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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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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있기 때문에 그 자리에 부처님이 계신 겁니다!인간으로 이 세상에 나왔으면 멋지고 당당하게 사세요

 

부처님 전에 온전히 전해질 수 있겠지요

질문 며칠 전 선원에서 초파일 장엄등 점등식을 거행하였습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불교문화회관 주위가 마치 부처님 계신 룸비니동산인 듯 환희롭고 장엄했습니다. 시간과 공간이 본래 고정되게 나뉘어 있지 않기에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이 끊어지지 않고 면면히 이어지고 있음을, 그리고 큰스님의 마음과 저희들의 마음이 언제나 함께하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는 자리였습니다. 저희 불자들이 해년마다 올리는 연등공양이 마음과 마음으로 부처님 전에 온전히 전해질 수 있겠지요?

답변 부처님께서 49년을 설해 주셨지만 한 마디도 한 사이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 뜻은 어떠한 것인가. 삼천 년 전이나 삼천 년 후나,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우리 깊은 마음속에 항상 살아 계십니다. 영원한 것입니다.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하여 그 감사함을 어찌 말로 다 하리까. 부처님 봉축일은 찰나찰나 봉축일이며, 오신 것이 없기에 가신 것도 없이 영원한 우리 마음속에 깊이 계시어 무시무종 일승공법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정신계의 50%를 모르면서 물질계의 50%만 가지고 살아나가시려니까 힘들고 얽매이고, 또 애고나 업보나 유전성, 세균성, 영계성까지도 타파를 못하면서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언제나 한마음으로 일체 만물만생 어느 것이든 아니 되시는 것이 없습니다. 가난한 자가 원할 때에는 한 찰나에 응신으로서 관세음이 돼 주시고, 명이 짧다 하고 구원을 청할 때는 항상 칠성 부처가 돼 주시고, 좋은 데로 못 간다 하고 소원을 하면 지장이 돼 주시고, 물에서는 용신이 돼 주시고, 길에서는 지신이 돼 주시고, 독성이 돼 주시고, 산신이 돼 주시고, 아프면 바로 약사가 돼 주시고…. 이렇게 천차만별로 어느 거 하나 아니 되시는 게 없고, 어느 것 하나 응신이 돼서 나투어 주시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부처님이 삼천 년 전에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게 아닙니다. 풀 한 포기만 살아 있어도 부처님은 항상 그 자리에 계신 겁니다. 물도 생명이 있고 불도 생명이 있고 흙도 생명이 있고 바람도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어찌 어느 자리에든, 어느 골골에든 부처님이 아니 계시다고 하겠습니까? 삼천 년 전이 바로 오늘이요, 삼천 년 후도 오늘이요, 오늘은 영원한 오늘입니다. 그래서 어떤 것이 될 때에 내가 됐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부처님이라고 이름하신 것입니다.

부처가 왜 없다고 하는 줄 아십니까? 여러분 마음속에 같이 너무 가깝게 계시기 때문에 부처는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이 없다고 말합니다. 남들은 ‘사랑하라, 사랑하라’ 하는데 왜 사랑이 없다고 하는가. 사랑하기 이전에 바로 내 아픔이요, 내 몸이요, 내 자리요, 바로 나이기 때문에 사랑한다, 안 한다 하는 언어가 붙을 필요가 없죠. 그렇기 때문에 그대로 여여하게 자비심이라. 여러분은 이 법당에 와서 부처님을 보고 절을 하실 때 어떠한 생각으로 절을 하시는가요? 부처님 형상과 내 형상이 둘이 아니요, 부처님 마음과 내 마음이 둘이 아니요, 부처님 생명과 내 생명이 둘이 아닙니다. 지금 내가 들고 있는 이 컵도 바로 컵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이 세상에 출현한 겁니다. 저 부처님도 (등 뒤의 부처님을 가리키시며) 이 세상에 부처님이라고 이름을 가지고 출현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그 생각으로서의 마음이 없다면 저 부처님을 모실 수도 없죠. 부처님은 너무 가깝게 계시기 때문에 법당에 들어와도 둘이 아니요, 변소에 가도 둘이 아니요, 어딜 가든 자기가 있기 때문에 그 자리에 계신 겁니다. 우리가 부처님을 그렇게 가깝게 두고 있으며, 위 속눈썹 아래 속눈썹이 한 찰나에 깜짝거리듯이 부처와 중생은 둘이 아니게 그렇게 같이 회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아셔야 될 겁니다. 부처님도 삼천 년 전의 부처님만 계시다고 생각지 마시고 삼천 년 전만 아니라 몇천 년 전, 몇만 년 전에도 부처님은 계셨고, 지금도 부처님은 계시고, 미래에도 부처님은 영원히 끝 간 데 없이 계실 겁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살아 있는 한, 생명이 살아 있는 한, 또 생명이 이렇게 푸르르게, 생동력 있게 움죽거리는 한 아마도 그 뜻은 떠나지 않을 겁니다. 말세니 말세가 아니니 운운하지만 그것을 떠나서 우린 영원히 물 흐르듯이, 발 없는 발로, 손 없는 손으로 어디 안 닿는 데가 없고 아니 딛는 데가 없이, 내 몸 아닌 게 없이 이렇게 하고 계신 겁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우리 깊은 마음속에 항상 살아 계십니다.

영원한 것입니다.

근본적인 무가 무엇입니까

질문 근본적인 무가 무엇인지요. 근본적으로 무로 돌아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답변 지금 저기 물이 흘러 돌고 있습니다. 물이 흘러 돌고 있는데 끊임없습니다. 그 물은 여기서 흐르나 저기서 흐르나 똑같이 흘러서 제자리로 항상 모입니다. 또 위로도 올라갔다 내려갔다 합니다. 돌기도 같이 끊임없이 돌고 있습니다. 그 물을 만약에 산으로 비유한다면 저 높은 산이 있고 낮은 산이 있습니다. 그런데 높은 산이 있기 때문에 낮은 산이 있으며 낮은 산이 없다면 높은 산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물 흘러 도는 이 자체가 바로 무의 세계 유의 세계와 같이, 우리가 죽어서 그냥 없어지는 게 아니라 우린 항상 살아 있는 겁니다. 저 물이 흘러서 돌듯이 항상 몸은, 예를 들어서 저 이파리가 떨어져서 낙엽이 졌지만 그 이듬해 봄이 오면…. 물론 어떤 곳은 봄도 없고 가을도 없나 봅니다만 말입니다. 하하하. 항상 나무뿌리는 살아 있듯이. 그거는 설명을 해서 아는 게 아닙니다. 항상 여러분은 그냥 저 물이 흘러 돌듯이 도는 것입니다. 산이 높고 낮고 이것이 둘이 아닌 까닭에 낮은 게 있기 때문에 높은 게 있고 높은 게 있기 때문에 낮은 게 있는 것이지 낮은 게 없는데 어떻게 높아 보이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 모두가 평등하게 돌아가는 것을, 찰나찰나 돌아가는 것을, 이 물이 끊어짐이 없이 돌아가는 것을 무라고 한다 이겁니다.

그렇다면 이거를, 마음을, 나를 증득해서, 내가 나기 이전을 발견해서 만약에 물리가 터지고 지혜가 생기고 모든 걸 통달한다면 나도 없고 너도 없고 다 없어. 이것이 무야. 왜 없다느냐. 번연히 이렇게 앉아 있는데 왜 없다느냐. 그것은 여러분의 근본 자체는 영원히 살아 있기 때문이다 이겁니다. 근본 자체가 살아 있고, 근본 자체가 살아 있기 때문에 마음을 낼 수 있고, 마음을 낼 수 있기 때문에 움죽거릴 수 있고 이렇게 돌아가는 것이 그대로, 그대로 다 무다 이겁니다. 그래서 이거를 통달하기 전에는 모릅니다, 모두. 나 나기 이전과 나와 결부돼야만이, 깨달아야만이 그 도리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거는 경설을 해서 이것이 정법 사법이고, 이것이 어떤 것이고, 이것이고 저것이고 이렇게 따진다면 여러분이 각자 나를 깨달을 수가 없어요. 지금 여러분이 계시니까 여러분 마음속에서 마음을 내고 바깥으로 움죽거리고 이러시지, 만약에 여러분이 안 계시다면 아무것도 없잖아요. 그런 관계상, 그게 고정된 게 없이 돌아가는 이 자체가, 이 진리가 공했다 이 소립니다. 이거를 알아들으려면, 이거를 알려면 깨달아야만 안다 이겁니다. 그거는 말을 해 가지고 아는 게 아니니까. (컵을 들어 보여 주시며) 이게 그 법이에요. 그리고 여러분이 목마를 때 물 한잔 시원하게 마실 수 있는 그게 법이에요. 무도 되고 법성도 되고 불성도 되고, 불성이 없으면 그렇게 받을 수가 없고 먹을 수도 없습니다. 이렇게 가르쳐 줘도 모르는 것은 깨닫지 못해서 모르는 걸 어찌하겠습니까.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나 나기 이전 과거의 나를 발견해야만이 현재의 모든 걸 똑똑히 보고, 모든 걸 똑똑히 처리하고, 똑똑히 이 내 몸속에 있는 중생들을 제도할 수 있고, 부처님과 일체제불과 한마음이 돼서 한마음 자리에 있는 것이다 이겁니다. 일체제불의 마음은 내 한마음이요, 일체제불의 법은 내 한마음의 법이고 생활이고, 그렇지 않아요? 악행을 저지르는 것도 선행을 저지르는 것도 내 한마음입니다. 부처 마음이 따로 있고 중생 마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부처 중생은 둘이 아니다. 높고 낮음도 둘이 아니요, 동서가 둘이 아니요, 여자 남자가 둘이 아니요, 일체 중생이 둘이 아니다 이겁니다. 이 둘이 아닌 도리를 알려면 나를 깨닫지 않고는 절대로 그 도리를 증득할 수가 없습니다. 나를 증득하고 나를 발견해서 둘이 아닌 도리를 알아야만이 그 도리를 환하게 통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삐뚤어진 아들 올바르게 이끌어 주려면

질문 저희 아들이 너무 문제를 많이 일으키고 그래서 이제는 학교를 그만두어야 할 상황까지 왔습니다. 어떻게 해야 삐뚤어진 아들을 올바르게 이끌어 줄 수 있을는지요. 아는 스님께서 조상에게 문제가 있어서 아들이 그렇게 되는 것이니 천도재를 올리고 정성을 많이 들이면 좋아질 수 있다고 하시던데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고민이 많습니다.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답변 여러분, 지금 저 나무가 보이시죠? 나무로 비유한다면, 저 나뭇가지와 이파리가 어떡하면 싱싱하게 잘 자라겠습니까? 그 뿌리가 싱싱하고 잘돼야 그 가지도 이파리도 잘되겠죠? 그거예요. 여러분이 자식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에 주인공에다가 맡겨 놓으면 자식이라는 주인공 뿌리에 바로 거름을 주는 거예요. 그러니 그 몸이 얼마나 건강하게 무럭무럭 잘 자라고 머리의 지혜가 늘겠습니까?

또 서로 인과의 업보를 지고 끼리끼리, 깡통끼리 만난 가족들은 자식들이 공부도 팽개치고 집을 나가서 도둑질이나 하고 여러 가지로 문제가 많죠. 그럴 때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바로 거기에 놓고 진정으로 관하면 그 업보는 녹아지고 새로이 화해서, 그 마음이 재생이 돼서 이끌어지니 아들은 출중해지더라 이겁니다.

어느 노인 한 분이 안양에 오셔서 말을 하는데, 며느리가 죽고 그 국민학교 다니는 손자가 하나 있는데 며느리를 새로 얻었다 이겁니다. 그런데 새로 얻은 며느리도 그렇게 나쁘진 않은데 손자가 자꾸 아버지 어머니의 주머니, 어머니 서랍을 뒤져서 다 가지고 나가선 쓰고, 또 선생님께 육성회비 갖다 주라고 주면 나가서 친구들하고 다 까먹고 입 쓱 닦고 들어오는 거예요. 그러고는 그것이 탄로가 날 테니까 저녁이면 몰래 아버지의 주머니를 뒤지는 거예요. 그러니 할머니의 마음에 어미도 없는 그 손자가 얼마나 불쌍하겠소.

그러니까 항상 오셔서 눈물을 질금질금 흘리는데 한 번 두 번은 모르겠더니 여러 번 그러다 보니까 어휴! 그 할머니의 마음이 내 어머니 같고 그 손자가 바로 내 자식 같더라 이거예요. 그게 남의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알았습니다, 알았습니다.” 하고선…. 그 노인이 울면 사실은 나도 귀찮다고요. 왜냐하면 마음이 좋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어떤 땐 같이 울 때도 있고 어떤 땐 같이 웃을 때도 있지만 그 울고 웃는 것이 떳떳하더라 이겁니다. 고립돼서 살아야 떳떳하지 않지, 자유스럽게 사니까 떳떳할 거 아닙니까? 그래 한 찰나 살림살이가 떳떳하다 하는 건 자유스럽게 산다는 거죠. 그러다 보니까 그 할머니가 오셔서 “아휴, 스님! 감사합니다. 우리 애가 이젠 도둑질도 안 하고 착해지고, 학교에도 잘 나가고 공부도 잘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던 게 싹 없어졌습니까?” 그러거든요.

바로 그거예요. 마음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기 때문에 몸뚱이 탓을 하지 말라 이겁니다. 말을 안 듣는다 해서 몸뚱이를 붙들어다 놓고 아무리 때려도 그건 소용이 없어요. 소를 끌고 가는데 소를 치는 게 아니라 달구지를 치는 셈이라는 소리지요. 달구지를 치는데 어떻게 소가 가겠소! 그러니까 주인공에 그 모든 것을 놓았을 때 바로 아들에게까지 통해서 그 아들의 마음이 녹아지고 업보가 녹아지는 거죠. 어머니의 업보가 녹아지면 아들의 업보도 녹아지고 아들의 업보가 녹아지면 어머니의 업보도 녹아지기 때문에 서로가 그런 꼴 보지도 않고 그렇게 당하지도 않을 거예요. 그러니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가 천도, 천도 하지만 산 사람 천도와 죽은 사람 천도가 둘이 아니에요. 누가 죽어서 천도를 해 달라고 그럴 때 손가락 하나만 끄떡해도 되고 몸이 움직이지 않아도 생각 하나만 잘하면 천도가 저절로 될 거를, 그렇게 좋고 웃음이 날 거를…. 아주 그냥 한 찰나에 요리가 착 되는 거예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바깥에다 놓고 빌고 온통 야단을 하죠. 그것도 멋진 짓이라고 하는데 말이에요, 내가 볼 때는 모두 귀신 짓들이라 이겁니다. 스님들도 그렇고 여러분도 그래요. 먹기 위해서 살겠소? 살기 위해서 먹지요. 좀 태도를 바꿨으면 좋겠는데 말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그렇게 당당하게 사십시오. 만날 고립돼서 살지 말고 노예로 살지 말고 항상 당당하게, 인간으로 이 세상에 나왔으면 멋지고 당당하게 사세요.

 

그것을 몰라서 일체 고의 길을 걷나니라

질문 대행 스님의 『뜻으로 푼 반야심경』에 보면 “모든 중생들은 본래부터 공생(共生)·공심(共心)·공용(共用)·공체(共體)·공식(共食) 하며 고정됨이 없이 나투고 화하여 돌아가건만 그것을 몰라서 일체 고(苦)의 길을 걷나니라.”라고 풀이하신 부분이 있습니다. 제가 혼자 조용히 뜻을 음미하면서 독송을 자주 하는데, 그 뜻을 알 것 같으면서도 정확하게 가슴에 와 닿지가 않습니다.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답변 『반야심경』에 “공이 색이요, 색이 공이니라. 모든 게 공하였느니라.” 이랬죠. 그런 걸 내가 “고정됨이 없이 나투기 때문에, 찰나찰나 나투기 때문에”라고 붙여 놨습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지금 살고 있어요. 모두가 공했다는 그 자체가, 우리 몸속에 많은 생명의 의식들이 있는데 목이 마르다고 속에서 “나 물 좀 주시오.” 하고 말은 안 해도 내 목이 마르단 얘깁니다. 그거는 속의 중생들이 물을 달라는 겁니다. 이 말은, 자세히 들으셔야 돼요. 물을 달라고 하니까 내가 목이 마른 겁니다. 내가 그냥 목이 마른 게 아니고 수분이 떨어지니까 수분을 넣어 달라고 하는 신호입니다. 그러니까 물을 한 컵 마신단 말입니다. “아이, 시원하다.” 이러죠? 그러면 그 속에서 시원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더불어 같이, 하나도, 요런 티끌 하나도 빼놓지 않고 조그만 생명들도 다 같이 먹었단 얘깁니다. 더불어 같이 먹었으니까 공식했죠? 그리고 공생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공심이란 말입니다. 또 공체죠? 여러분 혼자 살 수는 없어요. 그 헤아릴 수 없는 생명들이 작용을 해 주니까 여러분의 몸이 움죽거리게 돼 있죠. 혼자 움죽거리는 게 아니라 그 수만의, 헤아릴 수 없는 수만의 생명들이 움죽거리게 되니까 큰 몸 하나가 움죽거리는 겁니다. 그러니 공체면서 바로 공용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더불어, 내가 물을 마셨는데 내가 물 마셨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내가 “나는 물을 마셨어.”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이 아버지 노릇만 합니까? 오빠 노릇도 하고 형님 노릇도 하고 아들 노릇도 하고 사위 노릇도 하고 남편 노릇도 하고, 별 노릇 다 하고 다니시죠. 그런데 어떤 거 할 때, 어떤 걸 했을 때, 어떤 걸 먹었을 때, 어떤 걸 봤을 때, 어떤 걸 들었을 때,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내가 만났다고 하겠습니까. 내가 먹었다고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모두가 공심이에요. 공식하고 있고요. 그러니까 공해서 바뀌면서 하는 걸 화해서 바뀐다, 화해서 찰나에 나툰다고 합니다. 이거 봤다가 저거 보고 저거 봤다 이거 보고, 이 사람 만났다 저 사람 만나고, 이 일 했다 저 일 하고 이러는 것이 나툰다는 거예요. 한 찰나 찰나 나툰다. 그러니까 내가 그냥 있는 게 아니라 화해서 자꾸 나투면서 다른 활동을 하고 다른 생활을 하고, 달리달리 자꾸자꾸 보고 듣고 행하고 이렇게 하곤 쉴 새 없이 나간단 얘깁니다.

그러니 어떤 거 할 때 내가 했다고 할 수 없으니 모두가 공했느니라 이겁니다. “없는 것도 아니요, 있는 것도 아니요.” 이렇게 말이 나가죠. 그러니 없는 것도 아니요, 있는 것도 아닌 그 가운데에 바로, 내가 똥 누러 갈 때에 똥을 눠야 하나 안 눠야 하나 이런 생각이 없이 그냥그냥 싸 버리는 거, 그걸 말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양단간 가운데에 있는 것입니다. 또 그걸 표현한다면, 전깃불을 켜려 해도 쌍방이 한데 어우러져야, 줄과 줄이 어우러져야만이 불이 들어올 수 있는데, 그렇게 어우러지게 해 놓고 또 가운데 스위치를 눌러야 들어온단 얘깁니다. 자유스럽게 끄고 켜고 할 수가 있단 얘깁니다.

옛날에 선지식들의 말씀이 “너는 무슨 공부를 하고 한 철을 나고 왔느냐?” 하니까 “나는 졸리면 잠자고 똥 마려우면 똥을 눴고 배고프면 밥을 먹었습니다.” 이러거든요. 그러니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면 “야, 이놈아! 누가 밥 먹을 줄 모르고 똥 눌 줄 모르고 잠잘 줄 몰라서 그러느냐!” 하고 내쫓았겠죠. 그런데 어느 스님도 그렇게 말을 해 가지고 내쫓겼답니다. 부목으로 내쫓겼는데도 흥이 나서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그냥 나무를 해서 펑펑 패다가 그거를 한 아름씩 안고 이 아궁지 저 아궁지로 다니면서 불을 지피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벌이 어쩌다가 방에 들어서 창살이 문인 줄 알고 쪼다가 그냥 몸뚱이가 떨어지고 말았다는 그런 노래를 만날 하면서 주지 방 앞으로 다니거든요. 그래서 불러다가 물어보니까 “경전을 그렇게 읽으셔도 몸 떨어지면 입 떨어지고 또 입 떨어지면 말도 떨어지고, 그러니 무엇을 하시는 게 있겠습니까.” 하더랍니다.

그런 거와 같이 여러분도 아무리 먹기 위해서 산다고 하지만 먹기 위해서 살지는 마세요. 살기 위해서 그냥 먹는 거지 먹기 위해서 산다는 말은 하지 않도록 하셨으면 해요. 그러면서 부처님 법이, 부처님 한생각이 그렇다는 것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한생각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몸뚱이로 그냥 한 발짝 두 발짝 떼어서 천 리를 가려면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네? 몸뚱이로 한 발짝 한 발짝 걸어서 지구를 한 바퀴 돌려면 얼마가 걸리는 줄 아십니까? 아마 수 광년이 걸린다고 할 겁니다. 하지만 한생각이라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한생각이라는 게.

나는요, 여러분이 이 도리만 알면 아무 걱정 없이 살 것 같은데 왜들 그렇게 찌들려서 붙잡고 늘어지는지 모르겠어요. 여기 앉아서도, 여러분 가정에 앉아서도 자기 한생각으로써 회사에 모든 폐단이 생기지 않게 할 수도 있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일을 하는 게 아닙니다. 눈에 안 보이는 생명들 전체가 일을 하는 일꾼입니다. 기계도 생명이 있고 이름이 있고, 바로 마음이 있단 말입니다. 어떠한 물건 하나하나도 그냥 있는 게 없이 움죽거리고 있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사람들 마음이 저거는 움죽거릴 수 없다 하니까 그냥 움죽거리지 못하는 걸로, 그냥 우리가 쓰기에 달렸다 이렇게만 생각하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하대를 받고 어떻게 100% 잘되게끔 같이해 줍니까? 돌 하나도 그냥 있는 게 없이 생명이 있는, 살아 있는 겁니다. 그냥 마음과 마음을 통해서 얘기들을 하고 모두 회의들도 하고 토론도 하고, 모두 그렇게 하고들 지내요. 그런데 여러분 육안으로 보질 못해서 그렇죠.

그래 여북하면 여러분에게 ‘자신(自神)’이라고 그랬겠습니까? 몸과 신(神)이 둘이 아니다라는 얘깁니다. 모든 게 신 아닌 게 없어요. 그러니 신과 신이 둘 아니게 똘똘 뭉쳐서 너도 주인 나도 주인이니 모든 것을 주인이 한마음으로써 이끌어 가는 거니까, 이끌고 가는 선장이 모든 것을 하는 거니까 ‘선장이 전부 하는 거니까’ 하고 다 맡겨 놓고, 이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초기에 이렇게 하라고 하는 것은 바로 자기를 형성시킨 참자기와 현재에 형성된 자기가 상봉을 하게 하느라고 그러는 겁니다. 상봉을 하지 않는다면 진짜 무(無)의 공부를 못하니까요. 그 천차만별의 뜻을 가진, 중용을 하는 이 뜻을 어찌 다 알겠습니까. 상봉해야만이 스승을 좇아서, 즉 말하자면 참나를 좇아서 무의 공부를 하면서, 또 현재 나를 통해 보고 듣는 대로 감지하는 바로 무의 참나는 같이, 같이같이 찰나찰나 보고 듣고 이러면서 들이면서 내면서 공부를 해 나간다 이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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