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득무설분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得阿?多羅三?三菩提耶. 如來 有所說法耶 須菩提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야 여래 유소설법야 수보리)

言. 如我解佛所說義 無有定法名阿?多羅三?三菩提 亦無有定法如來可說. 何

(언. 여야해불소설의 무유정법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 역무유정법여래가설. 하)

以故 如來所說法 皆不可取 不可說 非法 非非法 所以者何 一切賢聖 皆以無爲

(이고 여래소설법 개불가취 불가설 비법 비비법 소이자하 일체현성 개이무위)

法 而有差別 (법 이유차별)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겠느냐. 또 여래가 어떤 법을 설명한 일이 있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제가 알기로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뜻은 정한 법이 있는 것이 없어서 이름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므로 다만 정한 법이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여래께서 말씀해 주셨나이다. 왜냐 하오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법은 취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고, 법도 아니고 법 아닌 것도 아니기 때문이옵니다. 어째서 그런가 하오면 모든 성현께서 함이 없는 법으로 차별이 있기 때문이옵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으로 ‘아’는 없다(無)는 뜻이고, ‘뇩다라’는 위(上)라는 뜻으로 위가 없으니 아래도 없습니다. 위는 스스로 있지 못하고 아래로 인하여 있으므로 있는 것이 아니고, 또한 위는 스스로 없지 못하고 아래가 없을 때 없으므로 없는 것도 아닙니다. 이와 같이 상, 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므로, 좌(左), 우(右)도 역시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상, 하가 없으니 좌, 우도 없으므로 일체의 분별 대립이 없다는 뜻이며, ‘삼’은 바르다(正)라는 뜻으로 분별망념을 여읜 우리들의 모든 생각과 행위가 바르다는 뜻이며, ‘먁’은 두루하다, 평등하다(等)는 뜻으로, 상하와 좌우가 없고 모든 생각과 행위가 바르기 때문에 일체가 두루하고 평등하여 차별이 없는 이 마음을 ‘보리’ 또는 깨달음(覺)이라고 하는 것은, 일체 중생이 본래 부처이므로 오직 좋아하고 싫어하는 분별망념을 여의면 모두가 부처라는 뜻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와 같은 모든 분별망념에서 벗어나라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말씀하셨으나, 이 말씀을 들은 중생들은 망념에서 벗어나는 그런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있다고 또 다시 집착합니다. 부처님의 팔만사천법은 중생들이 분별망념의 집착에 대응한 임시방편의 말씀이기 때문에 정함이 있거나 결정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름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며, 모든 이름은 마음의 다른 이름 즉 마음의 별명입니다. 왜 그런가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법은 참마음의 별칭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취할 수 없고,’ 여래의 말씀은 티끌수와 같은 우리들의 망념에 대응한 방편이기 때문에 방편으로는 참마음을 알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아닌 것이 진공이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아닌 것도 아닌 것이 묘유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본래 이름은 마음이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마음의 별칭입니다. 어째서 그런가 하오면 모든 성현께서 함이 없는 법으로 차별이 있기 때문이옵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와 같이 무위법(無爲法)으로 차별이 있는 성현들도 역시 방편입니다. 성현은 보살 10지에 속하며 무색계의 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유처. 비상비비상처에 머물고 있습니다. 부처님과 수보리 존자가 주고받는 말씀의 진정한 뜻은, 티끌만한 분별과 차별, 계급이 없는 한마음이 우리들의 참된 모습일 뿐 성현도 차별이 있으므로 또한 방편이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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