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그래도 개운하다. 탄핵 정국에서 치러진 대선 기간이 왜 그렇게 길었는지 하루하루가 먹먹한 나날이었다. 한국 정치의 민낯을 그대로 보기에는 내 가슴이 너무 엷었다. 이제 대선이 끝나고 새로운 정부가 출발하니 여하튼 긴 터널을 벗어난 기분이다.

길었던 탄핵 정국이 끝났다
새 정부 출범 긍정적 평가
하지만 왠지 조마조마하다

한국사회에 산재한 갈등들은
집단의 자기조직화서 비롯돼

문재인 대통령의 출발도 산뜻하게 보이고, 이런 저런 인사들도 신선하고 긍정적으로 보인다. 이러한 시선은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하지 못한 박근혜 前 대통령으로 인한 착시현상에서 나온 것인가? 문재인 정부는 검찰 개혁에서부터 4대강 문제에 이르기까지 과거의 적폐에 대해 과감한 청산 의지를 보이고 있다. 그런데, 웬일인가? 전적으로 박수를 보내면서도 한편 조마조마한 생각이 든다.

웬 조마조마한 생각? 하버드대 심리학자 조수아 그린(Joshua Greene)이 쓴 〈옳고 그름(Moral Tribes)〉이란 저서의 내용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조수아 그린의 주장은 도덕적 삶의 유효성을 개인 단위가 아닌 부족(집단)에서 찾았다.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대다수의 인간은 도덕적이지만 왜 분노하고 갈등하고 싸우고 죽이는가? 그것은 인간의 도덕성은 같은 집단 내에서만 유효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진화의 과정에서 ‘그들’보다 ‘우리’를 앞세운다. 이념 갈등, 인종 갈등, 종교 갈등 등 우리 사회의 도덕적 갈등은 대부분 ‘우리 집단’과 ‘그들 집단’의 도덕이 일치하지 않을 때 발생한다. 도덕은 옳고 그름을 말해주는 기준이 결코 아니다. 이제 도덕적 갈등을 바라보는 종래의 관점을 바꾸어서 두 집단의 폭을 좁히기 위한 비상한 노력을 해야 하며, 도덕적 경계선을 뛰어 넘는 ‘고차도덕(Metamorality)’을 정립해야 한다.”

조수아 그린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 드리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의 현실을 생각하면 섬뜩하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구호는 지금도 술자리 건배사에서 자주 등장하지만, 한국의 선거판에 은밀히 등장하는 단골 슬로건이기도 하다. 이 삼천리 금수강산에 우리는 얼마나 많은 부족들이 ‘우리’와 ‘그들’로 나누어져 있는가.

이념·지역·계층·세대 등 도덕적 경계선이 다른 여러 ‘부족’들이 혼재되어 있다. 조수아 그린에 의하면 집단의 도덕은 옳고 그름의 판단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집단의 자기조직화 과정에서 나온 진화적인 장치이다. 그러면 도덕적 경계선을 뛰어 넘는 ‘고차 도덕’을 어떻게 창출하나? 이에 실패한다면 문재인 정부의 개혁도 실패하고, 우리와 그들의 미래는 함께 깜깜하다.

연기, 無明을 벗어날 고차도덕
‘우리 對 그들’ 경계를 벗어나
現 정부, 연기의 정치 구현해야

방영준/ 성신여대 윤리교육과 명예교수

무명의 깜깜함을 벗어날 수 있는 고차 도덕이 있다. 바로 붓다 다르마, 즉 연기법이다. 연기란 조건에 따라 일어나고 존재하고, 그 조건이 없으면 사라지고 존재하지 않는다. 연기적 사유는 본질을 찾는 형이상학과 결별하고 무상함을 보는 지혜이다. 이것은 같음을 거부하고 다름을 보는 ‘차이의 시선’이다.

그런데 인간은 변하는 것, 무상한 것에 불안을 느낀다. 그래서 변하는 것을 잡아 고정화 시키고자 한다. 즉 동일성의 욕구가 생긴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만들고 ‘그들’을 구분하는 집단적 환상에 빠지게 된다. 여기서 집단적 무지가 발생하고 다른 부족을 구분하고, 서로 갈등하고 싸운다. 한국 정치는 그동안 ‘부족의 함정’에 빠져 허우적거리면서 얼마나 표류하였던가.

이제 연기의 지혜를 정치에 적용하여 ‘연기의 정치’를 구현해야 할 것이다. 연기는 함께 사는 중생의 지혜다. 새로운 정부에 연기의 지혜가 가득하게 피기를 바란다. 연기의 씨를 뿌릴 곳은 백담사 계곡이 아니라 광화문 거리의 아스팔트다. 그만큼 불교와 불교인의 책임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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