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정찬주 (무염ㆍ65)

정찬주 소설가가 최근 시리즈로 집필중인 소설 〈이순신의 7년〉을 펼쳐보고 있다. 이 작품에는 지금까지 소개되지 않은 수많은 승장들이 조명된다. 이 시대에 맞는 글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는 정찬주의 인생은 옛 고승들의 삶과 닮아 있었다.

 

文心과 佛心, 동시에 싹트다

중2 때 시(詩)로 백일장 장원

동국대 불교학생회로 불연 맺어

쌍봉사서 습작과 불교에 심취

불단 부처님 닦다 부처님 만나

 

근현대 선지식과의 인연

〈샘터〉 입사, 법정 스님 인연

법정 스님 산문집 10권 출간

‘무염’ 불명 받고 사제 인연

3천배 대신 원고 3천매로

성철 스님 〈산은 산 물은 물〉 출간

 

“글쓰기의 고행을 내 삶의 본질로 받아들였죠. 고행이지만 힘들지 않죠.” 고행을 힘들다 생각하지 않고 당연한 삶으로 받아들였다면 그것은 ‘수행’일 것이다. 수행자가 고요한 자리를 찾아 아득한 길을 가듯이, 그렇게 써온 글은 세상을 돕는 글이 되었으며, ‘불교문학’이라는 불문(佛文)의 한 자리를 이루었다. 〈암자로 가는 길〉, 〈산은 산 물은 물〉 등 수 십 편의 불교소설과 산문을 써온 소설가 정찬주가 그 글의 주인이다.

정찬주 소설가가 법정 스님과 함께 한 1987년 송광사 여름 모습.

 

부처님 쪽으로, 부처님 쪽으로

주름진 이마 위로 백발을 이고 백발 위에 다시 하얀 불공쌀을 이고, 할머니는 십리 길을 가뿐이 나선다. 언제부터인지도 아득해진 길. 지팡이 같은 두 발로 고개를 넘고 바람 같은 허리로 산허리를 돌면 닿는 곳, 화순 쌍봉사. 할머니는 부처님께 공양하고 간절한 두 손을 모아 기원한다. 기원은 후손의 안녕. 불가의 은혜 속에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렇게 할머니가 정성을 들인 후손 중의 한 사람은 바로 손주 정찬주. 한 가계(家系)의 서사는 그렇게 소소한 정성이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훗날 정 작가의 글과 인생이 바람이 불듯 부처님 쪽으로, 부처님 쪽으로 향한 것을 보면 그런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정 작가는 중학교 2학년 때 교내 백일장에서 시를 써서 장원을 한다. 미술에 관심이 깊었던 미술학도 정찬주는 그 일을 계기로 화단이 아닌 문단 쪽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글맛을 본 소년 정찬주는 많은 책을 찾아 읽기 시작한다. 세 들어 살던 월부 책 판매원 덕분이었다. 당시엔 그런 직업이 있었다. 집엔 책이 넘쳤다. 〈세계문학전집〉, 〈셰익스피어전집〉, 〈톨스토이 인생독본〉 등 청년기에 읽어야 할 책들이 거의 다 있었다. 정 작가는 그 책들을 모조리 읽었다.

“아마도 지금까지 그 시절에 읽은 책이 가장 많은 것 같아요.”

정찬주의 꿈은 ‘문학’으로 바뀐다. 소년 정찬주는 문학의 꿈을 키워갔고, 곧 대학 선택의 길목에 선다. 선택은 동국대학교 국문학과.

“불교재단인 ‘동국대’라는 이름에 그냥 마음이 갔어요. 그리고 양주동, 미당, 이병주 등 교과서를 통해 동경해 왔던 우리 문학의 큰 이름들을 동국대에서 볼 수 있었기 때문이죠.”

이유는 그것뿐이었다. 불가에서 세운 ‘동국대’라는 이름과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것. 당시 정 작가는 다른 학교에 이미 합격했지만 미련 없이 동국대로 마음을 정했다. 그리고 그의 진정한 불연이 시작된다. 그는 입학 후 불교학생회를 찾아간다. 그 역시 설명할 수 없는 바람이었다. 부처님 쪽으로 부는 바람이었다.

“어린 시절, 집안의 호불교적 정서가 ‘인연’의 ‘연’이라면 불교학생회 활동은 ‘인’이라고 생각해요. 직접적인 계기인 것이죠. 단순히 취미활동을 위해서 찾아간 게 아니었어요. 불교 공부를 하고 싶었고, 불교적인 분위기에 좀 더 다가가고 싶었죠.”

정 작가는 사찰순례 등 불교학생회 활동을 통해 불교라는 울타리 안으로 제대로 들어가고 싶었다. 정 작가가 중학교 시절, 집안에 넘치던 책을 통해 문학적 자양분을 얻었던 것처럼 불교학생회는 정 작가에게 불제자로서의 자양분이 되었던 것이다.

2011년 쌍봉사 인근 이불재에서 정찬주 작가를 만났다. 6년이 지난 지금도 그는 이불재에서 철따라 다녀가는 것들 속에 쉼없이 글을 쓴다.

불교문학 부흥 징검다리 되길 서원

 

불교문학에서 희망을 읽다

고승 일대기 소설화 다수

전국 암자 400여 곳 찾아

불교소설 산문집 등 50여 권 출간

“불교문학은 우리문학의 중심”

 

거리 떠나 쌍봉사서 부처를 만나다

강의실과 교정에 있어야 할 신참내기 대학생 정찬주는 담요 한 장과 수건 한 장 그리고 원고지를 등에 지고 깊은 산길을 걷는다. 그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쌍봉사. 기차역에서 삼십 리를 걸어야 했다. 할머니의 발자국이 남아있는 절 쌍봉사. 여전히 쌍봉사는 오지였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강의실 대신 거리로 나갔죠. 독재의 시절이었어요. 더 이상 부풀어 오를 수 없는 풍선처럼 모든 것들이 터질 일만 남은 그런 시절이었죠. 결강은 두세 달씩 장기화되었고, 학생들은 거리에서 살았죠. 저 역시 시대적 요청에 전적으로 공감했고 집회에도 참가해봤지만 왠지 거리로 나서는 일이 저와는 맞지 않는 옷처럼 느껴졌어요. 넘치는 생각이었는지, 부족한 생각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다른 방법이었으면 했어요. 예를 들면 ‘글’ 같은 것이죠.”

정 작가는 글을 써서 세상을 바꾸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이제 겨우 걷기 시작한 어린 아이였다. 무슨 글을 써서 세상을 움직인단 말인가. 정 작가는 학우들과 함께 거리에 서 있지 못하는 대신 원고지 위에 서있기로 했다. 그렇게 정 작가가 습작을 하기 위해 찾아 나선 곳, 거리에서 쓰러져야 했던 학우들을 생각하며 그들처럼 쓰러질 수 있었던 자리는 다름 아닌 쌍봉사였다. 이쯤 되면 바람이 부는 것에도 이유가 분명 있는 것이리라. 이유 없이 부는 바람은 없는 것이리라. 할머니가 불가의 가계에 손주의 이름을 올린 곳. 어느 날 그 손주는 힘든 시간을 견디기 위해 그 자리를 찾았던 것이다.

숨 막히고 치열한 순간이 펼쳐지는 시위의 현장과는 다르게 절은 적막, 또 적막했다. 정찬주도 적막했다. 막상 원고지 위에 서니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글이 그렇게 쉽게 써지는 것이 아니었다. 주지 스님이 출타라도 하는 날엔 공양주와 정 작가뿐이었다. 정 작가는 심란한 마음을 잡기 위해 빗자루와 걸레를 들었다. 어느 날, 정 작가가 불단에 올라 부처님을 닦고 있을 때였다. 정 작가는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 누군가의 시선이 머리 위에 다가와 있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부처님이 미소 짓고 있었다. 전율이 등골을 지나갔다.

평소에 보았던 부처님의 미소와는 달랐다.

“어떤 상황에서도 저렇게 미소 지을 수 있는 사람이 부처님이구나.”

정 작가는 그날의 전율을 초견성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 날의 생각은 정 작가의 평생을 관통한다.

“문학적인 성과보다는 불교에 깊이 빠지게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시간이었어요. 그 때 제가 세운 서원은 ‘나도 부처님처럼 미소 지을 수 있는 사람이 되자’는 것이었어요.”

정 작가는 쌍봉사에 머무는 동안 세상과 자신을 보게 됐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거리로 나가 뜨거운 외침을 던지진 못했지만 앞으로 세상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게 됐다. 그 서원의 중심엔 불법(佛法)이 있었다. 그렇게 그 시간은 작가 정찬주를 피워내기 위한 뿌리 같은 시간이었다.

 

 

정찬주 작가는 1953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났다. 1983년 월간 〈한국문학〉에서 ‘유다학사’로 신인상에 당선되어 등단했다. 월간 〈불교사상〉을 거쳐 월간 〈샘터〉에 입사, 법정 스님의 산문집(총 10권) 출간을 도왔다. 지금까지 고승 일대기를 비롯해 주로 불교 소재의 소설과 산문집 총 50여 권을 출간했다. 1996년 행원문학상, 2010년 동국문학상, 2011년 화쟁문화대상 등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암자로 가는 길 1,2,3〉, 〈산은 산 물을 물〉, 〈가야산 정진불〉 등 다수가 있다.

다시 바람은 부처님 쪽으로 불고

대학을 졸업한 정 작가는 서울의 고등학교 국어교사로 근무한다. 하지만 정 작가는 교단에 오래 있지 못한다. 정찬주 인생의 바람은 다시 부처님 쪽으로 불었다. 그 바람결에 들려온 소식이 있었다. 월간 〈불교사상〉의 창간 소식이었다. 그리고 정찬주의 마음은 그 바람에 대책 없이 흔들렸다. 그는 미련 없이 교단을 내려왔다. 남들이 볼 땐 쉽지 않은 선택이었지만 그에게는 쉬운 선택이었다. 정 작가는 〈불교사상〉에 입사한다.

“쌍봉사에서의 시간이 내 마음을 열고 나왔어요. 그리고는 일렀어요. 그 시간은 불은의 시간이었고, 앞으로 내가 가야 할 길은 그 불은을 갚는 것이라고요. 그래서 그때의 밥값이라도 갚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것이 전부였어요. 어려울 게 없었어요.”

비록 근무환경은 교사시절보다 열악했지만 정 작가에게는 불학을 깊이 공부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훗날 정 작가가 불교문학을 할 수 있는 동력의 많은 부분이 그 시절에서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불교사상〉은 오래 가지 못했다. 이런 저런 이유로 문을 닫았다. 정 작가는 동화작가이자 월간 〈샘터〉의 편집장이던 정채봉 선배의 배려로 ‘샘터사’로 자리를 옮긴다. 그리고 그곳에서 불연을 이어간다. 법정 스님과의 만남이 그것이다. 법정 스님의 연재 원고를 맡게 된다. 그리고 법정 스님의 산문집이 그의 손을 거쳐 하나 둘 세상으로 나온다. 그렇게 나온 법정 스님의 책이 10권에 이른다. 그는 그렇게 법정 스님의 산문집을 만들면서 법정 스님의 제자가 된다. 무염(無染)이라는 그의 불명은 그때 법정 스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그리고 그때부터 정 작가는 단골 집필진인 최인호 작가와 교유하면서 소설 창작에 대한 원력도 품기 시작한다. 그렇게 바람은 부처님 쪽에서 또 부처님 쪽으로 불었다.

 

1998년 소설 〈산은산, 물은물〉 출판기념회

원고 3천매는 3천배가 되고

“산은 산, 물은 물”

한 시대가 품었던 법문. 1996년, 정 작가는 중앙일보에 ‘암자로 가는 길’을 연재하고 있었다. 그는 연재 원고를 위해 그 위대한 법문의 거처였던 백련암을 찾는다. 법문의 주인인 성철 스님이 머물렀던 곳이다. 스님이 열반하신지 3년째였다. 정 작가는 성철 스님이 살아계시던, 4년 전에 백련암을 찾은 적이 있었다. 가족과 함께 한 나들이였다. 정 작가 역시 성철 스님을 뵙고 싶었지만 알다시피 성철 스님을 친견하기 위해선 3천배를 해야 했다. 가족과 함께 한 길이었기에 3천배를 하기엔 무리였다. 가족과의 시간도 중요했다. 성철 스님의 시봉이었던 원택 스님과 인사를 나눈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그리고 4년 만에 다시 찾은 백련암. 이제는 3천배를 한다 해도 성철 스님을 만날 수 없다. 정 작가는 다시 원택 스님을 만난다. 그리고 성철 스님의 일대기인 소설 〈산은 산 물은 물〉이 시작된다. 원택 스님이 정 작가에게 성철 스님의 일대기를 청탁했고, 정 작가는 이 역시 불제자로서 의미 있는 회향이라고 생각해 집필에 들어갔다.

“그 때 3천배를 못해서 스님을 뵙지 못한 인연이 늘 아쉬웠죠. 그래서 3천배 하는 마음으로 하기로 했어요. 그 때 못한 3천배를 원고지 3천매로 하기로 했어요.”

1998년, 마침내 “산은 산 물은 물”은 소설 〈산은 산 물은 물〉로 다시 세상에 온다. 정 작가는 3천배를 마쳤고 마침내 스님을 뵌 것이다. 소설 〈산은 산 물은 물〉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정 작가는 이 작품을 계기로 전업작가로서의 기반을 다지게 된다.

〈산은 산 물은 물〉의 상상을 초월한 반향은 경봉 스님의 일대기 〈야반삼경에 촛불춤을 추어라〉, 일타 스님의 일대기 〈인연〉, 만해 스님의 일대기 〈만행〉, 김교각 스님의 일대기 〈소설 김지장〉, 혜암 스님의 일대기 〈가야산 정진불〉 그리고 법정 스님의 일대기 〈소설 무소유〉로 이어졌다. 쉴 새 없이 이어진 불사다.

“고승 한 분의 일대기를 집필하는데 4~5년의 세월이 걸립니다. 고승 일대기 몇 권 내고나니 20년이 훌쩍 지나갔어요. 혹자는 왜 일반소설 쓰지 않고 불교소설만 쓰냐고 아쉬워하기도 했죠. 하지만 그것이 인연인 것을 어쩌겠어요.”

그는 한국전통문학의 부활 차원에서도 불교문학이 되살아나기를 바라고 있다. 불교문학은 우리 문학의 근간이고 중심이었다. 일제강점기 이후 들어온 서구의 문학으로 인해 전통문학이 변방으로 밀려난 우리의 문학사를 그는 안타까워했다.

“고승들의 일대기를 쓰면서 주인공인 고승들을 통해 한국인의 정체성을 뚜렷하게 볼 수 있었어요. 그 이야기들이 진정한 우리 문학이라고 생각해요. 불교문학이 되살아날 때 우리문학이 세계문학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어요. 제가 그 징검다리가 될 수 있기를 서원합니다.”

 

2008년 일타스님과의 인연담을 쓴 〈인연〉 출간기념회

쉼 없는 집필… 다시 쌍봉사

“솔바람에 귀를 씻어 부처를 이루리라.”

쌍봉사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조용한 집 한 채. 그 집을 이루며 집 주인은 위와 같이 상량문을 지었다. 그리고 그 서원을 옮기어 집의 이름으로 썼다. ‘이불재(耳佛齋)’다. 정 작가는 2001년부터 쌍봉사 곁에 산다. 결국 정 작가가 마음을 정한 자리는 ‘그곳’이었다. 처음 불가의 글씨로 자신의 이름을 적어낸 곳. 선대의 정성으로 인연의 바람을 지은 곳. 그는 그곳에서 철마다 다른 바람을 맞으며, 철따라 다녀가는 것들 속에서 쉼 없는 글쓰기를 이어간다. ‘선방 가는 길’, ‘눈부처’, ‘백제대왕’, ‘야반삼경에 촛불춤을 추어라’, ‘인연’, ‘소설 무소유’, ‘가야산 정진불’, ‘그대만의 꽃을 피워라’, ‘다산의 사랑’, ‘천강에 비친 달’, ‘암자로 가는 길’ 등 그 제목만 열거하기에도 숨이 차고 열거하지 못한 것들도 수두룩하다.

“수행자에게 쉬는 날이 있나요? 저 역시 그런 마음으로 씁니다.”

요즘 어린이를 위한 불교동화도 쓰고 있는 정 작가는 지금까지 50여 권의 책을 썼다. 쉽지 않은 원력이다. 〈암자로 가는 길〉을 위해 전국의 암자 400여 곳을 찾았고, 많은 선지식의 행적을 찾아내기 위해 인생의 많은 날을 보냈다. 정 작가가 그렇게 쉼 없는 글쓰기를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글쓰기를 수행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불재’는 그의 선방인 셈이다. 앞서 적었듯 그렇게 지은 그의 글은 세상을 돕고 있다. 그의 책을 매고 6년 째 암자를 순례하는 6개월 시한부의 노신사가 있으며, 입국 때마다 그의 책으로 타국에서의 고단함을 위로받은 파독 간호사도 있다. 그의 글에 감동받아 쌍봉사를 찾고 이불재를 찾아온 타종교의 외국인도 있으며, 그의 글을 읽고 출가한 이들도 적지 않다.

2016년 보성군 봇재에 세워진 정찬주 문학비

정 작가는 현재 〈이순신의 7년〉을 연재하고 있다. 그 이야기 중엔 삼혜, 신해, 수인, 의능 등 지금까지 소개되지 않은 〈난중일기〉의 승장들을 조명하고 있다. 그리고 차기 작품으로 〈자비〉라는 제목의 장편을 구상하고 있다. 불교의 본질과 한국불교의 미래를 정조준하고 있는 소설은 본격적인 불교소설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쌍봉사의 범종 소리로 하루를 열고 닫는 이불재. 그 주인은 오늘도 법향 깃든 글자 위에서 삼매에 든다. 깊은 밤과 고요한 새벽이 또 한 순간처럼 그의 곁을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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