⑨ 도작 선사

 성도문(聖道門)은 지혜가 극에 달해야 열반을 증득할 수 있지만, 정토문(淨土門)은 오히려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극락에 왕생할 수 있다. 성도문은 자력(自力)에 의지하는 것이어서 수행하기 어렵고 만 명이 닦아 한 명도 성취하기 어렵지만, 정토문은 부처님의 자비력(慈悲力)에 의지하는 것이어서 수행하기 쉽고 백 명이 닦아 백 명 모두 왕생한다. -<안락집>

 

일찍이 용수 보살은 〈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 ‘이행품(易行品)’에서 성불로 가는 구도의 길을 수행의 어렵고 쉬움에 따라 난행도(難行道)와 이행도(易行道)로 나누었다. 칭명염불의 선구자인 담란 대사 역시, 난행도와 이행도의 구분을 따르면서 참선, 간경, 주력의 문을 자기 힘으로 가는 것이라 해서 자력문(自力門)이라 하고, 염불의 문을 아미타부처님 본원(本願)의 힘으로 가는 것이라 해서 타력문(他力門)이라 했다.

말법시대 상응법은 ‘정토문’ 강조

48세에 정토문 귀의, 승속 교화

염불 7만번, 〈관무량수경〉 200회 강의

입적시 꽃비 이적, 정토종 퍼진 계기

이러한 전통을 이은 도작(道綽: 562~645) 선사는 자기의 힘으로 깨달음을 여는 것을 성도문(聖道門)이라 하고, 아미타불의 본원에 의해 정토에 왕생해서 그 공덕으로 보살도의 수행을 닦아 부처가 되는 것을 정토문(淨土門)이라 하였다. 또 당시의 오탁악세는 정토문 밖에 선택할 수 없는 낙약한 사람들의 시대라고 보았다. 다시 말하면, 성도문이란 자력문ㆍ난행도와 같은 맥락으로 이 세상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번뇌를 끊고 성불하는 교법이다. 이에 비해 아미타불의 본원력(구제력)에 의지해 극락정토에 왕생해서 성불하고, 다시 이 세계에 돌아와서 중생구제의 성업(聖業)에 종사하는 문이 정토문, 즉 염불문이다. 범부가 믿음의 방편으로 행하기 쉬운 타력문ㆍ이행도와 같은 맥락이다.

도작 선사는 〈안락집〉 ‘성정이문(聖淨二門)’ 편에서, 말법시대에는 시대와 근기에 상응하는 정토문이 유일한 법이라고 역설하였다. 그는 “성도문은 지금 시대에는 증득하기 어렵다. 첫 번째는 부처님께서 가신 지 오래되었고, 둘째 성도문은 이치가 깊어 중생이 해오(解悟)하기가 미약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역시 〈염불감응록〉에서는 “자기의 공덕을 정토에 회향하면 이것이 자력(自力)이요, 아미타불의 공덕을 중생에게 회향하여 베풀면 이것이 타력(他力)이다. 자력도 오히려 정토에 왕생할 수 있거늘 하물며 타력이겠는가”라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깨달음의 종교인 불교는 자력수행이 강조되어 왔다. 그러다 보니 타력수행으로 치부되는 염불은 하근기나 하는 차원 낮은 수행으로 간주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 성도문에서는 깨달은 도인들이 점점 줄어들고 윤회를 벗어난 아라한과 조사들은 더욱 찾기 어려워졌으나, 정토문에서는 깨닫지도 못한 범부들이 업을 지닌 채 윤회를 벗어나는 대업왕생(帶業往生)의 사례가 무수하게 나타났다. 스스로의 힘으로 성불하겠다는 자력문의 뜻은 존중받아 마땅하지만, 오탁악세의 현실은 타력문에 성불의 가능성이 훨씬 높게 다가온 것이다.

그것은 왜 그럴까? 소위 불력(佛力)수행이라고도 하는 염불은 구도자의 자력(自力)에 아미타불의 가피력(加被力)이 더해진 것이기에 그러한 것이다. 염불이 타력문이라고는 하지만, 정토법문을 오롯이 믿고(信) 왕생극락을 발원하며(願), 일심으로 염불하는 행(行)은 이미 자력수행의 요소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여기에 훗날 아미타부처님이 된 법장 스님의 크나큰 본원력과 공덕이 더해지니 성불의 가능성은 훨씬 높아지는 것이다.

이러한 정토문의 장점에 대해 우익대사는 〈아미타경요해〉에서 이렇게 설하고 있다. “선(禪)은 오직 자력에만 의존하나, 정토수행은 부처님의 가피력까지 겸했다. 그러므로 두 가지 방편문을 서로 비교한다면, 정토수행이 지금 사람들의 근기에 가장 부합한다. 마치 바다를 건너려는 사람이 반드시 안전하고 빠른 배에 의존해야만 신속히 저 언덕에 도달하는 것과 같다.”

담란 대사의 정토사상을 계승한 도작(道綽: 562~645) 선사는 담란 대사 입적 후 21년째 되는 서기 562년 북제(北齊)의 하청 원년에 병주의 문수(汶水)에서 태어났다. 14세에 출가하여 15세에 북주 황제 무제의 폐불(廢佛)로 타의에 의해 일시 환속하기도 한 도작 선사는 〈열반경〉을 공부하고 24번이나 강의했으며, 뒤에는 창주의 혜찬(慧瓚: 532~603) 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반야경〉을 배웠다.

훗날, 우연히 담란 대사가 살았던 산시성 분주 현중사(玄中寺)에 참배하러 갔다가 담란의 덕을 기리는 비문을 보고 깊이 감명을 받아 수나라 대업 5년(609) 48세에 비로소 정토문에 귀의하였다.

도적 선사는 그때부터 서쪽을 향하고 앉아 아미타불의 명호를 하루에 7만 번씩 외우고, 〈관무량수경〉을 무려 200회나 강의했다. 늘 온화한 미소로 사람을 맞이하고, 육시(六時)에 독실히 예참하고 부처님을 공경하니, 승속을 막론하고 진실한 염불행을 실천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진양(晋陽)ㆍ태원(太原)ㆍ문수(汶水) 세 고을의 승속을 교화하고, 7세 이상이면 누구나 아미타불 염불을 하게 될 정도로 염불문을 크게 선양하였다. 칭명염불을 할 때마다 콩 한 알씩 놓게 했는데, 정진을 잘한 사람은 콩의 양이 80~90석 중간 정도 사람은 30~50석은 되었다고 한다. 자신은 구체적인 참회와 〈반주삼매경〉에 의한 반주삼매(般舟三昧: 부처님이 눈앞에 현전하는 삼매)를 닦고, 〈관무량수경〉에 따른 9품관을 닦았지만, 대중에게는 칭명염불을 하기 쉽도록 염주를 이용한 방편을 고안하기도 했다.

도작선사가 출가, 법을 펼친 분주 현중사.

선사께서는 수행자들에게 항상 당부하시길, “서쪽을 향해서는 침을 뱉지 말며 또한 코도 풀지 말며 서쪽을 향해서 대소변(大小便)을 보지 말며 또 앉고 누움에 서쪽을 등지지 말라”고 하였다. 이렇게 염불 위주의 생활불교, 실천불교로 중생을 교화하는데 진력을 다하자 현중사 인근의 고을, 집집마다 염불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그 도력이 북방까지 알려져 백성들부터 당태종 이세민까지 감화시키는 정토사상을 크게 선양했다. 이처럼 정토종의 창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그는 서하에 오래 머물렀기 때문에 서하 선사(西河禪師)로 불리었다.

정관(貞觀) 3년 68세가 되던 해 4월 8일, 도작 선사는 명(命)을 마칠 것을 예감하고 인연있는 도속(道俗) 제자들에게 기별하니, 그 즉시 사람들이 산중에 가득 모여들었다. 그때 허공 중에 마음의 스승인 담란 법사(曇鸞法師)께서 칠보(七寶)로 된 배 위에 나타나 도작 선사에게 말하길, “너의 정토의 집이 이미 다 완성된 것이나, 너의 남은 보(報)가 다하지 아니하였다”고 했다.

이때 화현의 부처님이 허공 중에 머물러 계시면서 찬란한 하늘꽃을 널리 흩어 내렸다. 당시 모였던 모든 대중이 이를 보고 크게 환희심을 내어 정토종이 더욱 널리 퍼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이적이 일어난 2년 후, 선사의 연세가 70세가 됨에 치아가 전부 새로 나고, 체력이 강건해지고 안색이 맑고 선미(善美)함이 마치 젊은 사람과 같아졌다. 법문을 함에 그 음성이 온화하고 자비스러워 듣는 자로 하여금 환희심과 신심이 절로 나게 했다.

이렇게 정토법문을 한번 더 선양하며 14년의 세월이 더 흐른 정관 19년(645) 4월 24일, 선사는 승속의 모든 제자들에게 “나는 3일 후면 왕생극락을 하게 되니 그대들은 열심히 염불 할지어다”고 작별을 고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세 고을의 모든 신도들은 스님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를 드리고자 수도 없이 찾아왔다. 선사는 고을 사람들에게는 범부가 윤회를 벗어나 성불하는 ‘가장 높고 깊고 묘한 선(無上深妙禪)’인 정토법문을 가르쳐 준 부모보다 고마운 은인이었기에 끝까지 자리를 지켰던 것이다.

드디어 4월 27일, 현중사에서 선사의 임종 시 백옥 같은 흰 구름이 서쪽 하늘에서 떠 오더니 눈 부시게 빛나는 세 갈래의 흰 광선으로 변하여 스님이 계시는 방으로 들어가 찬란하게 비추고 지나가니 열반에 드셨다. 그리고 다비 하는 때에 오색 광선이 세 가닥이 나타나더니 해를 둘러싸며 세 번 돌고 나서는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추어 섰다. 또한 자색(紫色) 구름이 다시 빈소 위에 세 번이나 나타났다가는 사라졌다. 그 누구보다 장한 상서(祥瑞)를 보이며 삼계를 벗어나 극락정토로 왕생한 것이다.

훗날 정토종(淨土宗=蓮宗)의 조사로 공식 추존되지는 않았지만, 용수보살-혜원대사-담란대사에 이어 실질적인 정토종의 제4조(祖)로 존경받는 도작 선사는 중국 및 일본 정토종의 교과서로 인정받고 있는 〈안락집〉 2권을 후세에 남겼다. 이 명저는 담란대사의 〈왕생론주〉에 큰 영향을 받아 왕생안락의 방법을 설하고 있다. 대승의 공관(空觀)에 입각해서 그 논지를 전개한 담란 대사의 입장을 계승하고 있기는 하지만, 담란 대사가 〈무량수경〉을 주로 한 것에 반해, 도작 선사는 〈관무량수경〉을 중시하여 염불을 말법시대에 꼭 맞는 수행방법이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말법 중생이 왕생하는 길은 〈관무량수경〉 하품하생(下品下生)의 교설에 있다고 믿었다. 당시는 북주 무제(北周武帝: 재위 560~578)의 폐불정책으로 말법(末法)사상이 보편화하고, 〈대집경〉의 5오백년설(五五百年說)에 의해 말법 악세(惡世)의 범부에게 실행가능한 염불법문을 확립하고, 염불문이야말로 대승불교의 본의(本義)에 합당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안락집〉에서 제기된 정토사상은 선사의 제자인 선도(善導) 대사가 계승하여 종풍을 더욱 크게 이루는 데 기여하였다. 아울러 일본에까지 전해져 법연(法然) 스님과 친란(親鸞) 스님이 정토종을 여는 데 큰 영향을 미쳐, 이 책의 주석서가 수십 종이나 발간되는 등 염불법문의 전승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된다.

이른바 ‘종교 무용론’까지 회자되는 오늘의 오탁악세에서, 이 생사윤회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구 노력과 더불어 아미타불의 본원력이란 ‘자비의 항공모함(慈航)’을 타야만 가능함을 깨닫고, 그 배의 티켓이라 할 수 있는 ‘나무아미타불’ 염불행으로 자타불이의 불력수행을 해보시길 간절히 권유드린다.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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