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축 좌담] 진정한 불교적 리더십이란

“서로 달라도 큰 틀의 共同善 지향해야”

박근혜 前대통령의 파면 이후 ‘리더십’이 화두로 떠오른 가운데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 선거가 1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급작스레 진행되는 선거 일정에 각 정당과 대선후보자들은 정책공약을 내세우기 바쁘고, 국민들은 어느 후보자를 지지할 것인지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참다운 지도자’를 선출해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중도적 리더십’ ‘포용의 리더십’ 등 불교적 사상이 중요시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에 본지는 4월 21일 ‘이 시대 필요한 불교적 리더십’이라는 주제로 본지 회의실서 좌담을 열었다. 좌담에는 조계종 고시위원장 지안 스님, 방영준 성신여대 윤리교육과 명예교수, 성태용 前건국대 철학과 교수가 참여했고, 진행은 김주일 本紙 편집국장이 맡았다.

정리=윤호섭 기자·사진=노덕현 기자

Q. 중도·포용의 리더십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합니다. 대선을 앞둔 지금, 국민은 어떤 덕목을 갖춘 지도자를 뽑아야 할까요?

성태용 교수 =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도덕성을 갖추고, 역사의 방향성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굉장히 급한 역사를 살아오다보니 지도자의 도덕성을 문제 삼지 않았는데, 도덕성에 기반을 둔 능력이 아니면 문제를 일으킵니다. 따라서 그 사람의 도덕성을 전제하고 능력을 따져야 합니다. 전임 대통령 누구라고 짚어 얘기할 순 없지만 ‘잘 살게 해주겠다’는 말만 듣고 대중이 대통령을 뽑는 게 상식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대통령이 꼭 잘 살게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죠.

다음으로 앞서 말씀드렸지만 지도자는 우리 역사가 지향하는 올바른 방향성에 대한 확고한 인식을 갖춰야 합니다. 우리 역사의 큰 방향은 민주화, 그 다음 평화통일이라고 봅니다. 여기서 안보문제와 평화통일을 반대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끊임없이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가운데 안보인 것이지, 적대를 부추긴 양극화 속 안보가 아닙니다. 양극화 속 안보는 과거 비민주세력, 독재세력들이 써먹던 방식입니다. 따라서 지도자는 양극화를 막고 민주화를 지향할 것, 그 다음 큰 흐름에서 평화통일이라는 한반도 정세에 대한 근본적인 안목이 있을 것.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지안 스님 = 우선 사심(私心)이 없어야겠죠. 요즘 정치하겠다고 나오는 분들 대부분 갑이 되려고 합니다. 갑이 되려 하지 말고 같은 을로서 어울릴 줄 알아야 해요. 또 친화력이 있어야 합니다. 나를 반대하는 사람도 안을 줄 아는 것이 이 시대 지도자의 중요한 덕목이라고 봅니다.

방영준 교수 = 저는 개인적으로 리더·리더십이라는 용어에 불편한 감정을 갖습니다. 제가 연구해온 게 아나키즘(anarchism, 무정부주의)이기 때문이기도 한데요. 어쨌든 리더십에는 ‘신비주의적’ ‘권위주의적’ ‘민주적’ 등 수식어가 많습니다. 근데 리더십에 아무리 그럴듯한 수식어가 붙는다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갑의 성격을 띤다고 생각합니다. 민주적으로 보이는 사람도 권력의 아편에 굉장히 약한 모습을 보이곤 하죠. 그래서 하심(下心)이 기본이 될 때 공감할 수 있는 바탕도 생기는 법입니다. 어느 후보자가 하심을 가졌는지 잘 판단해야겠죠.

Q. 소통도 매우 중요한 덕목일 것 같은데요.

지안 스님 = 오늘날 사회는 극단적으로 생각하거든요. 여기서 벗어나려면 보수 속에 진보가, 진보 속에 보수가 있다는 등식을 만들어야 합니다. 바로 부처님 가르침인 중도(中道)죠. 아울러 대승불교의 보살정신, 즉 사무량심(四無量心)과 사섭법(四攝法)을 갖춰야 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지도자는 특권의식을 버리고 오로지 중생을 위한 마음을 내야 합니다. 또 이념갈등으로 국민들의 간극이 더 벌어지면 안 됩니다. 반성해야 할 부분이죠. 중도로 소통하고 화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태용 = 편 가르기가 만연한 현대사회에서는 옳고 그름이 아닌 네 편, 내 편만 따집니다. 소통은 억지로 같으려 하는 게 아닙니다. 서로 다르지만 다투더라도 큰 틀에서는 함께 공동선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지도자라면 이를 제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 국민들의 정신적 장애 중 하나가 남북분단을 오래 겪으면서 갖게 된 ‘상대방을 말살해야 한다’는 의식입니다. 다르면 적이라는 의식을 깨야 합니다. 이것이 사회를 소통의 구조로 이끌어가는 근본적인 덕목입니다. 원효 스님의 화쟁사상이 이와 비슷합니다. 교리는 다르지만 모두 부처님의 한 가르침을 지향하는 것과 같죠.

방영준 = 소통은 말로는 쉽지만 이 능력을 기르는 것은 결코 간단치 않습니다. 소통하고 싶다고 되는 게 아니거든요. 인간은 본능적으로 이분법적 사고를 편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이것을 깬다는 건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선적으로 하심의 자세로 들어가고, 소통의 테크닉을 갖춰야 합니다.

독일의 경우 히틀러 같은 인물이 다시 나오면 안 된다는 전제 하에 굉장한 소통교육을 합니다. 민주시민 의식교육을 유치원 단계서부터 아주 치밀하게 하는데요. 예를 들면, 대화를 5분 나눌 때 내가 2분밖에 말을 못 했어도 친구에게 3분을 남겨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대선토론을 보세요. 전혀 민주시민 의식교육이 되지 않은 상황에서 민주주의를 부르짖는 겁니다.

성태용 = 아직도 목소리 크면 이긴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은데요. 국민 한 사람으로서 보고 있으면 참 답답하고 걱정스럽습니다.

Q. 정치에 ‘색깔론’이 여전합니다. 이를 뛰어넘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지안 스님 = 편들기 좋아하는 게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사회현상이죠. 제 상좌가 어느 날 아침공양을 마치고 저에게 “스님, 이번 대선에 어느 후보를 지지하십니까”하고 묻습디다. A후보냐고 물어보는데 이게 바로 누구편인지를 묻는 겁니다.

자(慈)·비(悲)·희(喜)·사(捨) 사무량심에서 ‘사’는 ‘버릴 사’자입니다. 또 대승에선 중도를 설명할 때 쌍차(雙遮, 구분하는 것을 차단)라는 표현을 쓰죠. 하지만 정작 대중은 내가 지지하는 것에 박수를 보내면서 그 반대는 싫어하지 않습니까? 내가 아무리 옳다고 주장해도 남은 인정 안 해줍니다. 내가 나를 잘 알아야 해요.

그리고 이념적인 색깔에 빠진 건 감염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는 이 상태를 가장 경계하죠. 깨달음을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을 갖고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을 배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면에서 대중은 이념서 벗어나야 합니다.

성태용 = 색깔론은 대중을 이용하기 제일 좋은 수단입니다. 벗어나기 위해선 국민이 자각해야 하거든요. 편 가르기를 해서 이득을 보려는 정치행태가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중은 사적인 이익을 취하려는 행위를 엄중히 심판할 수 있다는 걸 정치인들에게 인식시켜줘야 합니다. 또 이제 국민들은 “투표를 잘못해서 내 손가락을 자르고 싶다”고 말할 만큼 많은 일을 겪으며 성숙해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정치인들에게 색깔론을 펴서 이득 보려는 마음을 접어달라고 주문하고 싶네요.

아울러 지도자들은 겸허하게 대중에게 물어야 합니다. “당신은 어떤 세상에서 살고 싶은가” 말이죠. 그리고 국민들도 색깔론을 펴기보다 “어떤 세상에 살고 싶다”고 외쳐야 합니다. 이것은 색깔을 무조건 없애자는 게 아니라 함께 살아가기 위해 공동의 지향성을 가져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이것이 없습니다. 서로가 바라는 세상이 어떤 것인지 비교하고 토론하는 문화가 정착돼야겠습니다.

방영준 = 한국 정치의 색깔론은 굉장히 아픈 상처와 연결됩니다. 6.25전쟁인데, 이 전쟁은 단순한 땅따먹기가 아니라 마르크스 계급론과 연결되죠. 즉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라고 하는 계급론적 성격의 아픈 전쟁입니다. 이로 인해 한반도 전체가 분단의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런데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한국 근대화의 파행성을 겪습니다. 재벌 중심으로 양극화가 심해지고, 노동을 억누르면서 성장했죠. 이 속에서 색깔론이 잉태된 겁니다.

이 아픔을 정치가 치유해야 하는데 그런 생각은 않고 집권 도구로 이용해왔죠. 국민이 거기에 넘어간 겁니다. 물론 이데올로기를 떠나 살 순 없습니다. 신념체계이기 때문인데요. 종교도 하나의 이데올로기입니다. 이것은 칼과 같아서 강도가 가지면 흉기가 되고, 어머니 손에 쥐어지면 맛있는 반찬을 만드는 도구가 됩니다. 그래서 이 이데올로기를 관리하는 능력을 어떻게 기를 것인가 고민해야 합니다.

불교적 리더십과 이 시대 지도자가 갖춰야 할 덕목에 대해 2시간 가까이 대화를 나눈 패널들은 야외로 이동해 못다 한 이야기들을 이어나갔다. 패널들은 대중이 서로 다름을 인정하되 공동선을 추구하며 의견을 조율해 나가야 한다고 입을 모아 강조했다.

Q. 대중으로부터 박근혜 前대통령의 자질 문제가 오랫동안 제기된 바 있습니다. 실패한 리더십, 그 원인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지안 스님 = 작은 모임이라도 리더가 되면 전체를 잘 보살펴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근대에 성공했다고 평가할 만한 정권이 없지 않습니까? 이는 자신에게 맞는 코드만 찾고 전체를 보살피는 균형 감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정치 지도자 대부분이 그렇다는 점이 많이 아쉽죠.

박근혜 前대통령도 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지도자가 대중을 잘 이끌어가야 하는데 전체를 살피는 능력이 부족했던 것이죠. 강을 건널 때 맨 앞의 소가 방향을 잘못 잡으면 뒤따라오는 소들도 물에 빠지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또한 인품에 대해 대중이 잘 몰랐다는 점도 작용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성태용 = 박 前대통령 재직 시 ‘불통’이라는 대중의 지적이 많았습니다. ‘불통 대통령’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떠돌았죠. <주역>에 보면 ‘하늘이 위에 있고 땅이 밑에 있는 궤’가 있고, ‘땅이 위에 있고 하늘이 밑에 있는 궤’가 있습니다. 둘 중에는 하늘이 밑에, 땅이 위에 있는 궤가 좋습니다. 이 의미는 하늘이 땅 밑으로 자기를 낮추고, 땅은 위를 받들어 교차하는 것이거든요. 이것이 바로 소통의 궤입니다.

박 前대통령은 뭔가 자기 존재에 관한 특별한 의식을 갖고 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대중 위에 군림하면서 소통하지 않았던 게 가장 큰 문제라 할 수 있겠죠.

또 하나는 역사의 진행방향과는 반대노선을 타지 않았나 싶습니다. 역사의 흐름은 어느 방향성을 갖기 때문에 남북관계도 경색이 아닌 풀어나가는 방향으로, 양극화가 아닌 소통하는 방향으로 가야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했죠.

방영준 = 박 前대통령의 실패 원인은 너무 리더흉내를 냈다는 점입니다. 불교에서 하심을 강조하는데 이게 부재했다고 볼 수 있죠. 저는 ‘상심(上心)의 오만’이라고 평가합니다.

Q. 그렇다면 부처님 생애에서 본받을만한 리더십을 확인할 수 있을까요?

지안 스님 = 부처님을 ‘삼계도사(三界導師)’라고 표현하죠. 길을 안내해주는 길잡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부처님은 참 특이한 분입니다. 부처가 되기 위해 출가하는 과정에 권력·명예·부를 버리고 떠나죠. 세속적인 가치에서 볼 때는 모순으로 와 닿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모순 속에 합리를 찾아냅니다. 부처님은 도그마(dogma)가 없어요. 세간으로부터 “세력을 규합해 정치적 단체를 만들려 한다”는 모함도 당했는데요. 부처님은 대중에게 이런 얘기를 합니다. “내 말이 당신들에게 도움이 되면 잘 참고해서 살아가는 데 이롭게 해라. 그러나 당신들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하진 않는다”고 말이죠.

심지어 자이나교도가 부처님을 따라 개종을 하려 할 때도 말립니다. 자기 가르침을 따라 개종을 하면 환영하는 게 일반적이지 않겠습니까? 이런 것들이 이 시대 정치인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됩니다. 물론 출세간적인 의미를 담아놓고 있다고 볼 수 있죠.

성태용 = 우선 부처님은 종교적 태생이 좀 다릅니다. 우리와 종자가 같죠. 신의 아들이라든가 하는 권위를 갖지 않고, 대중 위에 군림하지도 않는 종교는 불교밖에 없을 겁니다. 대개 어떤 종교든 특수한 창시자로 나타나는데 불교는 똑같은 인간으로서 누구나 성취를 이룰 수 있다고 강조하니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와 함께하는 리더라는 점에서 불교적 리더십은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부처님의 목표가 뭐였을까요? 중생의 성취, 그들이 살아가는 사회의 평화 그 자체가 목표지 이것을 어디에 이용하겠다는 게 전혀 없습니다.

스님 말씀에 보충설명을 하자면 자이나교도 시하 장군의 개종을 부처님은 3번이나 말렸습니다. 그럼에도 장군이 뜻을 굽히지 않자 조건을 붙여 허락합니다. “지금처럼 자이나교 교단에 계속 보시하고, 공양을 올려야 한다”고 말이죠. 자신의 아랫사람을 만들려는 목적이 전혀 아닌 겁니다. 평화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개개인을 도구로 삼지 않고, 그들의 완성 통해 사회를 완성시킨다는 것, 이게 굉장히 중요한 얘기입니다. ‘전체를 위해 개인이 희생해야 한다’는 파시즘(fascism)의 위험한 논리와 비교될 수밖에 없습니다. 지도자로서 근본적인 사고방식이 다른 것이죠.

방영준 = 여러 사례를 말씀해주셨지만 부처님의 생애는 어느 경전보다도 많은 교훈을 전해준다고 생각합니다. 그 생애 자체가 보물창고이고, 현대적인 리더십이라고 볼 수 있죠.

Q. 부처님께서 보이신 삶을 현대사회 지도자에게 적용 가능할까요?

지안 스님 = 리더십의 본질은 변하지 않지만 방편을 새롭게 써야하는 부분은 있겠죠. 개인적으로는 사회가 전체적으로 향상돼야 한다고 보는데요. 불교는 어떤 면에서 중생 전체의 성숙을 위해 충고해주는 종교입니다. 그런데 현대사회는 과학문명이 발전하고 지성인들도 많아졌음에도 불구하고 계·정·혜 삼학(三學)의 학력은 떨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학력을 높이는 데 힘써야 합니다.

1960년대 인도 대통령이었던 라다크리슈난(Radhakrishnan)이 부처님에 대해 쓴 글을 보면 “석가모니 부처님은 태어나 죽을 때까지 한 번도 화를 내지 않은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렇게 수행된 인격을 흠모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안타까운 점은 종교가 자본주의에 물들어 세력 확장에만 신경 쓴다는 것이죠. 종교의 순수한 본래 정신이 많이 상실됐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방편은 다양하게 제시될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순수로 돌아가야 한다는 겁니다. 불교가 먼저 앞장서고, 좋은 방편을 모색해야겠죠.

성태용 = 종교 지도자와 정치 지도자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일치시키려 했던 게 플라톤인데요. 그가 주장한 철인정치를 독재라고 평가하기도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지도자가 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겁니다. 여기서 철인은 자신의 사리사욕을 모두 포기한 채 오로지 국가만을 위해 살아야 하기 때문이죠. 물론 현실에서 추구하기 어려운 이상일 겁니다.

지적인 측면이나 인격적인 측면에서 완전히 탁월하게 성취된 지도자를 바라는 건 무리일 겁니다. 그 중에서 우리가 가장 기본적인 요소를 현실의 정치인에게 바라야겠죠. 자기가 부족한 것을 충분히 남에게 빌려다 쓰고, 그러면서도 올바른 방향성을 위해 쓸 수 있는 능력만 가져도 좋겠다는 겁니다.

지도자는 전공·기술자처럼 다 알 수도 없고 부처님처럼 깨달은 사람도 아닙니다. 그러니 적어도 하심 하고 대중을 포용해서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 중심이 있다면 이 시대 지도자로서 적합하겠죠. 여기에 탁월한 식견과 도덕성을 겸비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습니다만 쉽진 않을 겁니다.

이와는 별개로 불교는 개개인의 완성과 전체의 완성이 분리돼서는 안 된다는 논리를 견지하고, 이를 지도자들에게 요구해야 합니다. 우리나라 공익광고 중에도 전체주의를 나타낸 것들이 있습니다. 입대하는 청년에게 ‘나를 위한 헤어스타일에서 나라를 위한 헤어스타일’이라는 문구가, 성금을 내는 아이에게 ‘나를 위한 저금에서 나라를 위한 저금’이라는 문구가 붙습니다. 이게 파시즘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이 암암리에 드러나는 걸 불교가 나서서 경계하고, 이 같은 지도자가 나오는 걸 막아야 합니다.

지안 스님 = 지도자는 남들보다 특별한 기술 같은 전문성을 요구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설사 내가 지도자로서 능력이 조금 부족하다고 해도 당사자가 순수하면 주위에 실력 있는 사람이 모여들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순수 인간본래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어떤 면에서는 지도자가 엄청난 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기대할 필요까진 없을 듯합니다.

방영준 = 부처님이 몸소 보인 리더십의 본질이 그 어떤 시대보다 지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후기산업사회 들어서 포스트모더니즘, 탈중심적사회, 탈권위적사회와 같은 것도 전부 리더십과 연계됩니다. 그래서 불교적 리더십을 현대화 할 필요가 있는데요. 연기적 사유와 중도를 어떻게 녹여낼 것인지 종단은 물론 불교학자들 모두 연구해야 합니다. 2600년 전 불교적 리더십은 구닥다리가 아니고 제일 새로운 것이기도 합니다.

Q. 마지막으로 이 시대 불교적 리더십은 왜 필요하고, 이것이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지안 스님 = 제가 승려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불교적으로 말할 수밖에 없는 입장도 있습니다만 그래도 불교가 인본주의라는 말을 드러내지 않아도 이 사회를 통합해나가는 데 가장 나은 종교인 것 같습니다. 부끄럽게도 시대에 따라서는 호국불교라는 전통을 어용적 표현으로 남용해 정권 눈치나 살피기도 했는데 그래선 안 됩니다.

부처님은 카스트제도를 부정하고 사회개혁을 도모한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가 사회정의를 잘 실현하고, 연기법·중도 등의 가르침을 통해 사회를 통합하는 데 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불교적 리더십은 ‘내가 옳고 너는 틀리다’는 생각이 만연한 이 사회를 소통의 구조로 변화시키는 에너지입니다.

방영준 = 불교 정치철학의 핵심은 중정주의(中正主義)입니다. 혼란한 이 사회를 바로잡을 수 있는 근본 가치죠. 이제는 불교가 부처님의 사상을 법당에서 사회로 어떻게 퍼트릴 것인지 고민해야 합니다.

성태용 = 서로 평등한 존재로서 구성원 하나하나를 존중하고, 개인의 완성으로 사회를 완성한다는 부처님의 기본방향은 민주적인 이념과 딱 맞아떨어집니다. 아울러 불교 종단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한 포살자자 등 대중화합을 도모하는 여러 방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불교야말로 현대사회가 지향하는 정치적 방향과 잘 어울리는 종교라는 게 전제돼야 합니다.

우리는 그런 보배들을 현대적인 리더십으로 펼쳐내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앞으로는 불교운동을 하면서 불교적 리더십이 대한민국의 훌륭한 리더를 만들어 내는 리더십이 되도록 다함께 분발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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