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종 대각회 이사장 혜총 스님

조계사 일요법회… ‘아미타부처님의 願’

법장 비구는 세자재왕불(世自在王佛)에게 48대원을 세우고 오랜 수행 끝에 성불했다. 48가지 원은 모두 중생들이 자신의 불국토에서 고통 없이 기쁨을 누리게 하리라는 다짐이다. 취업·로또대박·결혼·사업확장…. 절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불자들의 소구소원이다. 우리는 나를 위한 원을 세우고 살아왔다. 이것이 과연 바른 원일까? 조계종 대각회 이사장 혜총 스님은 4월 2일 조계사 일요법회서 “모든 것이 다 원이지만 근본적으로 이타행서 비롯될 때 참되다”고 강조했다. 정리=윤호섭 기자

혜총 스님은… 1953년 통도사에서 보경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1956년 자운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1963년 범어사에서 동산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해인사ㆍ범어사승가대학과 동국대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1974년 동국대 불교대학원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조계종 포교원장, 사회복지법인 불국토 대표이사, 대한불교어린이지도자연합회 총재 등을 역임했다.

아미타부처님 세운 48대원
하나 같이 중생 위한 이타행
“나의 원은 누굴 위한 것인가
한 번쯤 돌아보고 반성해야”

여러분, 우리는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살고 있습니다. 사바라는 것은 우리말로 ‘인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즉 사바세계는 잠시도 참고 견디지 아니하면 살아갈 수 없는 세계입니다. 부부관계든 부자관계든 이웃관계든 다 좋지만 좋은 가운데는 반드시 좋지 않은 것이 따라오기 마련입니다. 햇빛이 있으면 그늘이 있는 법이죠. 마찬가지로 사바세계는 고통의 세계입니다. 그리고 그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석가모니 부처님이 오셨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어디서 오셨습니까? 도솔천 내원궁서 호명보살로서 천인을 교화하시던 부처님은 사바세계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인도 카필라국의 마야부인의 몸을 빌려 내려오셨습니다. 바로 사월초파일이었죠. 그래서 우리가 올리는 연등공양은 부처님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연등은 뭡니까? 밝은 것은 희망이고 어두운 것은 괴로움입니다. 밝게 불을 밝힌다는 것은 우리의 어두운 것을 다 없애고, 오로지 향기롭고 즐겁고 행복한 세계로 가는 길을 등불로 나타낸 것입니다. 이 때문에 등을 밝히는 겁니다. 그리고 사바세계는 56억7천만년까지 지속됩니다. 그 다음엔 미륵부처님이 오시죠. 아직도 많은 시간이 남았습니다.

여러분은 〈부처님의 생애〉를 다 읽어보셨나요? 개인적으로 불자라면 3번 정도는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모시는 성인이 어떤 분이지 알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확실히 믿고 내가 부처님을 의지해 살 만한가 그렇지 않은가 스스로 깨달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하면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처님의 생애를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부처님 말씀을 탐독해야 합니다. 그 분은 어떻게 사셨는가, 내가 왜 모시는가 등을 이해해야 합니다. 불교는 그냥 믿는 게 아닙니다. 확실히 중심이 섰을 때 믿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맹신에 불과합니다. 또한 믿으면서 수행해야 합니다. 그것을 석가모니 부처님이 45년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바세계의 주인공은 석가모니 부처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와 달리 동쪽 방향으로 가면 동방 정유리세계(東方 淨瑠璃世界)가 있는데 그곳에서는 약사여래 부처님이 중생의 질병을 고쳐줍니다. 약사여래 부처님은 중생의 고통을 소멸시키겠다는 12대원을 세웠습니다.

서론이 길었습니다만 오늘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아미타부처님’의 원(願)입니다. 이 부처님은 부처가 되기 전 법장 비구였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수행자였지만 법장 비구는 48가지 원을 세웁니다. 뭔가를 해결하려면 테마가 있어야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원을 세우고 사십니까? 오래오래 병 없이 살고 싶다, 돈이 많이 들어오게 하고 싶다, 자손 대대로 대가 끊어지지 않고 훌륭하게 살 수 있게 해야겠다 등등 모두 하나의 원이 됩니다. 그런데 원은 단순히 세운다고 해서 이뤄지는 게 아닙니다. 원을 이루도록 하는 건 바로 수행입니다. 거기에는 염불 참선 참회 주력 사경 육바라밀 등 모든 것이 과정으로 들어갑니다. 수행을 거치지 않으면 원은 이뤄지지 않습니다.

인간답게 사는 건 ‘베풂’
잠깐 다른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저는 11살에 출가했는데 16살 때 키가 정말 작았습니다. 당시 ‘친구들은 저렇게 큰데 왜 나만 작은 걸까’ 하는 열등의식을 갖고 있었죠. 어떻게 하면 키가 클까 늘 고민하고 키가 큰다는 건 뭐든 다 해봤습니다. 그런데 변하는 건 없었죠. 희망이 절망이 되니 마지막엔 죽고 싶다는 생각까지 차올랐습니다. 절에 들어온 뜻도 모르고 말이죠. 사실 그때 제가 서른 살까지도 못 산다는 얘기에 출가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절망에 빠져 살다가 다리 없는 사람을 만나게 됐습니다. 저 사람은 다리가 없어 계단을 오르내릴 수도 없고, 뜀박질하는 건 상상조차 못할 것이고, 대소변 보는 건 또 얼마나 힘들까. 비록 나는 숏다리지만 그래도 다리가 있지 않나. 짧아도 서울역 계단 잘 오르내리고, 지하철도 타는데 저 사람에 비하면 나는 정말 은혜를 입고 태어났구나. 그 이후 환희심이 확 났습니다.

이 얘기를 한 이유는 나의 원이 무엇인가 곰곰이 돌아보라는 뜻을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앞서 모든 것이 다 원이라고 말씀드렸죠. 그런데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베풂을 받는 게 아니라 주는 것입니다. 받고자 하는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살면서 부모에게든 자식에게든 이웃사람에게든 많이 받고 살아오지 않았나요? 고작 100년 살까 말까 하는데 아등바등 했습니다.

‘내가 모든 존재들에게 무엇을 도와줄 것인가.’ 관공서에 가도 쉽게 만날 수 있는 내용 아닙니까? 이게 바로 부처님의 뜻입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자식은 부모에게, 또 이웃에게 무엇을 도와줄 것인가. 그게 바로 행복이고, 바른 원입니다.

다시 아미타부처님의 48가지 원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법장 비구의 이 원들은 전부 자비심 가득한 이타행입니다. 이 세상에 괴로운 것이 많아 내가 건설하는 세계는 누구든지 행복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대원입니다.

부처님이 된다는 것은 자기 몸 하나 호의호식하려는 게 아닙니다. 모든 존재와 더불어 행복하게 살게 하겠다는 목적입니다. 여러분이 꼭 부처님이 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가족 위해, 이웃 위해 헌신하는 것이 부처님의 행이고 목적지입니다.

삼라만상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존재 이유는 베풀기 위해서입니다. 더구나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 즉 나는 모든 존재를 이해 뭘 베풀어야 할까요? 돈 벌게 해달라, 건강하게 해달라는 욕심도 있겠지만 근본 고민은 이타행에서 나와야 합니다.

서쪽방향으로 10만억 불국토를 지나면 아미타 부처님이 세운 극락세계가 있습니다. 아미타 부처님을 열 번만 부르면 극락세계에 간다고 하죠. 타력신앙입니다. 그런데 ‘7일 동안 부르고 불러도 극락세계 못 간다면 나는 부처가 되지 않겠다’는 정도의 원은 세워야 합니다. 타력이지만 내가 지극한 마음으로 불러야 하는 겁니다.

저는 지금도 자고 일어날 때 광명진언을 욉니다. 제 발원이 여러 신도들에게 돌아가서 가정엔 만사형통을, 돌아가신 분에겐 극락세계 왕생하시길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그리고 여러분의 원은 어디에 쏠려 있는지요.

‘福 없음’ 두려워야 福 짓는다
여러분에게 들려드리기 위해 짤막한 글을 적어왔습니다. 이 글을 끝으로 법문을 마치겠습니다.

종교를 믿든 믿지 않든 사람들은 누구나 복 받기를 원합니다. 사람들이 누리고자 하는 복은 크게 5가지입니다. 먼저 재물이 풍족해서 잘 사는 것이 있고, 그 다음은 남녀가 사랑하는 것이 있고, 또 맛있는 음식을 즐기는 것이 있고, 이름을 사방에 드날리는 명예가 있고, 자고 싶을 때 잠자는 것과 편히 쉬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복이 모든 사람에게 다 오지 않으니 이게 문제입니다. 그래서 복을 달라고 신에게 매달리고 부처님께 기도드립니다. 하지만 복은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복을 받을 준비가 된 사람이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복을 달라고 하지 말고 지으라고 가르치십니다. 농부가 밭을 가는 것처럼 복을 짓고 자기가 거두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어느 날 제자들에게 복 짓기를 권하시면서 “그대들은 복이 없음을 두려워해야 한다. 왜냐하면 복이 없음은 괴로움의 근본으로 근심과 괴로움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으며, 즐거움이 없기 때문이니라”고 말씀하시고는 당신도 보리수나무 아래서 깨달음을 얻었을 때 “악마들이 수천만억의 군사를 거느리고 방해했지만 복덕의 힘으로 악마를 항복시키셨다”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복이 있으면 즐겁고 복이 없으면 괴롭습니다. 그러나 금생과 오는 내생이 모두 즐겁고 행복하자면 복을 지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복을 지으려는 생각은 하지 않고 복을 받으려고만 합니다. 복을 짓지 않고 복을 받으려는 마음은 공짜를 탐하는 욕심입니다. 헛된 욕심이 마치 집을 지을 때 1층은 짓지 않고 2층, 3층을 지으려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습니다.

복을 지으려면 먼저 복이 없음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만 합니다. ‘복이 없으니 이렇게 괴롭구나. 복을 지어야지’ 하는 마음이 먼저 앞서야만 합니다. 복이 없으면 이 세상을 살면서도 온갖 재앙을 당하게 됩니다. 구하는 것을 구하지 못하는 재앙, 배고픔과 빈곤의 재앙, 자식이 없는 재앙,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재앙, 만나기 싫은 원수를 만나는 재앙,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해야 하는 재앙, 오래 살고 싶은데 일찍 요절하는 재앙 등등 많고도 많습니다.

내가 복이 없음에 대한 두려운 마음이 생겨야 복을 지을 수 있습니다. 복이 없으면 온갖 재앙이 곧 닥친다는 생각이 내 마음에 확실히 서 있으면 복을 짓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학생이 공부를 게을리 하는 것도 공부하는 복을 짓지 않음으로 다가올 불행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개천에서 용이 나는 것은 일찍이 재앙을 뼈저리게 느낀 결과입니다. 부처님께서도 수없이 복을 많이 지었기 때문에 마군을 항복받고 위없는 도를 이루셨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복은 어떻게 지어야 할까요? 남보다 못하다고 불평하고 낙담하기에 앞서 지금의 자기에 대해 만족할 줄 알고, 지금의 처지를 딛고 일어서야만 합니다. 나도 복을 지으면 반드시 햇볕이 드는 따뜻한 날이 온다는 생각으로 매일매일 감사하면서 힘닿는 대로 착한 일을 닦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조급한 생각을 버리고 낙수가 처마 밑의 바윗돌을 뚫는다는 생각으로 그렇게 세월을 보내다보면 반드시 좋은 복이 내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