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자라면 누구나 부처님오신날에 부처님이 설하신 진리의 가르침을 되새기고, 참된 불자로 살아가고자 서원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현실에서 이끌어주는 존재가 바로 스승이다. 그렇기에 스승은 제자에게 또 다른 부처님이 되곤 한다. 불가(佛家)의 구성요소가 비구·비구니·우바새·우바이 사부대중이듯 스님과 재가불자의 인연은 출가수행자와는 다른 애틋함이 녹아 있다. 불기2561년,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사바세계를 떠난 스승을 추억하는 재가불자들의 마음을 담았다. 〈편집자주〉

“도반으로 대해주신 스승님 은혜”

청화 스님 & 배광식 참수레 이사장

스승이신 청화 스님. 스님께서 사바세계를 떠나신 지도 벌써 십수년이 흘렀건만 저는 아직도 30여 년 전 스승님을 뵈었던 그때를 잊지 못합니다. “도인 스님 뵈러가자”는 평생도반 수형 보살 권유에 따라 곡성 태안사를 찾으며 인연이 시작됐지요. 저는 당시 스님이 해회당 마루를 걸레로 훔치고 계시던 모습에서 묘한 감동을 느꼈습니다. 스님은 저희에게 “우리는 부처님 당시나 신라 때나 다 같이 공부하던 도반”이라며 무척 잘 대해주셨습니다.

혹시 기억하시나요? 1987년 부처님오신날 즈음이었습니다. 그해 부처님오신날은 어린이날과 겹쳤는데 제 둘째아이 명준이 유치원서 만든 색종이 고깔모자를 쓰고, 연등을 든 채 석촌호수를 한 바퀴 돌았을 때입니다. 유치원 행사가 끝나자마자 아이를 데리고 7시간을 달려 태안사에 갔지요. 스님은 명준이를 보더니 “명준동자 모자가 참 좋구나! 먼 길 오느라고 힘들었지?”하시며 손을 꼭 잡아주셨습니다.

스님의 토굴에서 한참 말씀을 듣다가 방문 밖으로 나오니 스님의 검정고무신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명준이 스님 신발을 신고 토굴 앞마당을 이리저리 걸어 다니고 있었지요. “왜 네 신발을 놔두고 스님 신발을 신고 다니니?”하고 제가 물으니, 명준은 “나도 이 다음에 커서 큰스님처럼 되고 싶어서요!”라고 대답해 한바탕 웃음꽃이 피었습니다.

인연은 미국에서도 이어졌습니다. 스님은 1992년 미국 포교를 위해 캘리포니아 카멜의 삼보사에 주석하셨고, 저는 1994년 교환교수로 미국에 가게 돼 스님과 가까이 있고 싶어 서부 쪽 대학을 택했습니다. 스님께선 오래 전 떠나셨지만 저는 아직도 스님이 주신 〈금강심론〉과 손수 번역하신 〈정토삼부경〉을 공부합니다. 30년간 매일 읽은 공덕 덕분인지 얼마 전에 졸저 〈금강심론 주해〉를 펴냈습니다. 모자란 점이 많지만 스님의 은혜에 실개천만큼 작은 보답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부처님오신날입니다. 뜻 깊은 날을 맞아 1986년 6월 1일 발행된 ‘금륜회보 제2호’에 실린 스님의 법문으로 기려봅니다.

“아아! 부처님이 오신 날, 만 중생이 저마다 진리로 태어난 지혜의 날, 그리고 이웃을 위하여 생명을 바치고도 호리회한이 없는 대자대비로 태어난 사랑과 봉사의 날, 이날은 바로 인간의 진정한 존엄성을 찾은 천부적인 인권의 날이며, 모든 불행의 씨앗인 억겁으로 쌓인 번뇌를 모조리 해탈하는 자유의 날입니다. 그래서 우리 가슴마다에 자비와 지혜로 아롱진 등불을 켜들고, 온 누리의 구석구석을 찬란하게 비추며 환희용약하는 영원히 행복한 광명의 축제입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마하반야바라밀!”

정리=노덕현 기자

“인생 지표 남기고 스님께선 어디로…”

통광 스님 & 김성림 前 조계종 중앙신도회 수석부회장

통광 스님, 봉축 연등과 장엄등이 빛나고 부처님오신날을 찬탄하는 화려함이 짙을수록 스님이 더욱 그립습니다.

전란으로 폐허가 된 칠불사 터에서 중창을 시작하실 당시 작은 방 하나 허허벌판에 세워져 있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1980여년 부산에서 출발한 방생회 모임 일원으로 처음 갔던 칠불사는 지금과 달리 초라했지요. 그때 안내자는 칠불사가 1세기 경 가락국 시조 김해 김수로왕의 일곱 왕자들이 찾아 본래자성 자리를 찾은 곳이라고 했습니다. 가야불교의 발상지이며 가야 불교의 성지라고 말이죠. 스님에 대한 설명도 듣지 못한 채 김해김씨인 저로선 인연이란 생각에 단순히 마음이 끌렸습니다. 그렇게 스님과의 인연이 시작됐고, 덕분에 저도 칠불사 불사에 동참하게 됐습니다.

스님께선 6.25전쟁과 지리산 공비 토벌 참화로 가람이 모두 불타 폐허만 남은 곳에서 천일기도를 하며 작은 초막을 시작으로 문수전, 대웅전, 설선당, 요사채를 복원해 나가셨지요. 1983년 지방문화재 144호로 지정된 아자방 복원과 지금 칠불사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30여년 중창 불사의 역사를 지켜본 것은 환희 그 자체였습니다. 목수의 노임으로 부산을 찾아오셔서 탁발하실 때 그 노고를 지켜보며 마음이 쓰릴 때도 있었지만 함께 불사에 동참할 기회를 갖게 되어 기쁜 마음이 정말 컸습니다.

차의 성지인 칠불사에 차밭을 일구겠다는 스님 말씀도 기억납니다. 그때 차밭을 사서 보시했던 것은 정말 제 인생의 큰 기쁨으로 남아 있습니다. 어려운 불사 형편에도 봉축법회 때 의용 소방대원들이 찾아오자 봉투를 마련해 큰 보시금을 주시며 격려하시던 모습을 떠올리면 참된 불사의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인연은 계속 이어져 부산으로 오실 때면 저희 집에서 남편과 자녀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말씀을 종이에 적어 나눠주셨죠. 그리곤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셨던 내용이 아직도 저희 가족들에게는 삶의 지침이 됩니다. 재복보다는 심복, 마음을 잘 써야 한다는 그 가르침을 잊지 않고 제 마음에 새겨 두었습니다.

사실 그때는 스님께서 얼마나 대단한 강백이셨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10년 전쯤 우연히 서울에서 들은 스님의 명성이 되레 어색할 정도였으니까요. 지금 돌이켜보면 스님께선 자신을 내세우신 적이 없었습니다.월정사에서 탄허 스님의 화엄경 강의를 듣고 강맥을 이으셨던 것도, 한학을 7세에 다 마치신 것도 모두 다른 분들에게 듣고 알았습니다. 다들 몰랐느냐고 묻는 말에 그저 전 웃기만 했습니다. 스님은 제게 인생의 지침을 알려주는 나침판이자 쉼을 주시는 나무그늘과 같았습니다.

참된 원력과 함께 동참하는 기쁨의 보시를 일러주신 통광 스님, 이제는 제가 육바라밀 서원을 실천하며 눈에 보이지 않는 문수보살의 지혜도량 불사를 이어가겠습니다.

정리=하성미 기자

“멍게는 여전히 잘 지내고 있습니다”

혜산 스님 & 이동배 정광고 교법사

스님, 저 진상(眞常)입니다.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스님과의 추억을 다시금 떠올려보는데 저는 참 부족한 제자였습니다. 제 스스로 별명을 ‘멍게(멍청하고 게으른)’라고 지을 정도이니까요. 1982년 완도 시골에서 상경해 스님을 처음 뵈었을 때 스님께서는 정말 친절하게 받아주셨습니다. 그 이후 출가해 계를 받고, 10.27법난 규탄대회로 인해 구속됐을 때도 스님께서 저를 도우려 백방으로 노력해주신 점 지금도 깊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과이력으로 군법사 임관이 무산될 위기도 스님 덕분에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결국 출가수행승이 아닌 재가자의 삶을 택한 데 대해 많이 아쉬우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때 하지 못한 말, 이 기회를 빌려 말씀드립니다. 제 스스로 군법사 전역을 앞두고 승려로서 살아갈 것인지, 일반인으로 돌아갈 것인지 고민을 거듭했습니다. 그리곤 결론 내렸습니다. 부끄럽지 않은 스님이 되지 않을 바에는 출가자의 길을 걸어선 안 된다고.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스님께서는 저희 내외에게 식사도 대접해주시곤 했고, 사형사제가 모이는 자리에 저를 불러 “진상이는 우리 문중”이라며 챙겨주셨습니다.

그렇게 정을 많이 주셨던 스님이기에 지금도 내소사 앞을 지날 때면 스님께서 심혈을 기울여 만드신 돌담이 자꾸만 떠오릅니다. 공양주 보살님 한 명과 스님, 그리고 저. 단출하고 보잘 것 없는 시골사찰이었지만 하나씩 꾸며나가던 그 추억은 여전히 생생합니다. 그러고 보니 그때도 제가 스님께 편지를 하나 남겼네요. 민주화의 물결이 넘실대던 그때 사회에서 불교가 과연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다 스님께 장문의 편지 하나 남기고 서울로 올라가 불교중흥운동을 펼쳤죠. 제게 무슨 탈이라도 생기진 않을까 상경을 만류하시던 그 모습, 스님의 인자함을 닮고자 제가 이제 제자들 걱정을 합니다.

제가 기억하는 스님은 이판과 사판에 모두 밝은 분이셨습니다. 서울대를 졸업하고 공무원 생활을 하다 출가하신 스님은 아무 것도 없는 사찰을 일구는데 공을 세우셨고, 대중법문은 대중의 근기에 맞춰 늘 쉽게 부처님 가르침을 전해주셨습니다. 당시 스님께서는 지금의 신행혁신운동인 ‘붓다로 살자’와 같은 삶을 강조하셨습니다. “네가 지금 부처라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라”시던 스님 말씀, 항상 깊이 새겨 살아가고 있습니다.

참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스승님께서 “사랑하는 진상아”하고 저를 불러주시던 그 말이 다시 듣고 싶습니다.

정리=윤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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