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식 교수, 대행 선사 행적서 혁신성 조명

대행 선사(1927~2012)가 보여준 수행과 포교는 기존 한국불교계가 보여주지 못한 혁신성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

근현대 고승 전문 연구가인 김광식 동국대 특임교수는 5월 19일 대행선연구원 제1회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대행 선사의 행적에 나타난 혁신불교의 성격’ 논문서 이 같이 주장했다.

本紙 창간, 당시엔 놀라움 자체
거사·청년 등 신행 소외자 품어
혁신불교 내보이며 대중화 성공


김 교수는 대행 선사가 본격적으로 활동한 197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약 30년의 기간을 세 단계로 나눠 분석했다.

첫 번째 단계는 1971년부터 대한불교회관을 한마음선원으로 개칭하기 이전 단계로 원주 상원사의 불사(1960년대)를 마감하고, 안양으로 이전하여 기반 조성을 한 단계이다.

두 번째 단계는 1982년 한마음선원으로 전환하고 조계종에 등록을 하면서 본격적인 종단 중심부로 진입한 시기이다. 이 기간은 대행의 포교 활동과 한마음선원이 본격적으로 발전 단계로 국내지원, 국외지원의 개설이 개시됐다. 특히 선법가 활동, 영탑공원의 가시화는 여타 단체에서 볼 수 없는 특이성이었다.

세 번째 단계는 1994년 <현대불교>의 창간부터 입적하였던 2012년까지다. 이 단계에서는 대행과 한마음선원이 불교계 중심부에 완전 진입하여 정상에 섰던 기간이라는 게 김 교수의 분석이다.

이에 대해 김 교수는 “그 어떤 사찰과 단체도 행하지 못하였던 불교계의 신문을 설립, 경영한 주체는 누구였는가. 더욱이 비구니 스님이 신문사를 경영한다는 것은 그 당시는 놀라움 그 자체”라며 “대행 선사가 추진한 거사법회, 청년법회, 불교방송국 등은 불교계에서는 감히 시도할 생각을 할 수 없었던 신선한 불사였다. 소외자, 방관자였던 거사와 청년을 주제로 법회를 한 것은 CEO적인 마인드라 아니 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소외·방관자들을 신행의 중심으로 이동시킬 수 있던 이유는 무엇일까. 김 교수는 산업화에서 소외된 계층들을 대행 선사가 손을 잡아줬고, 그들의 공허감을 치유하는 교화력이 있었다는 분석을 내놨다.

김 교수는 “당대 불교와 종단은 마땅히 걸어가야 할 행보, 노선을 가지 못하였는데 그 당위의 노선을 대행 선사는 걸어갔고 성사시켰다”며 “산업사회에서 소외된, 불교를 진정으로 필요한 계층에게 손을 내민 사업들이 응답을 받았던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대행 선사의 불교혁신은 기복 및 경전 중심에서 참선 중심의 포교, 소외자 중심의 포교, 선법가로 지칭된 음악 포교, 서적 및 미디어를 활용하는 적극적인 포교, 일원상(一圓相) 수용, 참선의 독창성(주인공 관법, 세 번 죽는 수행 단계 등을 거론할 수 있다”며 “혁신적·파격적·특별한 시도는 그 자체가 혁신불교였다. 시대의 변화를 예견하고, 대중의 심성을 고려한 불법 생활화의 구현”이라고 강조했다.

다만 대행 선사의 정체성 정립이 정착되지 못하고 전통·역사성이 미약한 점은 인지할 것을 김 교수는 주문했다. 그러면서 “대행 선사와 한마음선원의 역사에서 미흡한 것은 역사 및 사상의 탐구를 통한 정체성 재정비라 하겠다”며 “이를 위한 지속적인 연구·분석 작업이 뒤따라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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