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수·절복은 둘이 아닌 하나
내 기준으로 세상 제단말라

세상의 절반은 빛이요 절반은 어둠이다. 하루의 절반이 낮이요, 절반이 밤이기 때문이다. 하여, 영원한 기쁨이 없듯이 영원한 슬픔도 없는 것이다.

사람은 자연의 일부이다. 하여, 한의학에서 사람의 체질을 말할 때에도 음(陰)과 양(陽)으로 나누어 태음인(太陰人), 소음인(少陰人)과 태양인(太陽人), 소양인(少陽人)으로 나뉘어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점만 있는 사람이 없고 단점만 지닌 사람도 없을 터이다.

절반이 빛으로 충만한 행복이 있는가하면 절반이 어둠으로 가득한 불행이 자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흔히 이분법적인 옳고 그름으로 나누어 진보와 보수로 진영의 논리를 펴는 세상이지만 영원한 진보도 보수도 있을 수 없을 터이다. 나이테 둘레에 따라 그 색깔이 바뀌어 가고 지향하는 목표물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조직은 필요조건에 의해 모일 수도 흩어질 수도 있는 모래성인 것이다.

학문 또한 깊이와 넓이에 따라 측정의 눈높이가 달라질 수 있어 영원한 정답은 없을 터이다. 사상(思想)과 철학, 종교 신앙의 신념에 이르기까지 마음의 키 높이에 따라 계절이 바뀌어가듯 생각의 흐름이 윤회를 거듭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 주장과 철통 이념이 세월의 무게에 따라 멈춤이 있을 수 있고 교정을 필요로 하는 방향 바꿈의 변화를 겪을 수 있는 것이다.

나이에 따라 키 높이에 따라 입맛이 변하고 가치기준이 바뀌며 생활상식으로 일궈낸 판단 기준이 혼란을 불러들일 수도 있는 것이다.

만화책을 즐겨보던 아이가 연애소설로 순수문예에서 역사서적으로 끝내는 철학과 종교서적에 이르는 독서취향의 사닥다리는 하늘까지 맞닿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쉽게 판단해 자기만의 눈높이로 타인(他人)을, 사회를, 세상을 제단하지 말 일이다. 내가 이럴 수 있으면 다른 사람도 이럴 수 있고 내가 저럴 수 있으면 다른 사람도 저럴 수 있는 것이다.

삶에는 정답이 정해져있지 않듯 사람의 행동 반경에도 의미 부여를 하고 보면 죽일 놈이 살릴 놈이 되는 격이다. 하나의 형사 사건을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왜, 어떻게’로 엮어 신문기사로 옮겨 왔다면 그 사건의 주인공은 돌 던짐과 몽둥이를 맞아야할 어둠의 자식이 된다.

그러나 같은 사건을 어느 소설가가 사건 전후의 숨은 사연들을 꺼내들며 고뇌에 찬 현실 생활의 주인공의 삶과 정신세계를 조명해 옮긴다면 그 형사사건의 주인공은 죽일 놈에서 구제 되어야할 당위성으로 만인의 응원과 변호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을 살아가면서 섣불리 흑백논리에 가담하거나 선입견을 앞세워 사람의 차별화에 끼어들지 말 일이다. 내가 그 누구의 것이 영원히 될 수 없듯 그 누구도 영원히 나의 것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옳고 바름만을 실천하는 자 있을 수 없고 나쁨과 어긋남만을 행동하는 자 없는 것이다.

지킬과 하이드가 둘이 아닌 하나이듯이 투사와 보살은 둘이 아닌 한 몸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천사와 악마 또한 나의 정신세계에서 빛과 어둠으로 바뀌며 나타나는 한시적 현상일 뿐이다. 영원한 천사, 영원한 악마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투사가 보살이요 보살이 투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열반경〉에는 섭수자비(攝受慈悲)와 절복자비(折伏慈悲)가 등장한다. 끊임없이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어머니의 사랑이 섭수자비라면 끊고 맺는, 열고 닫음을 익혀 실천하는 아버지의 교육이 절복자비인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어머니와 아버지가 둘이 아닌 하나의 부모사랑 이듯이 섭수의 사랑과 절복의 교육은 둘이 아닌 하나인 것이다.

지혜가 많은 자는 복이 조금 부족할 수 있고 복이 많은 자는 지혜가 조금 부족할 수 있을 터이다. 영원한 승리자도 패배자도 없는 것이다.

부정적인 생각은 어둠을 몰고 온다. 긍정적인 생각은 희망과 빛을 몰고 온다. 어차피 인생의 삶에는 정답이 정해져 있지 않는 법이다. 너와 나, 우리 모두는 착각으로 눈높이만큼 세상을 끌어들이며 사는 것이다. 우리 앞에 문(門)은 항시 열려있다. 빛의 세상에서 후회 없이 신바람 나게 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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