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화 속 스토리텔링 -선재동자 이야기 下

보물 제1695호 쌍계사 노사나불도 괘불(1799년, 마본에 채색, 1302x594cm). ⓒ하지권

“나는 그때(발심했을 때) 다만 중생을 이롭게 하려 했을 뿐, 어떤 과보나 명예나 이득도 바라지 않았다.”

선재동자는 ‘어떻게 하면 진정한 보살이 될 수 있는가’라는 화두를 들고 53선지식을 두루 편력합니다. 그러데 여정의 후반부에 오면, 질문이 하나 추가 됩니다. ‘도대체 얼마나 걸립니까’입니다.

‘성자님은 보리발심하신지는 얼마나 되십니까’, ‘선지식님은 얼마나 걸려 깨달음을 얻었습니까’라는 선재의 질문에 선지식들은 공통적으로 두 가지를 말해줍니다. 첫째는 발심의 계기는 ‘결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었다’라는 것, 그리고 둘째는 얼마나 오래 걸리냐는 ‘분별심을 떠나 있었다는 것’입니다. 모두 수십억 겁 전부터 타인을 구제하기 위해 세세생생 공덕을 쌓았다는 것입니다.

“누구 한 명을 위해서거나, 한 집단을 위해서거나, 한 부처님을 공양키 위해서거나, 한 시대를 위해서거나, 한 서원만을 위해서거나가 아니라, 오로지 일체 중생을 남김없이 다 교화 조복하고자, 일체 부처님을 다 남김없이 섬기고자, 일체 불국토를 남김없이 다 청정히 하고자 마음먹어야 한다”고 휴사청신녀는 말합니다.

여정 후반 만난 다양한 주야신들
인간 나태함, 묘한 방편으로 경책
고통은 수행않는 내게 주는 경고

보살道·行 자문한 선재의 화두
스스로 보살이 되는 유일한 길

주야신들과 흥미로운 에피소드
여정의 후반에는 다양한 주야신(主夜神)들과의 만남이 전개됩니다. 그 중 특히 인상 깊은 주야신들을 소개합니다. 개부일체수화(開敷一切樹華) 주야신은 “중생들이 나와 내 것에 집착하여/ 무명 암실에 머물며/ 온갖 견해의 숲에 들어가/ 탐애에 얽매이고/ 분노에 무너지고/ 우치에 어지럽히고/ 시기 질투에 휘감기어/ 생사에 윤회하며/ 가난에 지쳐/ 부처님이나 보살님을 만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고 온갖 신통력을 내어 중생을 구제해 왔다고 합니다.

태초 다섯 가지 흐린 것이 생겨, 당시 사람들의 수명이 짧아지고 물건이 모자라고 고통이 많고 낙이 적어지고 착한 일은 닦지 않고 나쁜 업만 지어 서로 다투고 헐뜯어 탐욕을 내었다는군요.

이로 인해 풍우가 고르지 못해 곡식이 자라지 못하고 산과 풀과 나무가 모두 말라 죽게 됩니다. 천재지변이나 기후변화도 모두 중생들의 마음 작용의 과보임을 알 수 있습니다. 폭풍· 가뭄·폭우·태풍 등 심지어 우주의 운행까지, 일체 제법은 심식(心識)에 근거한다는 ‘유식(唯識)’의 논리입니다. 전생에 왕이었던 그는 수십억 겁 동안 가엾은 중생들의 평안을 위해 발원한 끝에, 그들이 곡식과 과일을 풍족하게 먹을 수 있게 하는 ‘모든 나무에 꽃을 피우는(개부일체수화) 주야신’이 되었다고 합니다.

주야신들이 중생을 이롭게 하는 방편의 묘(妙)는 참으로 다양하고 또 불가사의합니다. 보덕정광(普德淨光) 주야신은 게으른 중생의 마음을 집중적으로 공격합니다. “집에 있으면서 방일한 중생에게는 부정한 생각을 내게 하고, 싫은 생각, 고달픈 생각, 핍박하는 생각, 속박되는 생각, 나찰이라는 생각, 무상하다는 생각, 괴롭다는 생각, 내가 없다는 생각, 공한 생각, 생이 없는 생각, 부자유하다는 생각,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생각을 내게 한다.”

방일하여 게으름에 빠져 있는 중생의 마음은 오히려 더 한가롭지 못합니다. 오만가지 생각들이 일어나 괴롭히니 혼침이나 도거에 빠지게 됩니다. 현대에는 넘쳐나는 음식과 다양한 약물, 마음을 뺏는 오락물 등이 있어 이들 기호품들로 마음이 도피합니다.

이러한 중생들에게 방일의 고통을 주어 궁극에는 “오로지 법의 즐거움에 머물게 한다. 자신이 집으로 여기는 삿된 것에서 벗어나 진실한 집에 들게 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괴로운 생각이 들면, 이는 수행을 하지 않고 있는 나에 대한 주야신의 경고라는 것입니다. 고통은 발심과 정진의 계기가 됩니다. 나에게 오는 시련과 고통들은, 참으로 감사하게도, 주야신의 ‘가면을 쓴 축복(Blessing in disguise)’이라는 것이지요.

“마음먹은 대로”
대원정신력구호일체중생(大願精神力救護一切衆生) 주야신은 ‘출리심(出離心)’의 중요성을 말합니다. 우리는 마음 같지 않은 삶을 그냥 묵인한 채 삽니다. ‘그 사람은 원래 그래’ 또는 ‘내가 뭘 하겠어’, ‘세상 또는 사회의 편견을 바꿀 수 없어’, ‘그냥 대충 맞춰주고 좋은 게 좋은 거지’하고 합리화 합니다.

하지만, 출리심 즉 ‘마음을 내는 것’ 자체가 온 우주를 바꿀 만큼 강력한 것이라고 합니다. “(선지식을 보고) 마음을 내니 그와 같은 경지(同行)를 얻었다”, “열 가지 청정한 마음을 일으키니, 불찰 미진수의 보살님들과 같은 행을 얻었다”라고 합니다.

생명평화 운동에 앞장서시는 도법 스님은 저서인 <망설일 것 없네 당장 부처로 살게나> 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하는 우리에게, 지금 바로 ‘동체대비심(同體大悲心)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라’고 합니다. 어려울 것 없고, 당장 여기 이 자리에서 부처의 큰마음을 내면 그만이라고 강조하십니다. 왜냐하면 마음 낸 대로 그대로 되기 때문입니다.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이라는 말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그런데, 마음을 낼 때는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나만의 이익이 아니라 ‘공익(公益)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부처님의 마음자리에 있다면, 저절로 공익되는 일만 보이고 공익되는 일만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 대덕사 소장 고려불화 ‘수월관음도’의 선재동자 부분.

보살의 전제 조건, 無我
자아라는 암울한 존재의 감옥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깨달음을 향한 수행과 타인을 이롭게 하겠다는 보살의 마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보살로서의 삶에 첫 걸음을 내딛기 위해서는 우선 나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나에 대한 집착에서 떠났기에/ 내 몸도 아끼지 않는 마당에/ 하물며 재물이겠는가/ 그러므로 살아가는 데에 두려움이 없다/ 남의 공양을 바라지 않고/ 모든 중생에게 베풀기만 하므로/ 나쁜 말을 들을 두려움이 없다/ 나에 대한 집착에서 이미 벗어났기에/ 나의 존재도 없는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겠는가/ 내가 죽더라도/ 부처나 보살을 떠나지 않을 것을 분명히 알기에/ 악도에 떨어질까 두려워하지 않는다.
<화엄경> ‘십지품’ 환희지(보살의 첫 경지) 中

‘나’라는 생각과 집착에서 벗어났기에 “밤낮으로 선한 일을 해도 지칠 줄 모르고, 항상 진리의 말씀을 듣고자 하고, 남에게 의존함이 없고, 이익이나 명예나 존경받기를 탐착하지 않고, 온갖 아첨과 속임에서 떠나고, 자각하는 지혜의 마음을 내어 태산과 같이 움직임이 없고, 세상의 일을 버리지 않으면서 출세간의 도를 이룬다”라고 합니다.

보살도·보살행, 스스로 답하다
선재동자 여정의 막바지에는 보살이 되기 위한 구체적인 조건과 단계가 제시됩니다. 보살행을 원만히 하기 위해서는 ‘청정한 삼매를 얻어 모든 부처님을 보고, 청정한 눈을 얻어 모든 부처님의 상호와 장엄을 항상 살펴야 한다’고 선지식은 말합니다. 보살행으로 나아가기 위한 전제 조건은 우선 청정삼매를 얻어 부처님 세계를 보는 일입니다.

먼저 ‘크고도 깊은 지혜의 눈을 떠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보살이 장엄해탈문을 얻을 수 있는 열 가지 법장(法藏)’이 제시되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가 먼저 나열돼 육바라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앞의 세 가지 덕목인 ‘보시·지계·인욕’은 하화중생(下化衆生)을 위한 것이고, 뒤의 세 가지 ‘정진·선정·지혜’는 상구보리(上求菩提)를 위한 것으로 육바라밀이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라는 대승불교의 ‘보살 정신’을 압축해 놓은 것임을 재차 확인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여기에 추가 된 항목들이 방편·서원·힘·청정지혜로 모두 합해 열 가지의 법장을 이룹니다.

그리고 세상의 광명이 되는 ‘보살로 태어나는 열 가지 장(藏)’이 공개됩니다. 이것을 성취하면 보살의 선근을 증장시키면서도 고달프거나 싫거나 물러날 일이 없다고 합니다. 이 단계까지 오면, 선재동자가 간절히 찾던 ‘보살행과 보살도’에 대한 답들이 거의 다 제시되게 됩니다.

“지극히 사랑하는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의 몸을, 어떤 사람이 할퀴고 찢는다면, 그 마음이 얼마나 아프고 통절하겠는가? 보살은 자신을 위해 일체지를 구하는 것이 아니므로, 생사와 욕락에 탐하지 않으며, 뒤바뀐 생각·소견·마음의 얽매임·애착·억측의 힘에 움직이지 않는다. 오로지 중생들이 모든 길에서 한량없이 고통 받는 것을 보면, 대비심(大悲心)을 일으켜 큰 원력으로 널리 거두어 주며, 자비와 서원의 힘으로 보살행(菩薩行)을 닦는다. 그것은 일체 중생의 번뇌를 끊기 위함이요, 여래의 일체지 지혜를 구하기 위함이요,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기 위함이요, 모든 광대한 국토를 맑게 장엄하기 위함이요, 중생들의 욕락과 그 몸과 마음으로 행하는 일을 맑게 다스리게 때문에, 생사 중에서도 고달픈 줄 모른다.”

위에 인용한 문구는 어느 선지식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닙니다. 다름 아닌 선재동자의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보살행과 보살도가 무엇인지 묻는 자신의 화두에, 스스로 답하는 선재동자를 보게 됩니다. 어느새 자신이 ‘보살’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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