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道紀行’- 아잔타 석굴

인도 석굴사원의 대표작인 아잔타 석굴의 전경. 기원전 1세기 무렵부터 조성된 아잔타 석굴은 굽타왕조 등을 거치면서 29개의 석굴이 만들어진다.

평원, 밀림으로 가득하다. 태초의 대지처럼 인적도 없다. 평지에서 푹 꺼진 땅, 거기 절벽을 이루고 있고, 그 아래 강물이 흐르고 있다. 마치 말발굽 같은 U자형의 강은 바위 병풍으로 단애(斷崖)를 이루고 있다. 아, 거기에 석굴들이 오순도순 모여 있다.

1819년 4월 영국 존 스미스 군인은 사냥 나왔다가 진짜 엄청난 사냥을 했다. 아잔타(Ajanta) 석굴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호랑이 잡으려다 호랑이와 비교할 수 없는 인도 문화의 금자탑 하나를 포획한 성과를 얻었다. ‘아잔타’라는 이름은 ‘사람들이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라는 뜻. 그만큼 잃어버렸던 지역으로 남아 화려했던 역사 자체를 잊고 있었다.

B.C 1세기 무렵 제작 시작해
질곡 거치며 29개 석굴 조성
곳곳 산재한 벽화, 석굴 백미
석굴 양식, 한반도까지 전파돼
토함산 석굴암, 東轉의 결정체

와고라 강의 휘어진 깊숙한 곳 절벽을 파고 들어간 석굴사원. 오늘의 우리들은 석굴을 번호로 구별한다. 그러니까 초입부터 번호를 부여하여, 1번부터 28번까지 나란히 있고, 뒤쪽에 29번 석굴이 따로 있다.

아잔타 석굴이 있는 지역은 데칸고원 서쪽에 해당한다. 이 지역에 유명한 석굴사원이 있는 바, 7세기 오랑가바드, 8세기 엘로라 석굴 등이 있다. 그러고 보니 인도는 석굴사원의 나라 같다. 현재 남아 있는 석굴사원만 해도 약 1,300여 군데로 집계되고 있다.

인도 기후를 염두에 둘 때,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듯한 곳, 바로 석굴의 장점을 헤아리게 한다. 거기다 석굴사원이 많다는 점은 수행자들의 숫자도 많았고, 또 실용성과 더불어 상징성도 컸다는 뜻일 것이다. 더불어 강조할 것은 인도의 바위는 주로 현무암이라는 사실이다. 한마디로 석굴 파기에 쉬웠다는 의미이다. 한반도의 화강암은 매우 단단해 석굴을 팔 상상조차 할 수 없게 했다. 우리의 화강암은 아잔타 석굴 같은 존재를 아예 열외 시켰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한반도는 천연 석굴 대신 토함산 석굴암 같은 인공 석굴로 대신했던 것이다.

석굴사원은 두 가지로 나뉜다. 차이티야와 비하라. 차이티야는 법당으로 번역할 수 있고, 수행처를 의미한다. 그래서 이 안에는 불탑이라든가 불상을 봉안한다. 반면 비하라는 수행자가 생활할 수 있는 일종의 승방 즉 요사채라 할 수 있다. 중국은 예배와 수행 중심 석굴이라 한다면, 인도는 수행과 생활 두 가지 용도로 활용했음을 알게 한다. 물론 아잔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제26굴처럼 대표적인 차이티야 석굴이 있고, 1굴, 2굴, 16굴, 17굴은 비하라의 경우로서 모두 같은 시기(5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니까 석굴은 불교사원이면서, 수행처이고 또 생활의 처소이기도 했다. 그만큼 인도에서의 석굴은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아잔타 석굴은 기원전 1세기 무렵부터 건설되기 시작했다. 이어 기원후 2세기 무렵까지 석굴사원은 초기의 전성시대를 누렸다. 그리고 한동안 중단되었다가 굽타왕조의 460년경에 이르러 다시 아잔타의 영화를 이어가게 되었다. 이 때 20여 년 동안 20여 개의 석굴을 새로 만들었다. 당시 석굴로 차이티야의 제19굴과 26굴이 있다.

초기 석굴은 목조건축 그대로 흉내 낸 것처럼 일반 건축물을 보는 것 같다. 밖에서 보면 파사드는 정말 그렇다. 보통의 건축물 앞에서 서있는 것 같다. 하지만 안에 들어가면 갖가지의 입체적 조형물과 벽화로 치장해 놓았다. 마치 아름다움의 미술관처럼. 무불상시대를 경과했기 때문에 불상도 조성되어 있다. 어떤 석굴은 규모만 가지고도 감탄사를 연발하게 한다. 물론 그 기본은 아름다움으로 깔려 있어 순례자의 발걸음을 끊어지지 않게 한다.

제26굴은 차이티야 석굴로 내부에 6m규모의 불탑이 있다. 탑에는 사람 크기 정도의 불상이 새겨져 있다. 여기의 탑은 복발형태의 탑신 위에 상륜부를 두었다. 상륜부 꼭대기는 기다란 나무, 바로 우주의 축이자 세계의 중심 기둥을 세웠다. 중심의 기둥은 뒤에 탑의 찰주(刹柱)로 기능 변화를 가져왔다.

탑은 붓다의 무덤, 밥그릇 모양의 무덤 위에 기다란 막대기라, 이는 〈리그베다〉에 나오는 무덤 위의 기둥이 아닌가. 우리에게 불탑 위의 찰주로 이해하게 하지만. 그렇다면 석굴사원은 불탑을 실내 공간인 내부에 안치하고 있는 셈이다.

옥외 가람의 경우, 사원의 중심에 탑을 건립하는 것과 뉘앙스가 다르다. 26굴의 경우, 내부에 여러 개의 기둥이 세워져 있다. 그런대 특이한 점은, 기둥의 아래 부분은 각을 이루었지만 위로 올라가면서 부드러운 원형 구조로 바뀌었다. 어쩌면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 즉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라는 표현일까. 게다가 기둥 상부에 새긴 다양한 부조 작품들, 그 섬세한 디자인 감각에 놀라움을 이끌어낸다.

제26굴에서 감동을 자아내는 부분은 석굴 좌측의 열반상이다. 어쩌면 이렇듯 아름다울 수 있을까. 열반상을 보고 ‘아름답다’라는 표현이 과연 타당할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여기의 열반상은 아름다움과 깨달음을 동시에 선사해 주는 것 같다. 머리는 북쪽에 두고 오른쪽 팔로 얼굴을 괴고 비스듬히 누워 있는 모습. 고대 인도의 풍습에 의하면, 성인은 오른쪽으로 누워 이승을 떠난다 했다.

그래서 붓다는 오른쪽 팔을 괴고 비스듬히 누워 열반에 든 것이다. 어쩐 일인지 이런 자세는 고대 로마시대에서도 많이 보였다. 아무튼 나는 26굴의 열반상 앞에서 오랫동안 묶여 있었다. 평화롭기 그지없는 표정과 자세. 과연 니르바나의 참뜻은 무엇일까. 열반상의 침상 아래에는 붓다의 마지막 제자 수바드라가 슬픈 표정으로 있다. 120살이라는 노령의 나이로 붓다의 가르침에 동참한 늙은 제자의 자세. 거기에서 붓다의 열반 의미를 새롭게 확인한다.

아잔타 석굴의 백미는 벽화다. 사진은 가장 유명한 제1굴의 벽화.

아잔타 석굴의 백미는 벽화이다. 벽화의 아름다움, 마치 벽화미술관 안에 서 있는 느낌이다. 인물화 표현의 압권이다. 게다가 이렇듯 역사가 오랜 벽화를 간직하고 있다니, 물론 석굴이라는 건축적 특성에 따른 보존 효과도 있겠지만, 인도의 고대 벽화는 보배 중의 보배이다. 1천년 이상의 연륜, 이는 경이로움 그 자체이다.

아잔타 벽화는 격조 높은 인물표현, 그것도 사실적 묘사와 박진감 넘치는 인체 표현, 일품이지 않을 수 없다. 어떤 그림은 관능까지 느끼게 할 만큼 여체의 볼륨을 강조하고 있다. 정말 인도 회화의 절정과 같다. 색채 구사의 원숙함과 더불어 짜임새 있는 구성, 그리고 사실적 묘사력은 압권이라 할 수 있다. 6세기 건설의 제1석굴은 인도석굴의 대표성을 가질 만큼 우수하다. 벽화 속의 보살상은 약간 몸을 틀고 서 있으면서 화려한 장식품으로 치장하고 있다. 특히 머리에 쓴 보관은 세공기법을 동원한 화려함의 극치이다.

유명한 벽화, 제1굴의 안쪽 불당 입구의 왼쪽 보살은 오른 손에 하얀 연꽃 한 송이를 들고 있는 연화수(蓮華手)보살(460~480년경 제작)이다. 삼각형 모양의 보관을 쓰고 있고 목걸이를 하고 있다. 원형 얼굴에 이목구비가 또렷하다. 입체적 표현기법을 써, 눈썹은 S자 형태로 곡선을 이루며 양쪽으로 연결시켰다. 관음보살이겠지만 ‘미스 월드’의 그랑프리 같다. 불경스런 표현을 용서해 준다면 정말 미인상의 전형처럼 아름답다.

벽면마다 가득 그린 이야기들, 바로 다양한 자타카의 조형적 표현이다. 나의 눈길을 오래 끈 것은 자타카 등 스토리텔링의 현장이다. 제16굴 감상에 이어 제17굴 비하라의 자타카는 과일, 코끼리, 원숭이 이야기 등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17굴 벽화는 베산타라 본생, 우다인의 출가 이야기가 묘사되어 있다. 바로 불전도와 전생담의 향연이다.

근래의 불화에서는 보기 어려운 전생담 이야기, 하지만 이들 이야기는 현대사회에서도 활용할 가치가 넘치고 있다고 믿는다. 그야말로 스토리텔링 시대가 아닌가. 역사는 꾸준히 재해석되는 그 무엇이다. 그래서 역사는 죽은 사체라기보다 살아 움직이는 생물체와 같다. 붓다의 일생이나 말씀 역시 마찬가지이다. 아잔타의 벽화를 보면서 불교예술의 무궁무진함을 새삼 깨닫는다.

아잔타 석굴 참배를 위해 접근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석굴과 같은 레벨로 진입하는 경우, 접근성은 좋지만 한 눈으로 조망할 수 있는 경이로움의 순간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감동을 선택했다. 석굴 반대편의 언덕 위에서 하차하는 방법이다. 처음 아잔타의 반대편 언덕 위에서 내려다 본 석굴의 전경. 이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감동의 순간. 더 이상 설명할 수 없는 감동의 현장이다. 이 감동을 안고 언덕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길. 아잔타 기행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인도의 석굴사원은 중국으로 들어가 화려한 역사를 맞는다. 키질석굴, 돈황 막고굴석굴, 병령사석굴, 맥적산석굴, 용문석굴, 운강석굴 등 한마디로 화려하다. 이들 중국 석굴의 바위는 역시 파기 쉬운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돈황처럼 엄청난 규모를 자랑할 수 있다. 석굴사원의 역사, 이는 불교 동전(東傳)의 역사와 호흡을 함께한다. 물론 인도나 중국의 석굴은 모두 천연 암벽을 파고 들어가 조성한 것이다.

이런 석굴사원의 문화가 한반도에 도달하여 토함산에서 결정판을 이룬 것이다. 그래서 토함산 석굴암의 의미는 아무리 강조해도 넘치지 않는다. 그것도 치밀한 설계와 기획에 의한 인공 석굴이지 않은가. 아잔타에서 나는 토함산을 생각하면서 불교 동전의 참 의미를 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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