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도사 율원 교수사 도암 스님

부산 열린불교아카데미… ‘수행의 목적’

불교에서는 개개인이 부처가 되기 위해 수행한다. 그런데 수행을 하면서도 자신의 수행이 과연 올바른 것인지 의문을 갖게 되는 경우가 많다. 어떤 기준을 중심으로 따져봐야 할까? 양산 통도사 율원 교수사인 도암 스님은 4월 24일 부산 열린불교아카데미 선지식 초청 회향법회서 “진성·청정·평등·정각 등 경전에서 흔히 보는 10개 단어가 수행의 기준이 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정리=하성미 기자

도암 스님은… 1991년 통도사 월파 선진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봉선사 월운 해운 강백으로 전강, 파계사 여산 철우 율사로부터 전계, 통도사 중산 혜남 율사로부터 전계 받았다. 백양사 승가대학장, 송광사 승가대학장을 역임하고 행자교육원 비구계산림 교수사, 갈마사를 역임했다. 현재 통도사 율원 교수사다.

경전서 보는 흔한 10단어
바르게 지키는지 확인하고
잠들어있는 내 마음상태
수행으로 불성 일깨워야

진실이 없으면 감동도 없다
오늘은 가장 많이 들어본 흔한 주제이면서도 잘 다루기 힘든 내용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바로 진성(眞誠)·청정(淸淨)·평등(平等)·정각(正覺)·자비(慈悲)·감파(勘婆)·방하(放下)·자재(自在)·수연(隨緣)·주수(主修)입니다. 글자 수로는 20자, 단어로 10개인 이 말들에서 불교란 무엇이고 우리의 목적은 무엇인지, 그리고 ‘나는 수행을 잘 하고 있는가, 바르게 하고 있는가’라는 물음을 점검하고 기준 삼으려 합니다.

먼저 진성, 청정, 평등, 정각, 자비는 불법이 추구하는 목표입니다. 부처님의 마음은 이것을 기본으로 합니다. 부처님의 마음은 불성이 현재 작동되고 있는 것이고, 우리의 마음은 잠든 상태입니다. 수행을 통해 불성의 마음이 깨어나도록 스스로 보리심을 내야합니다. 보리심을 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자신이 가진 청정 순도를 어제보다는 내일 부처님의 청정 순도까지 끌어올리고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보리심을 발한 것입니다.

우리가 경전에서 가장 많이 보는 단어가 진실입니다. 출가자든 재가자든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이익을 위해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며 가면을 쓰고 기만합니다. 그러다 탄로가 나면 그동안 누렸던 이익에 이자까지 쳐서 나가게 되는데 그때는 감당이 안 됩니다. 하루하루 진실을 연습해야 합니다. 진실한 상태에서 공경과 정성이 얼마나 들어가는가에 따라 내 가슴의 울림이 전달됩니다. “내가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왜 내 이야기가 전달이 안 되냐”며 목소리를 높인다면 생각해볼 부분이 있습니다.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데 상대방이 아무리 강조를 해도 마음에 “그건 이 사람 욕심이지”란 생각이 들고, 마음이 안 열리는 경험을 종종 해보셨을 겁니다. 진실이 정성을 만났을 때 바로 그때 빅뱅을 일으킵니다. 부처님은 한 평생 진실과 정성이 가득 넘치셨습니다. 그것을 닮아가기를 연습해야 합니다. 이것이 보리심을 향해서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것이며 인격 완성을 위해 나아가는 길입니다.

청정한 상태서 마음을 쓰자
두 번째는 청정입니다. 그런데 첫 번째인 진실을 기준으로 “나는 진실하니까 정말 솔직하니까 화나면 화내고 때리고 싶으면 때립니다”라고 하는 분이 실제로 있습니다. 진실하지만 부처님 법과는 맞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중심은 진실하셨으나 운영 체계는 청정하셨습니다. 우리의 정신이 욕심으로 오염된 상태에서 마음을 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청정이란 것은 우리를 맑고 향기롭게 이끌어 주는 업력입니다. 업력은 업이 있으면 보가 있습니다. 습관도 업입니다. 또 취향도 업이며 반복입니다. 또 상처도 반복해서 긁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생겨도 멈출 길이 없습니다. 그것이 업력입니다. 그 상처를 곱씹고 돌리면 상처의 회오리에 감겨서 결국에 자신도 소용돌이에 감기고 다른 사람도 소용돌이에 감아 넣습니다. 트라우마가 강한 사람은 다른 사람도 감아 오염시킵니다. 부처님께서는 아라한과를 얻기 전까지는 양심을 믿지 말라하셨습니다. 양심적이란 생각의 함정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사람은 구생번뇌가 있습니다. 구생번뇌란 태어날 때부터 익숙한 마음을 잠시 놓치면 반복하고 돌아가는 습관이며 업력입니다. 큰 틀로 보면 탐심이고 성냄, 어리석음입니다. 또한 거만심입니다. 사람들의 머리 꼭대기 위에 서서 내려 보고 싶어 하고 꼭두각시놀이 하듯 상대를 움직이고 싶어 하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알아차리기 힘이 듭니다. 양심이라는 기반 위에서 사람을 판단하고 상황을 이해합니다. 그 가운데 오해하고 착각을 해도 자신은 알지 못합니다. 이렇게 지혜가 부족해서 착각을 일으킨 상태에 있으면 세상이 얼마나 더럽겠습니까? 더러운 세상에 참고 살려니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부처님 법은 평등입니다. 차별에서 평등으로 한발 한발 나아가는 법을 연습해야 합니다. 일체 중생을 바라보면서 마음과 중생이 근본에서 다 동일하고 차별이 없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중생의 눈에는 온통 차별이 있습니다. 차별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고통이 따릅니다. 한 가정에서도 자녀들은 부모의 사랑을 두고 차별 받고 상처를 받습니다. 부모들은 차별한 적이 없다고 해도 자녀가 느꼈다고 한다면 있는 것입니다.

평등하게 보는 것도 연습을 통해 가능합니다. 차별은 마음을 옹졸하게 합니다. 차별을 두면 1번으로 친한 사람에는 동질감을 느끼고 2번과 3번순으로 멀어지면 이질감이 깊어지면서 적대감이 생성됩니다.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게 됩니다. 관계 속에서 평등을 바라보고 실천을 하면 도움이 됩니다.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도 됩니다. 거사님들이 자신의 머리를 보면서 부인의 머리를 볼 수 있으면 됩니다. 자신을 보고 살피는 것과 같이 남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불교 수행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세간에서도 반드시 필요한 부분입니다.

정각은 깨어있음입니다. 누군가가 자신이 양심적으로 이야기한다며 강하게 어필하는데 그 기반이 되는 양심이 삐뚤어져 있다는 것을 느낀 적이 있나요? 알아차림이 없을 때 다른 이들이 당신의 기준을 바로 그렇게 삐딱하게 느낍니다. 청정하려면 탐심을 안정시켜야 합니다. 청정하려면 진심과 치심을 그리고 거만심을 안정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비는 앞서 말씀드린 것을 실천하면 자연스럽게 일어납니다. 자비는 진실하고 정성스러움 기반 위에서 평등하게 사람을 바라보면 반응하게 됩니다. 자비심은 써야겠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탐심, 진심, 거만심, 치심이 청정해지면 욕심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대견스러워 보이고 도와주고 싶어집니다. 이것이 자비심입니다.

이제 알아차림을 의미하는 감파입니다. 자신이 움직일 때, 말을 할 때, 행동할 때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인자무적이라 말이 있습니다. ‘어진 사람에겐 적이 없다’란 뜻인데 실제로 그렇습니까? 공자도, 부처님도 적이 없으셨을까요? 아닙니다. 다들 애를 먹고 힘든 일을 겪었습니다. 그렇다면 인자무적이란 무슨 뜻일까요? 바로 ‘어진 사람에게는 적대감이 없다’란 뜻입니다. 적대감이 있으면 바로 알아차리고 내려놓으세요. 자신을 항상 진실하고 정성스럽게 그리고 청정함으로 깨어있도록 하세요.

늘 자기점검 잊지 않기
방하는 자신의 것을 내려놓고 따라 배우는 것입니다. 선한 사람을 만나면 따라 배우고 안 좋은 사람을 만나면 자신의 안 좋은 부분을 찾아 내려놓는 것을 연습해야 합니다. 요즘에 ‘공평하게 결혼한 여자의 최후’라는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글에서 남편은 이기적이고 부인은 양심적으로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즉 상대만큼 이기적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인거죠. 우리는 아주 이기적이거나 상대의 수준에 맞추는 이기주의자입니다. 부부 사이에도 이기적인 속내를 들키기 시작하면 배우자도 이기적인 행동을 취하게 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상당히 해결하기 힘든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상대의 수준에 맞춰 자신의 이기적 태도를 결정하는 기술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누가 먼저 했느냐보다 중요한 문제는 수준이 똑같아 진다는 것입니다. 정성을 받아 본 경험이 있어야 이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이제 자재에 대해 살펴봅시다. 우리는 이해관계와 인정관계 속에서 그물망처럼 짜여 구속되고 엉킵니다. 이기심을 발휘하고 수를 부리고 재주를 부린 자리는 제법 더 많이 엉키게 됩니다. 예를 들어 회사라는 사회구조 관계망 안에 있을 때는 엉켜서 힘이 들지만 사표를 내는 순간 연기처럼 사라집니다. 팽팽하게 유지하고 있던 것이 꿈 같이 사라지고 초연함을 얻습니다. 초연함 속에 정성을 다하고 자유롭고 걸림이 없는 것이 자재입니다.

그 다음 단어는 수연입니다. 살면서 사람들은 유리한 인연을 위해 조작을 합니다. 조건이 안 맞으면 거짓으로 꾸며 레벨을 맞춥니다. 억지로 맞추거나 자존을 팔거나 억지로 맺어놓으면 현재는 돌아가지만 결국엔 고통이 따릅니다. 좋은 조건이 되도록 노력을 할 수 있지만 욕심을 부려 거짓으로 꾸며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형편에 맞게 좋은 조건을 지을 수 있도록 보시도 하고 법보시도 하세요. 그리고 마음은 크게 내세요.

주수는 내 근기에 맞게 수행하는 것입니다. 염불이면 염불, 혹은 경전을 보는 간경, 독송, 참선 등 수행방법을 하나 선택해 수행하는 것입니다. 내 근기에 맞는 수행은 어떻게 알까요? 진실해지고 청정하며 평등해지고 자비로워지고 알아차림이 생긴다면 내 근기에 맞는 수행입니다. 근기에 맞는 수행법을 선택했으면 인생에 딱 하나만 가져가야 합니다. 참선하는 분은 참선으로, 염불하는 분은 염불로, 간경은 간경으로 자신만의 주수는 공력을 쌓는 자리입니다. 각자 다릅니다. 맹인이 코끼리를 더듬다 보면 결국은 코끼리를 다 알 수 있듯 주수를 유지하다 보면 불교 전체를 파악하고 실질적인 힘을 얻습니다. 부처님께서는 팔만사천가지 방편문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중생의 근기가 팔만사천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앞에 제시한 20글자 10단어를 염두에 두고 자신을 점검하면 간편하고 쉬울 것입니다. 이것을 기준 삼아 선지식도 점검하고 알면 될 겁니다. 우리가 성취해야 할 부처님을 벤치마킹하세요. 이번 생일지 다음 생일지 모르겠지만 이 길을 따르면 자성이 확 열린 것처럼 깨달음 얻는데 도움을 얻을 뿐 아니라 세간 출세간 모두의 삶에서 이익을 얻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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