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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현아! 네가 남긴 사랑, 내가 마저 전할게”義人이수현 어머니 신윤찬 씨
아들의 추모비를 보면 가슴이 아프지만 그 근처에서 맛있게 식사하며 밝게 웃는 분들을 보면 행복하다는 신윤찬 씨. 그녀의 가슴은 아들을 잃은 날 퍼렇게 멍이 들었지만, 그 멍울을 딛고 지금은 가슴속에 자비의 꽃이 활짝 피었다.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그녀의 모습에서 의로움을 우리에게 알리고 간 故이수현 씨의 모습이 겹쳐진다.

아픔 딛고 선택한 희망 ‘봉사’

부산 어린이대공원서 급식 16년
매주 130여 어르신에게 식사 제공
아들 밥상 차리듯, ‘정성’ 다해
뜻 모은 도반 모여 ‘보현회’ 구성

사랑·관용 전한 아들 수현이

수현 씨 사후 일본 소송 제기 권유
가족들 “아들 뜻 맞지 않아” 거절
아들에게서 ‘사랑·관용’ 배운다
“수현이가 한일 가교 될 것 생각”

2001년 1월 26일 오후 7시 15분, 전동차가 진입하고 있던 신주쿠 신오쿠보역 선로에 일본인 세이코 씨가 떨어졌다. 많은 사람들이 발만 구르고 있던 그 때, 한 청년이 선로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이들이 탈출하기엔 촉박한 시간으로 안타까운 죽음이 발생한다. 선로에 뛰어든 청년은 바로 한국인 유학생 故이수현 씨(1974~2001). 이 씨의 숭고한 희생은 한일 양국의 많은 이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많은 이들이 의사(義死)한 故이수현 씨를 칭송했지만 그의 어머니 신윤찬 씨(69)의 마음은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마음 그대로였다. 슬픔을 이길 수 없어 매일같이 아들의 추모비가 있는 부산 어린이대공원을 찾은 신 씨의 눈에 들어온 것은 대공원 앞 무료급식소. 아들을 향한 그 마음을 조금 더 의미있게 하기로 하고 시작한 무료급식봉사가 올해로 16년째다. 4월 10일 무료급식소에서 신 씨를 만나 그 사연을 들어보았다.

무료급식소에서 직접 국을 끓이고 있는 신윤찬 씨

봉사로 아픔 극복, ‘희망’이 약
무료급식 현장에서 만난 신윤찬 씨는 아들에 대해 말을 꺼내자 큰 눈에는 금세 눈물이 고였다. 하지만 신 씨는 “아들이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히면 못살 것 같다. 사람들이 아들을 기억하는 동안 아들이 마치 곁에 살아있는 것처럼 느낀다”며 눈물을 참고 담담히 말을 이어갔다.

“수현이의 뜻을 이어가고 실천하면 수현이가 저희 곁에 영원히 남아 있는 것과 같다고 생각해요. 처음 사고 소식을 들었을 때는 마치 세상이 뒤집힌 것 같았어요. 슬퍼하며 하루하루를 보냈죠. 사고 후 며칠 뒤 일본에서 함께 공부를 했던 수현이 친구가 찾아왔어요. 그 아이가 한마디를 하더군요, ‘어머님이 슬퍼하시는 것은 수현이가 바라는 일이 아닐겁니다’라고요. 그 말을 듣고 마음을 다시 다잡았습니다.”

당시 신 씨는 아들의 기념비가 있는 부산 어린이대공원으로 매일 갔다. 그 곳에 가면 아들이 의로운 일을 했다는 생각에 아들을 잃은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기념비에서 아들을 보고 내려오는 길, 신 씨의 눈에는 어린이대공원 입구에 어르신들의 긴 행렬이 들어왔다.

“왜 이렇게 줄을 서 계세요?”라고 묻는 신 씨에게 어르신들은 “배가 고파서”라고 했다. 이들의 모습은 배고픔에 지쳐 피곤해보였고, 외로움과 가난에 시달린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한끼 식사를 해결하기 위해 몇 시간씩 줄을 서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어르신들을 보는 순간 신 씨는 결심했다. 이수현 씨가 세상을 떠난 후 한달 후인 2001년 3월부터 이렇게 신 씨는 무료급식 봉사에 나서게 됐다.

신씨는 일주일에 한 차례씩 봉사단체인 ‘아름다운사람들’과 함께 무료급식에 나섰다. 신 씨는 어르신들에게 한끼 식사를 대접하기 위해 밤새 음식재료를 준비했다. 학창시절 아들에게 차려준 그 밥상을 떠올리며, 마치 아들에게 차려주는 밥상인양 정성을 다했다.

10여 년 전에는 국수나 라면이 무료급식의 주 메뉴였지만 신 씨는 어르신들 건강을 위해 소화가 편한 계란찜, 나물, 명태전, 고등어 요리 등 영양에도 신경을 많이 썼고, 매일 국과 밥, 반찬을 만들어 대접했다.

16년 동안 음식을 준비하는 동안 메뉴도 다양하게 바뀌었다. 그러나 기준은 여전히 건강을 위한 영양식이다. 신 씨가 밥을 고집하는 이유는 대부분 아침을 거르고 오는 분들이 많아서 기왕이면 밥이 더 속을 편하게 해줄 것이란 판단에서다. 그리고 지금은 정부에서 쌀을 지원해 더 풍요롭게 준비할 수 있어 기본 재료에 더욱 신경을 쓴다고 설명했다. 대부분의 재료비는 신 씨가 담당하고 있다. 신 씨는 매주 한차례 130명이 넘는 어르신들의 식사를 대접했다.

이런 활동이 입소문을 타면서 주변에서 서로 일손을 보태겠다는 도반들이 하나 둘 씩 모이기 시작했다. 평소 함께 불교공부를 했던 이들부터 봉사현장에서 만난 이들까지 신 씨의 뜻에 공감한 이들이 모이며 급식소는 커져갔다.

도반이 함께 하는 어울림 세상
“무료급식소가 지금처럼 좋은 환경이 아니었어요. 가스불이 하나밖에 없어 국을 끓이는 것도 어려웠지요. 설거지 할 공간도 부족해서 비가 오거나 해도 밖에서 그릇을 씻어야 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셔서 조금은 나아졌습니다.”

여기에 봉사활동을 지원하는 이들도 늘어났다. 급식소를 찾는 어르신들도 점점 늘어나 300여 명이 평균적으로 찾고 있다. 신 씨는 이들이 봉사활동을 주도할 수 있도록 자신의 참여 횟수를 일주일에 한 번에서 한 달에 한 번으로 바꿨다.

“봉사하는 분들이라 그런지 말을 참 예쁘게 하십니다.‘지금껏 봉사를 많이 하셨으니 저희에게도 기회를 좀 주세요’하셔요. 그래서 지금은 한 달에 한 번씩 봉사를 이어 가고 있습니다.”

이날 방문한 어린이대공원 무료급식소 현장에는 10여 명의 봉사자들의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큰 주걱으로 음식을 휘휘 젓자 하얀 김 사이로 활짝 웃는 신 씨의 얼굴이 보였다. 급식을 어느정도 마치자 신 씨는 냄비에 남은 밥을 눌러 담았다. 누룽지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봉사하는 날에는 어김없이 누룽지로 식사를 마친다는 회원들은 “회장님의 누룽지 탕을 먹어야 봉사가 마무리된 것 같다”며 “우리는 누룽지 중독! 봉사 중독!”이라며 크게 웃었다.

대부분의 회원들이 봉사활동을 2~3개는 기본으로 하고 있다고 했다. 봉사 중독이라는 말에 그동안 나눔으로 다져진 따뜻한 마음이 전해진다.

한 봉사자가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잖아”라고 말하자 그 회원과 눈을 마주하며 신 씨는 망설임 없이 “당연하지!”라며 큰 미소로 답했다. ‘혼자가 아닌 세상’이라는 말은 봉사의 의미를 강조한 듯 했다. 하지만 신씨는 “이분들이 자신을 움직이게 했다”고 했다. 함께 해준 도반들이 있었기에 살아 갈 수 있었다는 말로 들렸다.

급식소에는 ‘부산 최초 노인무료급식소 운동 발상지’라고 적혀있었다. 봉사팀 이름으로 빼곡히 적혀 있는 달력에는 ‘보현회’라는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신 씨가 이끄는 봉사팀 이름이다. 어떻게 ‘보현회’라는 이름으로 지었느냐 묻자 신 씨는 아들 이수현 씨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부산 정수사 신행봉사단체 이름 중 하나라고 했다.

보현보살의 이름을 설명하며 “행덕(行德)이다. 자비와 나눔을 실천하는 것”이라며 실천을 힘주어 말하는 신 씨의 얼굴에는 어머니의 자애로움이 가득했다.

2016년 1월 26일 도쿄에서 열린 15회 이수현 추모식

“사랑과 관용 앞에 韓·日은 한가족”

국적 떠난 인재불사 앞장

故이수현 기린 LSH장학회 설립
“수현인 생전 책임·꿈 강조해”
18개국 790명에게 장학금 전해
세계에 희망 전하는 역할 자처

한일 관계 개선, 가교 역할도
故이수현 씨의 희생 후 신 씨에게 주변인들은 안전시설을 제대로 설치하지 않은 일본 당국에 소송을 하라고 권하기도 했다. 하지만 신 씨와 가족들은 그것은 아들의 뜻과 맞지 않다고 거절했다. 대신 신 씨는 일본정부에 안전시설을 지하철에 설치해 줄 것을 권유했다. 그 후 도쿄 신오쿠보 전철역에는 철로에 떨어진 사람들이 대피할 수 있는 시설과 비상정지 장치가 마련됐다. 이후 일본 10대 여학생이 도쿄 신오쿠보역에서 선로에 떨어졌으나 대피시설 덕분에 목숨을 구하기도 했으며 같은 역에서 전철을 기다리던 19세 여학생이 정신을 잃고 선로로 떨어졌으나 주변 시민이 비상정지 버튼을 눌러 화를 면하기도 했다.

이러한 역할에 대해 신 씨는 ‘자비’와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인류애이며 이 시대를 살아가는 원동력이라고 강조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신 씨의 아버지, 故이수현 씨의 외할아버지는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였다. 강제징용으로 탄광에서 노역으로 고된 삶을 보냈다. 신 씨의 아버지는 해방 직전 죽음의 직전에서 살아 돌아왔다.

“한 겨울이었어요. 해방 전 일본사람들이 호수 얼음을 깨고 강제동원 된 이들을 강제로 집어 넣었어요. 어떻게 탈출을 하셨는지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오셨죠. 옷에 얼음이 맺혀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어요. 어릴 때 그 기억을 잊지 못합니다. 그 여파로 아버지는 평생 건강이 좋지 않으셨어요,”

신 씨는 이런 아픔조차 넘어선 사랑을 아들에게서 배웠다고 했다.

“수현이가 아니었으면 몰랐을 거예요. 원망과 미움보다, 사랑과 관용의 힘이 더욱 크다는 것을요. 부처님 인연으로 만난 모든 이들이 바로 내 아들이자 부모입니다. 우리나라는 일본에 의해 아픔을 겪었지만 사랑과 관용 앞에서는 모두가 가족과 같습니다. 이 마음이 보이지 않는 다리가 되어 한일 양국의 가교가 되어 줄 것이라 생각합니다.”

부산 어린이대공원에 자리한 故이수현 씨의 추모비를 두고 어머니 신윤찬 씨가 눈시울을 적시고 있다. 그녀는 생전 이수현 씨가 책임감 있는 강한 아들이었다고 말했다.

후회 없는 삶… 바른 마음에서

신 씨는 故이수현 씨에게는 엄한 어머니였다고 했다. 아이들을 키우던 과거에는 이불장에 회초리가 항상 걸려 있었다.

“기준을 확고히 잡아 단호하게 교육하는 부모들의 훈육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할 정도로 신 씨의 교육관은 확고했다. 아이들에게 옳고 그름을 가르치며 바른 인성으로 세상을 살아가도록 해야 하는 것이 부모들의 첫번째 역할이라는 것이 신 씨의 지론이었다.

“어릴 때는 골목대장처럼 활동량도 많았고 청소년기에는 호기심도 많아 컴퓨터를 사줬더니 장난감처럼 분해하고 고치고 하더군요. 태권도 빼고는 학원을 다닌 적은 없었어요. 자신이 공부하고 싶은 분야를 독학하다시피 했죠. 아들은 다른 곳에 시간 뺏기는게 싫었던거 같아요.”

신 씨는 故이수현 씨가 중학교 때 자신이 직접 사온 액자를 잠자리에 누우면 항상 볼 수 있도록 천장에 붙이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배움에 철저하고 의무에 충실하며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가 뚜렷하며 현실에 강하면서 자신을 책임지는 꿈을 가진 아이로 자라나게 하소서. 고난에 도전하고 정의에 용감하며 승리에 겸손 하고 패자엔 관용하고 자신을 다스려서 헛되지 않은 삶을 고백하는 자녀로 성숙하게 하소서’ 액자에 담겨 있는 글은 ‘이런 자녀가 되게 하소서’라는 기도문이었다. 故이수현 씨는 그 글을 너무 좋아 했다고 한다.

못다한 사랑, 다른 아이들에게
신 씨는 이런 아들에게 못다한 사랑을 다른 아이들에게 전하는데도 나서고 있었다. 이수현 씨의 못다한 배움의 꿈을 일본에서 공부하는 많은 유학생들이 이어 받아 희망과 용기를 얻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신 씨와 그 가족들은 故이수현 씨 앞으로 답도한 성금을 장학금으로 기탁했다.

2002년 1월 LSH아시아장학회(Lee Soo-Hyun 아시아 장학회)가 발족되고 그해 10월 17일 제1회 장학금 수여식을 열어 아시아 각국의 학생(한국, 중국, 대만, 베트남 등) 93명에게 한 학기 장학금(약 150만원)을 각각 전달했다. 이후 지속적으로 장학금은 전달됐다. 이후 2016년 10월 19일 일본 동경에서 제15회 장학금 수여식까지 18개국 학생 790명에게 장학금이 지급됐다.

“수현이가 못다한 공부를 다른 학생들은 이어 가도록 돕고 있어요. 올해는 힘들지 않을까 염려를 했는데 여전히 50명이 넘는 일본 유학생에게 도움을 줄 수 있어 기뻤습니다.”

신 씨와 가족들은 이뿐만 아니라 고려대학교와 내성고등학교에 ‘이수현 장학금’을 전달하고 있다. 신 씨는 故 이수현 씨에 대한 기억을 하나하나 설명하며 희망을 전하는 가교 역할을 꾸준히 담당하고 쉬지 않을 것이라 의지를 전했다.

“이 세상은 여행과 같아요. 내 것이라 할 것이 없죠. 항상 여여한 마음이고 평안해요. 단 후회 없는 삶을 위해 지금 이 모든 인연들을 만날 때 마다 소중하게 생각하려 해요. 그 것이 바로 우리 아들과 함께 사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한국과 일본 감동시킨 청년, 이수현

일본에 유학 중이던 이수현 씨는 2001년 1월 26일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도쿄 신오쿠보역에서 철로에 떨어진 일본시민을 구하려다 사망했다. 안타까운 사고 발생 직후 일본 전역에서는 애도의 물결이 이어졌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이를 기리는 움직임이 이어졌다.

부산교육청은 부산 어린이대공원 내 ‘의사자 이수현 추모비’를 세웠고 모교였던 고려대와 부산 내성고교, 낙민초교에서도 그를 기억하기 위한 추모비와 동상을 세워졌다.

일본 미야기현 시로이시시(白石市)에는 한일우호기념비와 함께 이수현 씨의 희생정신을 기리는 내용이 담기기도 했으며 도쿄 신오쿠보역과 그가 공부하던 도쿄 아까몽까이 어학교에도 ‘이수현 현창비’가 세워졌다. 최근에는 이수현 씨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가 일본에서 제작돼 상영되기도 했다.

하성미 기자  jayanti@hyunb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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