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엔 영화를 보며 자주 울었다. 요즘은 자주는 아니지만 텔레비젼을 지켜보며 손수건이 젖을 만큼 눈물샘이 열린다. 세상 살아가는 고되고 팍팍한 줄거리에서 가슴 뭉클한, 따뜻한 화면이 나오면 눈물샘이 터진다.
오해와 미움보다는 이해와 격려로 흐트러진 마음이 하나가 될 때 세상은 꽃으로 피는 것이다. 따스한 마음의 나누는 정(情)이 있으면 살맛나는 세상이 열리기 때문이다.

상대적 박탈감에 고뇌하는 현대인
불교가 이해·격려의 공간 만들어야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는 동물이다. 그러나 짝을 이루면 틈이 생기고 벽이 생기고 오해와 미움으로 강(江)을 만든다. 대화는 줄어들어 단절에 이르고 이해는 결핍되어 불만과 권태를 키운다.

둘이 있어도 혼자만의 자유를 그리워하고 혼자 있어도 여럿이 되어 생각의 윤회를 멈추지 못한다. 욕구는 그 둘레를 더욱 넓혀가고 만족은 타는 가뭄으로 새싹의 키움을 졸아들게 한다. 사방팔방을 둘러보아도 구원의 손길은 아득하고 시린 마음에 감겨오는 허무의 그림자가 길다.

목마름을 가시게 할 생명수는 신기루처럼 아지랑이처럼 실체도 없이 사라진다. 마음 다잡고 생활을 줄여 절약하여 모은 재산은 한 순간에 터지고 몰려오는 생활의 파편에 바닥을 드러내기 일쑤이다. 들어오는 수입 조건이 수도꼭지라면 나가는 지출 물량이 소방호스 격이라 허탈감만 몰려온다. 이웃집과 비교하면 상대적 박탈감은 입맛을 잃게 하고 절망의 어둠이 마른버짐처럼 퍼져나간다.

글쎄, 동창모임, 친족모임에도 몇 차례 이 구실 저 핑계를 앞세우며 빠지고 있지만 뽄대내며 으스대며 솔찬한 음식값도 모조리 계산하고 싶다. 흰 봉투에 현찰을 두둑이 담아 기분 좋게 내밀며 가슴 펴고 살고 싶다. 부모님께도 아내와 남편, 아이들에게도 따끈따끈한 덕담을 담아 현찰이든 봉투를 내밀고 싶다.

마음 담긴 칭찬도 애어보시(愛語布施)겠지만 그래도 왠지 가슴이 썰렁하다. 현찰이 따르지 못하는 칭찬에는 기가 죽는다. 인간성의 능력에는 지폐의 두께가 으뜸으로 자리메김한지 오래 이고 사랑의 확인에도 지폐놀이가 끌어당김의 법칙이 된지 오래이다. 그러다보니 가난은 이제 불편한 게 아니라 또 하나의 죄(罪)가 되어 생활반경을 졸아들게 하고 있다.


출가수행자가 너무 세속화된 잣대로 톱질을 즐기고 있다할지 모르나 종교계의 순수한 신앙에도 현찰거래의 흥정거래가 그 둘레를 넓혀가는 참혹한 현실이다. 에리히 프롬은 ‘존재냐? 소유냐’를 묻고 있지만 세간과 출세간이 소유 쪽으로 기울고 있는 난센스의 희극이 계속  이어지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세상 살아가는 게 참으로 뭐 별게 아닌데도 아등바등 현실과 타협하며 고되고 팍팍하게 삶의 지느러미를 햇볕에 드러낸 채 어둠과 싸우는 사람들이 부지수로 널려있다.

굶주린 자, 목마른 자, 외롭고 병든 자, 어둠속의 소외계층에 이르기까지 아웃사이더의 이들에게 휴식공간이 필요하다. 이들에게 재충전해 새출발 할 수 있는 생활공간이 필요하다. 집처럼 편안한, 가족처럼 따뜻한 형제자매의 군불지피는 이해와 격려의 도움의 빛줄기가 필요하다.

눈높이를 교정해 주고 마음의 온도차를 조정하며 힘이 되고 꿈과 희망의 불씨를 키워주는 칭찬과 격려의 말씀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비의 종교인 불교 쪽에서 나설 때이다. 사람의 종교인 사찰 쪽에서 닫힌 문을 활짝 열고 열린 자세, 열린 마음으로 세상 사람들을 맞이할 일이다.

신앙을 흥정으로 거래하는 부끄러운 문화에서 아무나 누구나 언제든 찾아와 가슴 속 멍울이 풀릴 수 있게, 마음의 허전함을 달랠 수 있게, 절망적 타는 목마름에서 희망의 군불을 지필 수 있게, 사찰은 언제든 열려 있어야한다.

승려는 누구든 만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편하게 주고받는 대화 문화를 펼쳐 가야한다. 법당의 목탁은 누구나 염불을 하며 울릴 수 있도록 개방되어야 한다. 신앙이 영험설화를 앞세우며 신비주의로 치닫는다면 이는 미래가 없는 죽은 신앙일 뿐이다.

언젠가 TV 화면에서 어느 스님의 자비실천의 훈훈한 모습이 담겨 눈물샘이 열리길 바라고 있다. 사람 사는 이야기에는 부처님의 참 가르침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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