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빛이 바둑판만큼 아파트 앞 동의 벽면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창문을 열면 놀라 사라질 것 같아 조용히 바라보았다. 작은 빛 더미가 소리나 움직임도 없이 직사각형 모습으로 점점 면적을 키워 나갔다.

붉은 색 아침빛과
한낮의 하얀 빛의
本有는 다르지 않다


회색 콘크리트 벽에 생기가 넘치자 빛은 옆 건물로 거침없이 나아갔다. 시선을 떼지 않았지만 빛은 마냥 팽창해서 그만 형태를 찾을 수 없었다. 나는 두 눈을 뜨고서도 빛이 해체된 경계를 알지 못했다. 이제 빛은 사방으로 흩어져서 그냥 빛난다. 그렇다면 ‘빛의 알’은 언제 부화해서 세상을 환하게 밝히고 있을까?

문득 덕산의 점심(點心)의 일화가 떠올랐다. 덕산이 배가 고파서 떡을 파는 할머니에게 점심을 달라고 하자 그녀가 물었다. “〈금강경〉에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고 하는 부처님 말씀이 있는데 스님은 지금 어느 마음에 점심(點心)을 하시려고 하십니까?” 덕산은 어느 마음에 점(點)을 찍어야 할지 쩔쩔 매었다.

‘빛의 알’의 지나간 과거는 알 수 없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깨어날 수 없고, 그렇다면 현재뿐인데 이마저도 순간 사라지고 만다. 그렇다면 ‘빛의 알’은 언제 깨어났을까? 빛은 나의 의문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더욱 하얗게 빛난다.

빛은 색깔도 변화시킨다. 붉은 아침빛이 어느새 흰빛으로 바뀌었다. 이때 흰색은 모든 색깔을 탈색한 무채(無彩)색이다. 칸딘스키가 말했던가?

“흰색은 물질적인 성질이나 실체로서 모든 색들이 사라진 세계의 상징이라고. 흰색은 무한의 세계. 이런 까닭에 흰색은 커다란 침묵으로서 우리의 마음에 작용한다. 흰색은 가능성으로 가득 찬 침묵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은 시작하기 전부터 무(無)요, 태어나기 전부터 무(無)인 것이다.”

러시아인인 칸딘스키에게 몽골계의 동양인의 피가 흐른 탓에 그는 흰색에서 무(無), 즉 공(空)을 깨달은 것일까.

여명에는 붉은빛으로 붉은 세상을 바라보지만 하얀 빛이 빛나는 정오에는 눈이 부셔서 오히려 사물을 볼 수 없다. 하얀 무(無)의 세계는 칸딘스키가 말한 것처럼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는 만법의 바탕이지만 마음의 눈을 뜨지 않으면 실상을 볼 수 없기 때문이리라. 눈에 보이는 존재란 연기법에 따라 순간순간 깨어났다가 소멸하는 ‘연장적 연속체’인 것을.

그렇다면 붉은 색(色) 아침빛과 한낮의 흰빛의 본유(本有)는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문득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의 경구가 마음에 내려앉는다.

하얀빛이 방 안을 가득 비춘다. 내가 빛 속에 있다. 나와 빛을 분별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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