는 대로 벌써 내 앞에 딱 다가옵니다. 그 사람한테로 가는 게 아닙니다. 자기가 해 가지고 자기가 그 음파를 집어먹습니다. 그렇게 돼 있어요. 그래 가지고 자기한테 돌아오지요. 딴 사람한테 돌아가는 게 하나도 없어요.

그러니까 모두가 잘 생각하셔야 됩니다. 부처님 한생각으로 때로는 신장이 되시고 때로는, 어저께도 얘기했지만 약사가 되시고 관세음이 되시고 아촉이 되시고, 문수가 되고 보현이 되고 칠성이 되고 지장이 되고 아미타가 되고 이렇게 많은, 그 용신, 지신까지 이렇게 되시는데, 그게 어떻게 한마음으로써 그렇게 여러 가지를 다 하시게 됐느냐 이거를 한번 따져 보세요. 자기가 마음을 잘못 먹으면 그 음파가 가다가도 벌써 그냥 자기한테로 파고들어요. 그게 뭐냐 하면 응신이 나쁘게 나갔기 때문에 그 응신이 신장으로서 다가오게끔 돼 있거든요. 그러니 좀 더 활발하고 좀 의기양양하게 사실 의향이 있다면, 그리고 몸들도 건강하게, 안팎을 건강하게 가지고 사시려면 오만과 자만, 아상 이런 거는, 나라는 존재, ‘내가 권세가 있다. 내가 뭘 하고 있는데….’ 이런 거는 아예 집어내 버려야 됩니다.

언젠가 한번 우리 애들이 아, 지금 장관이 왔는데 저기서 기다리고 있다는 거예요. 사람들은 쪽박같이 그냥 많이 모여 있는데. “아, 백일기도도 드리는 사람이 있는데 여기 장관이 따로 있고 평민이 따로 있고 거지가 따로 있느냐. 시간 돼서 들어오시게 해라.” 그랬죠. 아니, 중이 뭐 그렇게 목이 말라서 그러겠습니까? 생각해 보세요. 하하하. 무슨 권세를 얻으려고 그러겠습니까, 돈을 벌려고 그러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뒀노라고 써 붙였습니까? 왜 마음을 컴컴하게 해서 항상 컴컴하게 살게 합니까?

또 질문 없으실까요? 아이, 그냥 앉아서 하세요.

 

질문자2(여) 스님, 이 친구분이 연세가 두 살 높은 선배이신데 지금 병으로 누워 계시면서 ‘하, 나는 죽을 운이다.’ 이런 생각을 갖고 계십니다. 그런데 병이 깨끗이 낫게 좀 안 되겠습니까, 스님?

큰스님 대신 밥 먹어 줄 수는 없죠. 하하. 그러니까 여러분이 어서어서…, 연세가 몇이신진 몰라도요.

질문자2(여) 79살입니다.

큰스님 그러면 옷 벗을 때도 됐습니다그려. 하하하. 난 어떤 땐 그럽니다. 연세 물어봐서 80이 넘었다고 그러면 “아이, 이제 가실 때도 됐는데, 그 자손들 속 썩이시네.” 허허허, 이럽니다. 그러니까 자손들도 좀 생각해야죠. 또 건강하게 살다 돌아가시면 되는데 그러지 못하고 너무 고통을 주면 안 되니까. 그러니 어떤 때는 정말 진정 고쳐 드릴 마음이 있어도 “내가 무슨 의사입니까?” 하지만 그래도 마음을 내 주는 데에 아주 100%가 달라집니다. 우리 이 스님네들이 마음을 내 주는 것도 아주 100%가 달라집니다. 이 큰 산이 있기 때문에 얕은 산은 빛을 못 봐서 그렇지. 하하하. 응달이 져서. 만약에 높은 산이 그냥 응달이 지게 이럭하고 있지 않으면 얕은 산이 얕은 산이 아닐 텐데 그렇게 돼 있다 이 소립니다. 그러니까 항상 마찬가지로 생각하시고 그저 믿어 주시길 바랍니다. 하하하. 또 질문하실 것 없으세요? 고통은 안 받으시고, 고통스럽게는 안 가시게 하시는 것이 좋겠군요.

 

질문자3(여) 스님, 저는 미국에 온 지 한두 달 좀 넘었는데 한국에 있는 식구들이 고통을 받고 여기서는 여기대로 그래서요. 잘못 온 게 아닌가 싶어서 가야 되는 건지 그대로 머물러야 되는 건지, 모두 고통스럽게 살아서 말씀드리려고….

큰스님 그것도 여기 와서 고통스럽게 고생하는 것만치만 한국에서 서로 마음을 의합해서 열심히 뛰신다면 여기 미국보다 못하지 않을 텐데요.

질문자3(여) 예. 그래서 여기 오면 좀 나아질까 싶어서 왔는데 아직 그저 그렇고요.

큰스님 뭐, 낫기야 낫겠지만요, 들어오시면 누가 영주권을 척 해 줍니까? 누가 그렇게 해 줍니까? 그러니까 그 고통이 말도 못하죠. 그리고 또 한 식구가 모여서 살지 못하니…. 그러니까 그 시일이 얼마만큼 걸려서 이제 머리가 희끗희끗하게 되면 어떡하려고요? 제가 생각할 때는 한국에 도로 나가시는 게 100% 낫겠습니다. 집안이 그래도 기반이 잡혀 있는 저거라, 그래도 가면 살 수 있어요.

질문자3(여) 감사합니다.

큰스님 그리고 안양 선원에 나오세요.

질문자3(여) 예.

큰스님 아, 여기서 까마득한데 어떻게 해! 허허. 그래, 또 질문 없으세요?

 

질문자4(남) 이렇게 직접 뵙게 돼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저는 불교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기독교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많은 책을 좀 읽어 봤습니다. 그런데 머리에 들어오는 것도 없고 남는 것도 없습니다. 성철 스님이 말씀을 하시기를 “어떤 덕이라든가 선을 베풀었을 때에 다시 그것을 받으려고 하면 그건 장사꾼이지 덕이나 선을 베푸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어떠한 것이 참된 덕이고 또 선이며, 또 어느 때에 보면 무슨 역학이라든가 이런 데에서 많은 것에 의문이 갑니다. 과연 스님께서도 주역을 인정을 하고 계시고 또 사주, 명리학 쪽 뭐, 그런 학문에 대해서도 인정을 하고 계시는지요.

큰스님 난 인정 안 합니다. 왜냐하면 지구에 어떠한 물건이 와서 파산을 시킨다 이렇게 한다면 파산을 못하게 하는 자가 또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내년 후년에는, 후년 후후년에는 불로 심판을 받는다.” 이런 예언을 한다 합시다. 그런다면 그 뜻을 몰라서 그렇지 자기 마음으로 자기가 심판을 받는 겁니다, 각자 모두가.

그리고 또 성철 스님이 말씀하셨다는 거, 그것도 어저께 내가 말씀드린 거죠. “자식들한테 조건 있이 사랑합니까?” 하고요. 부모가 자식들한테 조건 없이 사랑하는 거와 부처님이 조건 없이 응해 주시는 자비가 다르지 않다고요. 그게 진짜 무주상 보시라고. 이름해서 그것도. 부모가 자식 기를 때 무슨 ‘무주상 보시다’ 이러고 합니까? 그러니까 모든 것은 뒤를 두고 뭐, 지금 모든 사람이 웬만하면 다 합니다. 꼭 조건을 붙이고 합니다. 자식을 기를 때도 “너는 잘돼라. 잘되는 게 내 소원이다.” 하, 이렇게 조건을 붙입니다. 하하하….

그런데 우린 안 그렇습니다. 조건을 붙여 놓으면 더 잘되려야 잘될 수도 없고 더 못되려야 못될 수도 없습니다. 거기서, 한계에서 그냥 떨어집니다. 그러니까 아예 한계를 지어 놓지 마시고 조건 없는 사랑을 하시라 이겁니다. 아까도 말씀하셨지만 지금 질문하시는 것도, 그 역학이다 뭐다 하는 것도…, 옛날에도 “예언자는 소인이로다.” 이런 말을 한 예가 있죠. 이 세상이 공해서 돌아가는데 이거를 딱 잡아 놓고 ‘어느 해에는 이렇게 되고 어느 해에는 이렇게 된다’ 이걸 해 놓으면 그게 그대로 있습니까? 기는 놈이 있으면 나는 놈이 또 있습니다. 살림살이를 요렇게 저렇게 쓸모 있게 놨는데 딴 사람이 들어와 보니깐 자기 마음에 맞지 않거든. 또 이렇게 이렇게 놓는 겁니다. 그 뜻을 아시겠습니까? 그러니 “예언자는 소인이로다.” 이런 겁니다. 역학이 주로 그런 게 많지요. 그렇죠?

질문자4(남) 글쎄, 역학인도 아니고 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공자님이 말씀하시기를 “군자는 명(命)을 알아야 군자니라.” 했다고 이렇게 봤습니다. 과연 그 명이 어떠한 것인지 여쭙고 싶습니다. 운명을 알아야 된다는 말인지, 또….

큰스님 이 운명이 아니라, 운명이라고 이름 지을 것도 없어요. 인연의 법칙이죠, 예. 그걸 거추장스럽게 운명을 거기다 붙여서 말할 게 하나도 없어요. 회사에도 사장이 없으면 직원이 없고 직원이 없으면 사장이 없습니다. 이렇게 전체를 놓고 보면 평등하고 또 안에 들어가서 보면 직원은 직원대로 있고 사장은 사장대로 있습디다. 안 그렇습니까? 사장이 없으면 직원이 못 벌어먹고 살고 직원이 없으면 사장이 못 벌어먹고 살고 이러니 평등하다 이겁니다. 그런데 바깥에선 안에 들어가 보면 직원은 직원이고 사장은 사장이다 이겁니다.

 

질문자5(남) 이렇게 뵙게 돼서 감사합니다. 다름이 아니고 듣기로도 그렇고 제가 본 바로도 그렇고 또 모든 분들이 다 그렇게 느끼실 거예요. 빈 몸으로 왔다가 빈 몸으로 간다고, 또 욕심을 내지 말라고 하는데요, 인간이 살자면 입어야 되고 먹어야 되고 거처할 집이 있어야 하고, 또 다들 선한 의지를 갖고 어떤 일을 하려고 노력을 하는데, 악한 의지를 갖지 않고 함에도 불구하고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아니면 해도 또 잘 안 풀리죠, 뜻대로. 그렇다면 욕심을 내지 말라고 하는데 그 욕심의 한계는 어디까지며, 생활하는 데서 이건 욕심이다, 이건 욕심이 아니다 하는 것을 저로서는 확연하게 구분하기가 힘듭니다. 그렇다면 선한 의지로 어떤 일을 좀 더 나아지게 하고 이렇게 추구하는 것도 욕심에 해당하는 건지, 아니면 그게 이루어지지 않는 게 당연한 건지 의문이 되는군요.

큰스님 어이구 참! 애들하고 집이 없는데 어떻게 집 걱정을 안 해요? 아이 참 내! 세상을 그대로 살면서 자기는 관리인이라는 것만 아시라니까. 그 주인의 시자일 뿐이고. 누가 사랑을 하지 말라나, 돈을 갖지 말라나, 집을 갖지 말라나. 그 말만 해도 알아듣겠죠? 그러면서 그대로 사는 것이 원칙인데 거기에서 “악하게 살지 마라.” 이런 것은 악이 별다른 게 아니라, 악한 것도 악한 것이지마는 자녀들하고도 악하게 되는 수가 있어요. 잘못하고 나가서 안 들어오거나 이래도요, 공부를 잘못하거나. 이거 한국에선 더합니다.

부모가 그냥 공부 공부 공부, 아주 상상에 빠진 거 같습니다. 그러니 자식들이 견디겠습니까? 그래서 “공부 공부 하지 마라.” 공부에 진저리가 나서 들어오면 “어디서 배고프지 않게 뭘 먹었느냐? 피곤하지 않으냐? 배고프면 뭘 좀 먹고 피곤한데 좀 쉬어라.” 이러고 이 마음속에다 ‘쟤 공부 좀 열심히 잘하게끔, 마음잡아서 잘하게끔 당신밖에는 해결 못해.’ 하고 맡겨 놓고 거죽으로 말은 부드럽게 해 줘라 이런 소립니다. 그래야 이득이 있고 공덕이 있지, 그렇지 않고 그냥 일사천리로 이 말로다가 그냥 다르르르 해 버리고 그러면, 냉랭하면 눈치 봤다가 그냥 또 달아나가요. 그러니 점점점점 속이 썩고 이러죠. 그와 마찬가지로 악하다는 것이 별난 악이 아니라 그저 남한테 무조건 잘, 이익하게 할 수 있는 데까지 하면 나한테…. 이 공을 쳐 보세요. 공을 딱 칠 때는 공이 나한테 돌아오지 절대로 그 벽에 딱 파묻히는 게 없습니다. 그거와 비슷한 겁니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그런 데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너무 걸리지 마시고 아주 평온한 마음으로 ‘인제는 내가 관리인만 되겠다. 그저 마음의 주인이 다 알아서 할 거고, 집이 없다는 생각을 하면 또 이 집 없다는 생각에서 이 업식들도 다 알고 내 주인공도 알고 있으니까 어느 때 생겨도 생기겠지.’ 하고 거기다 맡겨 놓는 겁니다. 그래서 저절로 나와야지 집이 강제적으로 어디서 나옵니까? 또요?

질문자6(남) 저는 안양에서 공부를 하다가 여기 유학을 왔습니다. 그런데 한편에서는 불법밖에 더 이상 공부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고 다른 쪽으로는 세속적 욕망 속에서, 두 가지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많은 방황을 하고 있습니다. 큰스님의 큰 법문을 듣고 싶습니다.

큰스님 일체 만법, 일체 모든 과학이나 천체물리학 또는 철학이라든가 천문학이라든가 이런 문제들, 이런 것이 다 한마음 속에서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살이 만사가 다 한마음으로써 빚어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핵심을 배우는 거고 그 핵심에 의해서 가지가지 나가는 건 여러분이 그거는 알아서, 이것만 딱 쥐고 갈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면 그건 저절로 생깁니다. 자기 마음먹는 대로 저절로 생겨요. 원 핵심을 못 잡았기 때문에 그렇죠. 그러니까 여기 오셔서 좀, 뭡니까? 다람쥐가 나무에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듯 많이 오셨다 가셨다 하셔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마음을 잡을 수만 있다면 그 마음잡은 그 자리에서, 핵심 속에서 다 과목이 나갑니다. 자기 할 수 있는 과목이 나옵니다. 틀림없어요.

 

사회자 질문이 더 있으시면 한 분만 더 받을까요? 한 분만 마지막으로 질문을 받겠습니다.

질문자7(남) 저는 미국에 와 있는 동안에 아버님께서 중풍으로 고생을 하시는 걸 최근에 알았습니다. 근데 제가 한마음 공부를 조금 하다 보니까 제 나름대로 하루 저녁에 관을 했습니다. ‘빨리 아버님의 옷을 벗겨 주십사.’ 하고 관을 했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아이들 학교 가는 걸 보니까 큰놈은 머리가 아프다고 그러고 작은놈은 다리가 아프다고 그래서 ‘제가 감히 큰스님의 흉내를 냈구나. 아직 공부가 덜 됐구나.’ 하는 생각을 했고 또 한 가지는, 이렇게 관을 한 것조차 죄가 돼서 제가 한 거는 불효고 살인이고, 스님이 하셨을 때는 그것이 좋은 방향으로 생각이 됩니다. 하루 저녁 관하는 것 자체로 죄인이 되고 불효가 된 것을 큰스님께 말씀을 드리면 좀 감해지지 않을까 해서 말씀드렸습니다.

큰스님 연세가 몇이신데요?

질문자7(남) 여든이 넘으셨습니다.

큰스님 그것도 자손으로서 그럴 수도 있죠. 그게 뭐, 죄가 아닙니다.

질문자7(남) 글쎄, 마음공부를 몰랐더라면 그 생각도 못했을 텐데 조금 아는 것이 오히려 모르는 것보다 더 못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큰스님 그렇더라도 자식으로서 그렇게 할 수는 없고요, ‘그저 고생을 안 하시다가, 고생을 하지 않으시고 그냥 편안하게, 옷을 벗어도 편안하게 벗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고 관하셨어야죠. 그러면 자식도 아프다는 소리 안 할 테고. ‘너도 자식을 길러 봐라.’ 그런 생각을 한 거거든요, 허허허.

질문자7(남) 예, 바로 그게 제가 걸리더라고요.

큰스님 아, 지게에 지고 갔다가 지게 도로 가져온 아들 보고선…. 하여튼, 오늘 참 재미있었습니다. 여러분도 요담에 제가 또 오게 되면 더 좀 공부가 되셔서 이 마음의 혼란을 다 팽개쳐 버리시고….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이 살면 몇천 년, 몇만 년 사는 게 아닙니다. 그저 한 생 살 것을 남한테 그렇게 거북한 생각에서 증오하고 미워하고 이러면서 살아야 되겠습니까? 이 모두를 다 벗어나셔서 평온하게 사십시오. 이 모두가 만약에 그렇지 못한다면 내내, 내가 죽어서 영혼도 또 태어나서 또 그게 붙는단 말입니다. 아주 졸졸이 졸졸이 그림자처럼 쫓아다니는 게 바로 업식입니다. 그러니까 부부의 정자 난자를 받아서 그 본인의 영혼이 들어가서 삼합이 한데 합쳐지는데 그 영혼이 한데 합쳐지는 동시에 업식도 마저 거기 딸려서 들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그 몸 하나 받는데 몸속에 있는 모든 업식들도 다 거기, 본래 짊어지고 나온다는 게 그겁니다. 이 몸속에 다 짊어지고 나와요. 아주 이 집에다 잔뜩 넣어 가지고 나옵니다. 그래서 내가 자라면서 이 업식들도 그냥 같이 자라죠. 이게 거짓말 아닙니다, 하하.

그래서 여러분이 ‘나는 어디서 왔나.’ 하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미생물에서부터 진화됐고 진화돼서 또 이렇게 나왔구나.’ 하는 거를 수천, 수억 겁 년 전으로 돌아가 볼 때 ‘바로 그 네가 애당초에 최초에 생긴 것은 이런 것이다’ 하고 배 속에 다 있지 않습니까? 하하하. 증명할 수 있는 재료가 다 있지 않습니까? 그 중간은 모습이 다르게 또 나오고 또 다르게 나오고 하겠지만 최초에 생긴 유래를 말하는 겁니다.

그럼 오늘은 이만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위 법문은 대행 스님께서 1992년 6월 21일 뉴욕지원 법회에서 설법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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