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무름이 없는 묘행

復次 須菩提 菩薩 於法應無所住 行於布施 所謂不住色布施 不主聲香味觸法布

(부차 수보리 보살 어법응무소주 행어보시 소위부주색보시 부주성향미촉법보)

施 須菩提 菩薩 應如是布施 不住於相 何以故 若菩薩 不住相布施 其福德 不

(시 수보리 보살 응여시보시 부주어상 하이고 약보살 부주상보시 기복덕 불)

可思量 須菩提 於意云何 東方虛空 可思量不. 不也世尊. 須菩提 南西北方 四

(가사량 수보리 어의운하 동방허공 가사량부. 불야세존. 수보리 남서북방 사)

維 上下 虛空 可思量不. 不也世尊. 須菩提 菩薩 無住相布施福德 亦復如是

(유 상하 허공 가사량부. 불야세존. 수보리 보살 무주상보시복덕 역부역시)

不可思量 須菩提 菩薩 但應如所敎住

(불가사량 수보리 보살 단응여소교주)

“또 수보리야, 보살은 어떤 마땅히 법에도 머물지 말고 보시를 행할 것이니, 이른바 모양에 머물지 말고 보시할 것이며, 소리, 냄새, 맛, 감촉, 모든 법에 머물지 말고 보시해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이 마땅히 이와 같이 보시하여 상(相)에 머물지 말 것이니, 왜 그러냐 하면 만일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그 복덕은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느니라.”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동쪽 허공을 생각으로 다 헤아려 알 수 있겠느냐.” “할 수 없나이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남서북방과 네 간방과 아래, 위 허공을 생각으로 헤아려 알 수 있겠느냐.” “할 수 없나이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는 복덕도 또한 이와 같아서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이 많으니라. 수보리야, 보살은 다만 마땅히 가르친 바와 같이 머물지니라.”

우리들의 보시는 남을 위해 도와주고 베푸는 보시에 머물러 한정되고 있으나,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보시는 보다 적극적인 것으로, 보시(布施)의 ‘보’는 보편하고 두루함으로 두 가지 상대법이 서로 융통하므로 분별에 머물지 않는 무주(無主)이며, ‘시’는 산(散)으로 흩어버리는 것으로 분별의 상대법을 한 가지도 빠짐없이 모두 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양, 소리, 냄새, 맛, 촉감, 생각에 머물지 말고 모두 보시하고 버려야합니다.

우리들은 대체로 이와 같이 생각합니다, 대상으로 인해서 근심과 걱정이 생기고, 대상으로 인해서 좋아하고 싫어하며, 대상이 나를 화나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산장사와 짚신장사를 하는 두 아들을 둔 어머니가 비가 올 때는 짚신장사를 하는 아들을 근심하고, 비가 오지 않을 때는 우산장사를 하는 아들을 걱정하는데, 어머니의 근심과 걱정은 어머니가 스스로 만든 것이지 대상이 가져다 준 것이 아닙니다.

좋아하고 싫어하며, 화를 내는 것도 내가 스스로 만든 것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눈이 대상을 볼 때 눈이 최초로 본 대상을 기억하고 있다가, 다음에 본 대상들을 처음 본 대상과 조합하여 뇌가 스스로 대상의 모습을 결정하는 것으로, 이것은 대상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고 뇌가 조합해 놓은 모습, 내가 보고 싶은 모습, 즉 나의 생각, 마음을 보는 것입니다. 눈이 본 대상들을 기억하고 조합하는 습관적인 모든 행위가 업(業)으로서, 우리들의 앞에 나타난 일체의 모양, 소리, 냄새, 맛, 촉감, 법은 우리들의 업장(業藏)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빛깔과 모양을 볼 때 크고 작고, 아름답고 추하다 등의 보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체 분별망념을 보시하여 버려야 하며, 소리를 들을 때에도 듣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분별망념을 보시하고 버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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