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강서성(江西省) 구강현(九江縣) 남쪽에 있는 여산(廬山) 서북쪽 기슭에 동림사(東林寺)라는 절이 있었다. 동진(東晋) 때 혜원(慧遠:335~417) 선사의 도반이었던 혜영(慧永) 스님이 먼저 여산의 서림사(西林寺)에 머물다가 혜원 선사를 이곳으로 오게 한 후 당시의 자사 환이(桓伊)에게 부탁해 산의 동쪽에 혜원 선사를 위해 다시 지은 절이 동림사이다.
혜원 스님은 일찍이 육경(六經)을 배우고 노장학에 정통했던 대학자였다. 출가하여 도안(道安)을 찾아가 수행정진하기도 했고 여산으로 옮겨와 30여년을 지내면서 염불수행을 하면서도 교학발전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
제자 법정(法淨)과 법령(法領)을 서역에 보내 범본을 구해와 계빈국 출신 승가바제에게 〈아비담심론(阿毘曇心論)〉과 〈삼법도론(三法度論)〉을 번역하게 했으며, 또 담마류지에게 청하여 〈십송율(十誦律)〉을 번역하게 하였다.
특히 구마라습과 담론을 통해 문답을 나눈 것을 묶어 책으로 엮은 〈대승의장(大乘義章)〉은 그의 사상과 신념을 나타낸 최초의 저술로 두 사람의 논쟁을 통해 초기 중국의 불교의 이해 사정을 알아 볼 수 있다. 혜원 스님은 또 〈사문불배왕자론(沙門不拜王者論)〉을 지어 ‘사문은 세속을 떠났기 때문에 오로지 삼보(三寶)를 받들 뿐 왕이나 제후에게 예경을 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내세우기도 했다.
혜원 스님이 살던 동림사는 여산 향로봉 아래에 위치해 경관이 수려했으며, 근처에 폭포가 있는 계곡이 있었다. 혜원은 이 절에 선림을 세우고 서역지방에 있는 불영굴(佛影窟)을 모방해 불영당(佛影堂)을 조성하였다. 그 뒤 이곳에서 염불삼매를 닦는 모임을 만들어 염불 수행에 힘썼다. 이를 후대에 와서 백련사(白蓮社) 혹은 백련결사(白蓮結社)라고 불렀다. 이는 사영운(謝靈運)이 이곳에 와 연못을 파고 흰 연꽃을 심었기 때문에 불러진 말이라고 한다. 이 후부터 동림사는 정토종(淨土宗)의 발원지로 여겨져 왔다. 당나라 때 이 절은 매우 번창하다가 무종 때 회창법란(會昌法難)을 만난 뒤 황폐화 되었다가 선종(宣宗) 때 다시 복원 되었다.
송나라 신종 때는 이 절을 동림태평흥국선원(東林太平興國禪院)이라 불렀고 그 뒤 원나라 때 보도(普度)가 이곳에서 〈여산연종보감(廬山蓮宗寶鑑)〉을 저술하였다 그리고 일본에 정토종의 교의를 전한 감진(鑑眞)이 일본에 건너가기 전 이 절에 머물면서 연종(蓮宗) 교의를 연구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혜원 스님이 이 절에 있을 때 귀거래사의 시인 도연명(陶淵明)과 도사 육수정(陸修靜)이 스님을 찾아와 담론을 나누었는데 이때 혜원이 평소 절 앞의 호계(虎溪)라는 시내의 다리를 넘지 않기로 원칙을 정해 놓고도 배웅할 때 담소를 나누며 걷다 미쳐 다리를 건너는 줄도 모르고 이 다리를 건너다 호랑이 울음소리를 듣고 나서 다리를 건너버렸다는 것을 깨닫고, 세 사람이 크게 웃었다는 고사가 있어 이를 두고 호계삼소(虎溪三笑)라는 말이 생겼다.
〈여산기(廬山記)〉에 “샘물이 절 아래를 돌다 호계로 흘러 들어간다. 옛날에 혜원 스님이 손님을 전송하면서 이곳을 지나는데 때마침 호랑이가 울었기 때문에 호계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 뒤로 혜원 스님이 손님을 전송할 때 호계를 넘어가지 않았다. 당시 도연명은 율리(栗里) 남쪽에 살았고 육수정 또한 도를 추구하는 도사였다. 혜원 스님이 어느 날 이 두 사람을 전송할 때 이야기를 나누다 마음이 서로 맞아 지나는 줄도 모르고 호계를 지났는데, 이로 인하여 서로를 바라보고 크게 웃었다”고 전한다
이는 유불선 삼교의 대가가 함께 도담(道談)을 나누며 웃었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고 나중에 격조 높은 선화로까지 승격되었다.
시선(詩仙) 이백(李白)은 ‘호계삼소’의 설화를 두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東林送客處
동림사 절 앞에서 손님 배웅하는데
月出白猿啼
달이 밝게 떠 있고 원숭이가 우는구나.
別廬山遠
웃으며 헤어지는 여산의 혜원 스님
何須過虎溪
아뿔싸, 그만 호계의 다리를 건너고 말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